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연표] 891년 궁예가 욱오를 습격하여 항복시켰다.
- 동사강목 제5상?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
- 신해년 진성 여주 5년(당 소종 대순 2, 891)
전형민
승인
2021.08.15 11:37
의견
0
동사강목 제5상 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
신해년 진성 여주 5년(당 소종 대순 2, 891)
동10월 북원의 도적 양길이 궁예(弓裔)로 비장(裨將)을 삼아 주천(酒泉)ㆍ내성(奈城) 등의 군현을 함락하였다.
궁예는 헌안왕의 서자이다. 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태어날 때에 집 위에 흰 빛이 무지개와 같이 하늘에 뻗쳤고, 태어나면서부터 이[齒]가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또 이상한 빛이 있으니, 혹시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대로 두지 마십시오.”
하므로, 왕이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죽이게 하였다. 사자가 강보(襁褓) 속에서 끌어내어 누각 아래로 던졌는데 젖 먹이는 여종이 몰래 받다가 손가락이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그 여종이 안고 도망가서 양육하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世達寺) 고려 흥교사(興敎寺) 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장성하게 되자 승려(僧侶)의 규율에 구애되지 않고, 의기양양하고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바리때[鉢]를 들고 재(齋)를 지내러 나아갈 때 까마귀 한 마리가 아첨(牙籤)을 물어다가 바리때 속에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보니 왕(王)이란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 일을 숨기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매우 자부(自負)하였다.
그는 국가가 쇠하여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이 흩어지며 여러 도적이 봉기함을 보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얻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 개산(介山)지금의 죽산 의 도적 기훤에게 가 의지하였으나 기훤이 거만하여 예로 대우하지 않으므로, 궁예는 마음 답답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고 가만히 기훤의 부하 원회(元會)ㆍ신훤(申烜) 등과 결탁하여 벗을 삼고,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로 가서 의지하니, 양길이 잘 대우하여 일을 맡기고, 1백여 기병을 나누어 주어 동쪽 지방을 치게 하였다. 이에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악산(雉岳山)지금의 원주부 동쪽 25리에 있다석남사(石南寺)에서 자고, 다음날 행군하여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江陵)) 관내의 주천(酒泉 : 지금의 원주에 소속되며 원주 동쪽 90리에 있다] ㆍ내성[奈城 :지금의 영월군(寧越郡)] ㆍ울오[鬱烏 혹은 욱오(郁烏)라 하며 지금의 평창군(平昌郡)] ㆍ어진(御珍:지금은 미상)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저작권자 ⓒ 평창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