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상고사

평창의 하늘이 열리고...

高 柱 浩 승인 2021.08.15 17:00 | 최종 수정 2021.08.18 00:20 의견 14

평창역사의 개원

1)구석기 시대 유적

◆ 자료조사를 통해 평창읍 도돈리 평창강 북쪽 언덕에서 찍게, 찌르게, 긁게 등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강원도 평창군 강원문화연구소 2004. 「문화유적 분포지도 - 평창군」

◆ 2007년에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학술발굴조사에 의해 평창군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발굴조사 결과 동굴내부 3개 지층에서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와 동굴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박영철, 2008, 「강원 평창군 기화리 쌍굴의 퇴적편년의 검토」

2) 신석기 시대 유적

◆ 평창읍 유동리, 주진리에서 처음으로 빗살 무늬편을 수습하여 유적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림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7,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후평리 평창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편이 출토되는 야외 노가 발견되었다.

*중부고고학 연구소, 2013, 「평창,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후평리 유적」

◆ 용황리. 다수리와 천동리 일대에서 수혈유구, 야외 노, 토기류등이 확인되어 이들 중심으로 선사문화를 형성하였슴을 추정할 수 있다. *(주) 예백 문화재 연구원. 2010, 「평창 용두리 유적」

3) 청동기시대 유적

청동기 유적은 이전 시대보다 보고된 수도 많고 출토 유물도 다양해 평창읍 일원의 충적지를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하였슬 것을 것으로 판단된다.

◆ 지석묘(평창의 고인돌과 선돌)

받침돌로 지하에 무덤 방을 만들고 주위에 여러 개의 돌을 놓은 후 덮개돌을 얹은 구조이다. 이를 개석식(蓋石式) 기반식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평창의 고인돌은 기반식으로 약 37개가 남아 있으며 대부분의 고인돌은 다섯 곳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1, 상리群-고인돌 3기와 2기는 자연석으로 추정

2, 종부리群 - 10여기가 있으며 그 중 2호기는 5~8cm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3, 계장리群-현존 1기가 남아 있으나 원래는 20여기가 있었는데 농경지에 훼손되었다

4, 후평리群- 6기의 고인돌이 전해지고 있으나 과거에는 20여기에 달했다 한다.

5, 임하리 群- 7기가 전해지며 그중 한 기는 칠성바위라 불린다.

그외 대화면 신리, 대화리, 하안미리등에 몇 기의 고인돌이 잔존하며 그 중 진부면 수항리의 수항리사지 옆에 농경지 고인돌은 밭 주인의 증언에 의하면 고인돌 위에 10명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밭일 중에 참을 먹기도 했다하는 크기(지름 약 3m정도)로 아마 석질의 모양새도 상당히 좋았을 듯 하다(현 수항초교 앞 민가에 탁자석 상판석처럼 주변의 돌들을 보면 색상과 평편함의 변성암이란 점을 느낄 수 있다)

* 강원도 고인돌 특징은 대부분 개석식이며 370여기중 북한강은 인제등보다 충적지가 발달된 춘천에 많으나 남한강에서는 하류인 영월과 원주지역보다는 상류인 평창과 정선 지역에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밀집 되어 있다.

이는 전곡리 유적과 비슷한 지형으로 수심이 낮고 강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중상류 쪽이 청동기인들의 생활터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 유역에서는 대규모 군집을 볼 수 없고 다만 2~5기가 모여 소형군집을 이루는 것이다.

평창의 고인돌은 대부분 파괴되어 현황조사및 재정비, 관리가 시급한 상태이다.

◆ 임하리의 선돌 - 선돌의 뜻은 고인돌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선돌은 전국적으로 약 10~15개 분포한다.

◆ 하리 청동기 유적 - 최근 평창읍 하리 240-4번지의 신축건물 부지내의 유적은 고조선식의 청동검과 인골이 반출된 지석묘가 조사되어 청동기 시대 후기 평창일원에 사회적으로 상당히 분화된 청동기 시대의 취락과 분묘군이 존재했슬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 취락유적

1. 2010년 후평리 유적의 시굴조사로 공열문토기와 적색마연토기,석기류가 출토된 취락이 확인되었다.

*(재) 예맥문화재연구원, 2010, 「평창 용두리 유적」

2. 천동리 220번지 주택신축부지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 주거지 1동과 철기 주거지 1동 조사.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이중구연과 단사선문과 공열문 토기와 구순각목문토기, 적색마연토기등의 토기류와 석촉, 석부, 방추차 등의 석기류등이 출토되었다.

*강원문화재 연구소. 2011. 「평창 천동리 220번지 주택 신축부지애 유적발굴 조사 보고서」

3. 천동리. 마지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16동, 주구묘와 석관묘 각 1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 2012. 「평창 천동리 마지리 취락」

4. 약수리, 종부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9동과 주구묘 1기, 수혈유구, 야외 노등이 조사되었다.

*(재) 강원고고문화연구원. 2013. 「평창 약수리 유적 」 *(재) 강원고고문화연구원. 2013. 「평창 종부리 유적 」

5. 주진리 유적 발굴조사에 위석식 노 3기가 설치된 세장방형 주거지가 조사되어 구순각목공열문토기등이 출토되어 정선 아우라지 유적, 주천리 유적과 함께 청동기시대 조, 전기 문화의 확산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4) 철기시대

1. 지표조사를 통해 평창읍 임하리, 종부리, 응암리, 중리, 마지리, 대화면 하안미리등지에서 타날문 토기와 적석총이 보고되었다

* (재) 예맥문화재연구원, 2010, 「평창 용두리 유적」

2, 적석총은 4개소로 마지리, 응암리, 종부리, 중리에서 돌무지가 확인됨에따라 적석총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대부분 정밀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명확한 규모나 성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응암리 적석총은 지표조사시 타날문 토기와 단경호등이 발굴되었고, 2008년 시굴조사시 격자 타날 토기편이 수습됨에 적석총 상부는 일부 훼손되었지만 매장 주체부는 잔존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 (재) 예맥문화재연구원, 2010, 「평창 용두리 유적」

* 필자는 본인의 블로그에 평창의 적석총에 대한 학계의 규명에 관하여 명확한 오류를 지적 합니다.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 적석총이라는 역사에 문제제기]

출처 : 블로그 "후세백작의 지평" http://blog.daum.net/kkks1/1397

◆ 최근 방림리와 마지리, 종부리 유적등의 발굴조사를 통해 평창의 철기시대 유적자료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방림리 유적에서는 철자형과 방형 주거지 3동이 조사되었다.

* (재) 강원고고문화 연구원 . 2012. 「평창 방림리 취락」

* 강원문화재 연구소. 2011. 「평창 천동리 220번지 주택 신축부지애 유적발굴 조사 보고서」에서 주거지 1동이 조사됨.

* (재) 강원고고문화 연구원. 2012. 「천동리, 마지리 취락」에 철기시대주거지 12동과 야외 화덕이 종부리 유적에서 철기시대 주거지 4동이 조사되었다.

* (재) 강원고고문화 연구원. 2012. 「평창 천동리252번지내 유적 조사 보고서」에서는 천동리 2호에서 부뚜막이 설치된 점등으로 기원후 3세기중반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파악하였다.

◆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는 대상리 안정말사지. 하리 석실고분(시루목 소재). 종부리 지석묘가 있다.

* 대상리 안정말사지는 탑 부재와 석렬등이 조사된 바 출토유물로 토수 기와와 인화문 토기편등이 있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상회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 되었다.

강원문화재 연구소. 2006. 「평창 대상리 사지 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발굴 조사 보고서」

* 하리 석실 고분은 1984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내부 실측 조사중 출토 유물은 없어 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노산성과 유동리 사지가 대표적이다. 강원대학교 박물관. 2004. 「평창 노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참고자료

◆ 평창에서 청동기시대 주구묘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종부리 일원으로 국도 31호선 영월-방림간 도로개설 구간에 대한 문화재발굴조사로 지난해 시굴조를 하는 평창군 종부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전기로 분류되는 주구묘(周溝墓) 무덤을 보호하기위하여 도랑을 두르고 중앙에 움[土壙]을 파서 시신을 직접 매장하는 무덤 형태와 수혈 건물지(竪穴建物地) 땅을 파서 만든 집터, 철기시대 수혈 건물지, 삼국시대 석실묘 등 선사와 역사시대의 주거와 분묘유적을 발견하였다(2012,11)

특히, 청동기시대 전기로 분류되는 주구묘에서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 ; 시신이 놓인 곳)가 토광목곽묘로 이뤄진 것을 확인했으며, 이는 이제까지 확인된 예가 없는 것으로 청동기시대 분묘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평창 상고사 연재 단원 끝> ++++++++++++++

지금까지 평창역사 기록에는 평창역사의 가장 중요한 항목인 평창역사의 시원인 미탄면 쌍굴에 3~4만년전 구석기 말기의 유적이나 평창읍 하리에서 발굴된 청동기 역사로 우리나라 고최 상한대의 2,600년전의 전신상 고 인골이 고조선 청동검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상고사의유적, 유물은 지방사의역사를 넘어서서 전국적인 역사문화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지만 그 출토자리에 표지판 하나도 없다. 따라서 평창관광안내지도에 나올수도 없다.

이러한 평창상고사는 아직 필자의 게시글 이외엔 평창 역사서에 기록되지도 않는바 평창역사 유관단체의 낮잠론인지 평창향토사가들의 무지에 의한 직무유기인지 알 수도 없지만 가령 양구의 선사 박물관이나 태백의 자연사 박물관보다는 월등한 문화유물인데

기화리 쌍굴에 구석기 유적이란 표지판 하나라도 있고 관강가이드 책자에 소개되었다면 열목어 박물관이 파리 날리는 것이 아니라 청옥산 육백마지기에서 잠시 3만년전에 인류가 살았다는 쌍굴도 찾아갈 것이기에 이러한 역사 문화의 수평적 발전을 가한다는 역사논리도 모르고 오직 평창강에 조각돌 하나 주워서 옛날 사수천이라고만 떠드는 역살를 하고 있을 것인가??

여사문화론에 메밀꽃 필무렵의 봉평은 지역민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전국적 테마로 부각되엇다. 하지만 주변의 수평척 횡적인 문화 연계가 없어서 빈촐하다는 지적으로 이러한 문제의 타계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관점의 고찰이라든가 하는 이러한 문제까지 앞으로 서술할 것입니다.

우선 평창의 하늘이 열리고 평창의 옛 선인들이 살던 신, 구석기 역사를 기록하며 그에 대한 감상과 이해도 즉, 오늘의 역사문화의 아이콘으로 계발상과 이러한 초기 역사를 지나서 우오, 욱오의 문제등과 평창의 진산 노산에 얽메이는 여러 역사문화를 새롭게 기술할 것입니다.

우선 노산성에 역사는 둘레와 높이, 반쯤 퇴락한, 조산시대 김광복이 중수하였다는 것 이외엔 요즘 어떤 학자가 노산성의 우물을 찾아서 노산성지라하는 점 이외에 노산성이 읍치 산성의로서의 이해 기술은 전무하다. 또한 노산에 있는 읍치 성황사는 국사 성황사로 일반 도제와는 다른 개념 즉 유교적 개념에서 출발하는바 여기에 요즘 책에 비나이다란 주술이

가능할까 또한 젯배기란 증언은 노산성 조명시엔 자연히 따르는 역사물로 그런 증언은 무 효능이란 점까지 그리고 평창관아에 모습, 즉 읍치의 이해에 지난해에 실행한 평창의 국구사우 세미나 리포트에 평창의 관아는 중리 교회 전까지 무척이나 컸다고 돈들여 항공촬영까지 하며 관아터를 그리고 있는 바 이 문제의 발단은 이경식의 국구사우 터 탐색의 논문에 오류에서 기인한다.

물론 동 논문은 여러고찰의 노력은 역력하지만 관점의 문제에서 여러번 빗나가 오류로 조명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논문에서 경복궁 동쪽에 종묘가 있듯이 평창관아에 국구사우는 동쪽에 있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종묘사직에 일반적 준례로 맞지만 조선시태는 음양의 수치를 따지는 풍수사상에 입각하는바 관아는 사람이 사는 양택이고 사당은 신의 땅으로 음택이라면 평창관아는 음택지까지 포함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객사도 관아 내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외래 학자은 이러한 관아를 항공촬영까지 하면서 평창의 관아는 컸다고 하는데 외래 학자는 평창의 전체를 조망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바 평창시내 일원인 중리 하리는 일제때 제방으로 그 면적이 두배나 늘어났다.(이점은 다음 본 논문의 비평에서 밝힙니다) 그러면 조선시대에 제방이 없을 경우에 하리. 중리는 현재의 면적의 절반정도라면 관아는 상대적으로 더욱 더 컷다고 표현하였슬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이번 외래 학자들도 양식이 없는 학자들이다.

전장의 평창 입탄 지명의 고찰에서 역사는 현 시대의 눈이 아닌 당 시대의 눈으로 보고 현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필자는 강조하였던바. 그 학자들은 지금의 눈으로 옛 국구사우터를 바라보고 그러한 평가를 내린 것이 오점이다.

아뭏든 평창의 관아는 컸다는 점이 마치 자랑처럼 앞으로 역사에 많이 인용될까바 바른 이해의 서술을 합니다. 이렇듯 평창 역사의 모든 오류들까지도 모두 바르게 서술하여 새로운 평창학을 만들겠습니다.

즉 평창학이란 콘텐츠는 이땅에 선인들의 역사는 누구보다 우리가 더 잘 알기에 외래의 학자 손을 거치더라도 우리의 힘으로 또한 지방화시대에 이땅의 역사는 총체적으로 이땅에서 보전하겠다는 사명감의 일환으로 노력하여 평창 역사 문화 향상에 일조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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