율곡마을 인문지리환경(판관대 위치 비정)

- 정원대 시인 향토사학자
- 율곡마을역사정립세미나 제2발표 원고

정원대 승인 2020.12.29 13:24 | 최종 수정 2021.01.11 15:15 의견 0

율곡마을 인문지리환경 (판관대 위치비정)

정원대 시인 향토사학자

1. 머리글

율곡 이이 선비행장에 ‘혹귀임영 惑歸臨瀛 혹거봉평 惑居蓬坪’ 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혹은 임영으로 근친을 가 계시기도 했고 봉평에서 살기도 하다가 ”로 번역된다.1)

임영은 어디이고, 봉평은 어디인가?

2.역사에 나타나는 봉평

1551년의 기록2)

“임영에 근친을 가 계시기도 했고 봉평에 살기도 하였다.”

1560년 이후 양사언 관련 기록3)

“현재의 봉평이란 지명도 양사언이 자주 이곳에 와서 지방 유생들과 학문이나 시를 서로 이야기 했다 하여 양사언의 호 봉래 蓬萊의 蓬자와 평촌 坪村의 坪자를 합쳐 봉평이란 지명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1757-1765 여지도서(輿地圖書) 4)

“봉평면은 봉평리에 200호, 면온리에 160호로 모두 360호로 이중 남자가 811명, 여자 840명으로 총 1,751명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89년5)

봉평면에는 이면온리 1개리에 303호수로 남자 945명, 여자 933명으로 총 1,878명이 살고 있었다.

1800년 6)

강릉 영서(嶺西)의 6개 창(倉)과 삼척(三陟) 사미창(四美倉)의 곡식에 대한 일은 모두 도신의 장계(狀啓)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봉평창(蓬坪倉)의 환곡 중에는 직(稷) 200섬이 있는데 직은 구황(救荒)을 위한 종자곡으로 적합하지 않고, 소두(小豆)는 본래 널리 경작하는 곡식이지만 140섬에 불과하므로 직 200섬을 소두로 준절하여 환작하였습니다. ”

1861년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 봉평 기록이 있다.

1871년


고종8년 열읍지도 列邑地圖를 만들어 올리라는 어명에 따라 제작한 1872년 고종9년 강릉대부지도에 봉평창( 蓬坪倉)이 그려져 있다.

1906년 9월24일

지방구역정리건으로 강릉군에 속해있던 일부면이 분리되어 진부면 대화면 봉평면이 평창군에 이속되었다.

1909년 평창군신지지7)

동서가 20리요 남북이 40리에 이른다.

지세는 산이 겹겹이요. 토질은 척박하고 물이 많다.

호수는 봉평리 271호 면온리 163호 등이 있었으며 창촌(봉평)은 군 북방 70리에 있으니 면민이 모여 사는 곳이라 상리 上里라 칭하고 면온리는 하리 下里라 칭하여 2개리가 있었다.

평창군신지지에 첨부된 지도에는 봉평, 창촌, 그리고 판관대의 지명이 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백옥포리 白玉浦里도 포함되었다.

백옥포리 일대에 대한 토지조사사업은 1915년과 1916년도에 이루어 졌다.

1983년에는 진부면 도사리 속사리 노동리 용전리 이목정리와 봉평면의 백옥포리 일부, 장평 대화면의 신리 등을 분할 재산리로 만들고 용평면을 새롭게 신설하였다.

3. 임영은 어디인가?

고려시대8)

충렬왕 34년(1308)에 강릉부(江陵府)로 고쳤다. 공양왕 원년(1389)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임영(臨瀛)이다.

조선시대 9)

공양왕(恭讓王) 원년 기사에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22년. 】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별호는 임영(臨瀛)이라 한다.

1551년 율곡이이가 지은 선비행장에는 임영이란 지명이 세 번 나타난다.10)

첫 번째는 임영을 귀녕 歸寧 (여자가 친정에 부모를 뵈으로 가는 것)의 대상지로서 표현하고 있다.

“그 뒤에 자당께서 임영으로 근친을 가셨는데 後慈堂歸寧于臨瀛”

두 번째는 사임당이 대관령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이별하고 서울로 향하는 심정을 표현한 시에서는 구체적으로 북평(北坪)과 임영(臨瀛)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머리하얀 어머님을 임영에 두고 慈親鶴髮在臨瀛

장안을 향하여 홀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獨去情

고개를 돌려 북촌을 바라보노니 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 날아 내리는 저녁 산만 푸르네 白雲飛下暮山靑

여기서는 임영(강릉)과 장안(서울)을 대비하여 사용하고, 임영과 북촌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세 번째는 임영은 외갓집으로 , 봉평을 거주지로 표현하였다.

“그 뒤에 임영으로 근친을 가 계시기도 했고 봉평에서 살기도 하다가

其後 惑歸臨瀛 惑居蓬坪“

당시에는 행정구역상 봉평이 강릉대도호부에 속하는 곳인데, 율곡이이가 돌아간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에 굳이 강릉의 별호인 임영은 외갓집, 봉평은 살림집으로 구분한 것은 앞에 본 ‘귀녕우임영 歸寧于臨瀛(강릉에 근친을 가셨다)’는 표현과 같이 강릉 오죽헌은 자기의 고향집이 아니며 외갓집이고, 살았던 집은 봉평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판관대의 위치는 어디인가?

판관대의 유래는 판관의 집터라는 의미로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1501-1561)가 수운판관을 지낸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이원수는 음직(蔭職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을 받는 일)으로 종5품인 수운판관에 임명된 것은 사임당 죽기 1년 전인 1550년(율곡15세) 이므로 당대에 판관대로 불렸을 가능성이 적다.

경술년 1550년 여름 아버님께서 수운판관에 임명되시고 이듬해 봄에 삼청동 셋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11)

1905년 의암유인석이 1906년 추성구 선생에게 쓴 편지에는 판관대가 집 터가 아닌 실제로 당시에 봉평에 있는 건물로 표현하고 있다.12)

율곡이 수태된 그곳의 판관대가 빈 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곳에 특별히 율옹(주; 栗翁, 율곡 이이를 지칭함)의 사당을 짓고 지금 짓고있는 사당건물에는 (주; 봉산서재) 화옹 이하의 유상을 받든다면13) 일이 적절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한 마을에 사당이 둘인것도 영 마땅치 않으니 그저 율옹만 모시고 마는 것도 못합니다. 만약 지금 정하신 것처럼 한다면 제 생각만 뜻도 없고 말할것도 없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율옹의 후손인 이학사(李學士)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그 뜻을 어떻게 어길 수 있겠습니까?14)

이 당시에 작성된 평창군신지지에는 판관대라는 지명이 존재한다.15)

이 지도에는 장평과 봉평사이에 판관대라는 지명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근세의 자료로 토지조사부를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1912-1918) 이전에는 읍 면 동 지역에 땅의 번지가 모호했다. 최근 평창군민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1915년과 1916년 백옥포리일대의 토지조사부가 작성되었는데 백옥포리 일대 5만여평의 토지가 모두 강릉 죽헌동에 거주하는 권영달의 소유로, 오죽헌에서 소유한 것으로 밝혀졌다.16)

봉평면지에는 이곳 일대의 토지와 관련하여 1910년을 전후하여 토지분쟁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춘추봉향할 수 있도록 사패지를 하사하였는데, 서울에 거주하던 신현(申鉉)이 관리하며 소작료로 춘추 봉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토지 측량때 자기 명의로 바꾸고 나경숙(羅敬叔)에게 매도하여 이곳 유림에서 이의를 제기하여 되찾았으나 소송비용과 채무가 많아 부득이 동척회사 최준집에게 저당하고 채무정리를 하였지만 대출상환 능력이 없어 하사토지는 개인소유가 되었다고 한다.”17)

장정룡교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임시조사국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현재의 판관대 일대인 206-248번지는 답(畓)으로 강릉군 정동면 죽헌리 권영달씨가 대정 4년인 1915년부터 1916년 사이 소유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전답, 대 등은 비고 란에 ‘최준집’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저당을 잡혔던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18)” 고 이러한 분쟁설에 증거를 제시하듯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평창군에서 보관하고 있는 『토지조사부』의 원본에는 더 많은 토지가 권영달의 소유로 되어 있고, ‘최준집’이라고 쓰여있는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장정룡교수가 ‘저당을 잡혔던 사항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에 신현이 자기 명의로 바꾸고 이를 매도하였다는 봉평면지의 기록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 판관대의 위치에 관한 증언

용평면 백옥포3리 거주하는 김경황 어르신은 용평면 백옥포3리 227번지(대지 80평)가 율곡 출생지라고 증언하고 있다.

김경황씨는 일제강점기 강릉 부자 최준집이 사패지 땅을 매입하면서 그의 부인 나경숙씨가 집을 신축코져 하였으나 지역주민이 율곡 잉태지 땅을 팔지 않아서 30m 죄측에 개인주택을 지였다고 증언한다.(용평면 백옥포3리 박*화의 집)

백옥포 1리에 거주하는 양원모씨는 백옥포 3리 518번지가 판관대 자리라고 자신의 부친에게 들었으며, 그 자리에서 1990년 경지정리할 때 토기와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 판관대 기념비 위치의 내력

봉평유림들은 상록회를 조직하여 판관대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자리를 모색하다가 1988년 설치된 판관대 기념비에서 100m 떨어진 도로 건너편 빈터가 잇어 일단 그곳으로 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터가 도로환경 등 판관대 세울 여건이 되지 않아 권*철씨가 땅과 바꾸기로 했는데 그 위치가 현재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19)

5. 율곡전서에 나타난 평창

율곡 5세 (1540년)

“어느날 큰 비가 와서 마을 앞 시냇물이 넘치는데, 내를 건너가던 행인이 발을 잘못 디디어 넘어지자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였건만, 오직 선생만은 기둥을 붙들고 혼자 애를 쓰면서 걱정하다가 그가 안전하게 됨을 보고서야 안심하는 빛을 띄다.20)

운교역 雲交驛

장맛비에 여울이 된 산길이라서 積雨瀨山路

아침 내내 돌다리만 밟고가세 終朝行石梁

사람은 주막집 먼 것을 시름하는데 人愁荒店遠

말은 푸른 들 긴 것을 좋아하네 馬愛綠坪長

열흘 동안 쪼이는 삼복 더위라서 十曝三庚熱

나무한그루의 그늘이 천금 값이네 千金一樹凉

그래도 나그네 고달픈 줄 모르는 것은 不知爲客苦

모두가 고향이 가까와지기 때문이네 都爲近湖鄕

다시 오대산에 노닐면서 석간에서 눈을 밟다 再遊五臺山石澗踏雪

사월의 산 속에서 눈 비탈길 걷노니 四月山中踏雪崖

바람에 옷자락 스쳐 허공에 드날린다 天風吹衱空中擧

뭇 산봉우리 온통 푸르러 소리없이 고요한데 羣峰擁翠寂無聲

소나무 밑 그윽한 샘물이 사람향해 속삭이네 松下幽泉向人語

이외에 율곡전서에는 “남대 서대 중대에서 노닐고 상원사에서 묵다 遊南臺西臺中臺宿于上院” 등 오대산에 관한 시가 여덟편에 달하는 등 특히 오대산을 사랑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21)

6. 조선시대 율곡고향을 중심으로 본 도로

대동여지도, 강릉대도호부 지도 등을 살펴보면서 율곡과 사임당은 어느 길로 강릉으로 갔는지 추정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조선시대 운교역 방림역을 지나 해화 안락(안미리)강줄기를 따라 봉평 유포리로 가는 길과 봉평(용평) 유포리에서 속사천을 건너 진부역, 그리고 횡계역을 지나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가는 길을 추정해 본다.

뭇 사람들은 평창지역을 영서 嶺西(영세)사람이라고 하지만 한양에서 볼 때 봉평(용평)은 서쪽이 아닌 동쪽이라고 한다. 이 또한 용평면 백옥포 3리 지역을 율곡의 고향이라고 제시한다.


1) 이이,「선비행장」, 이종술 외 역주, 『국역 율곡전서(Ⅳ) : 잡저- 신도비명, 묘갈명, 행장, 습유』(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6), 300∼302쪽.

2) 위의 글

3) 평창군, 『평창군지』,평창군,1979, 454-5쪽 ; 양사언의 평창군수 재임기간은 1560년에서 1564년이다.

4) 『여지도서(輿地圖書)』 강릉대도호부편 영조 33년-41년 발간

5) 『호구총수 戶口總數』,1789

6) 『일성록』 정조24년 경신 윤4월 15일자

7) 『평창군 신지지』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편찬된 책으로, 서울대학교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두종의 평창군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8) 『고려사』 권58 志 권12

9)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10) 이이, 앞의 글,302쪽

11) 이이, 앞의 글,302쪽

12) 박도식. 앞의 글, 65쪽.

13) 화옹은 화서 이항로를 지칭함이며, 유상은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를 말함.

14) 無已則聞栗翁受胎當地判官垈.虛而不用.特建栗翁祠於其地.今所營祠屋.奉華翁以下遺像.粗合事宜.然一里兩祠.終是未穩.不如單奉栗翁而止也.

15)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편찬된 강원도 『평창군신지지』〈규장각소장〉에 수록된 지도. 원본의 크기는 37cm×27.2cm이다. 전통적 회화식 지도에 근대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하단에 지도 내 기호에 대한 범례가 있고, 축척은 20만분의 1로 명기되어 있다. 관할 행정 구역은 읍(邑)과 촌(村)으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노란 선은 도로를 의미하며 마을 사이의 거리가 표기되어 있다.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된 점이 눈에 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푸른 곡선은 하천을 그린 것이다. 가장 북쪽에는 대관령이 그려져 있다. 평창군은 1906년 강릉군으로부터 대화(大和)·진부(珍富)·봉평(蓬坪)의 3개 면이 편입되고 동면(東面)이 정선군으로 이관되면서 강계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본 지도는 그 이후의 상황을 담고 있다. 평창읍이 남쪽으로 많이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지도의 중간 부분이 일부 유실된 상태이다

16) 일제강점기 토지조사부에는 백옥포리 206번지에서 248번지까지의 42개번지와 백옥포리 392번지에서 404번지까지의 13개번지의 토지가 모두 강릉군정동면죽헌리(江陵郡丁洞面竹軒里) 권영달(權寧達) 소유로 되어 있어 오죽헌에서 이토지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17) 『봉평면지』,평창문화원,1991,76쪽

18) 장정룡,『「평창판관대 유적지의 전승설화 고찰」,『평창의 뿌리』 2019 제2집, 평창문화원, 2019.85쪽

19) 용평면 백옥포 3리 거주 김경화 86세 증언

20) 김동주 외 역주, 『국역 율곡전서(Ⅶ) : 년보 행장 제가기술잡록』(한국정신문화연구원,2002), 102쪽.

21) 이종술 외 역주,『국역 율곡전서(Ⅰ)』(한국정신문화원구원,1996)123-129쪽,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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