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평창의 상고사/ 초기 철기시대

高 柱 浩 승인 2021.08.18 18:47 | 최종 수정 2021.08.18 19:14 의견 0

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후세백작 2020.03.13 08:21

"평창 후평리, 방림리, 주진리 유적"<강원고고문화연구원 학술총서 51책>

- 국도 31호선 영월- 방림(1) 도로건설공사 구간(후평-주진- 방림리) 구간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원주지방 국토 관리청, 강원 고고문화 연구원

(아래 내용은 2014~5 정밀 발굴조사에 의한 2007년 보고서애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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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도 31호선 영월-방림(1) 도로공사구간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와 유구및 유물현황

1) 1차 조사- 후평리 유적

*평창군 평창읍 후평리 480-1번지(8,213㎡). 조사기간 2014, 10, 25~12, 10

*조사결과 철기시대 주거지 15동. 굴립 주유구 3기. 주혈군 1기. 구상유구 1기. 수혈유구 10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1동을 발굴 조사로 철기시대 경질 무문토기호, 타날문 토기 단경호, 연질 호, 타날문 옹, 조선시대 기와편 등의 토기류와 와전류를 비롯해 석검, 석촉(재), 석도, 방추차, 지석, 고석, 발화석, 마노제, 관옥등의 석기류와 철촉, 철부, 철도자, 철착, 철제 삽날의 철기류 총 90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2) 2차 조사 - 방림리와 주진리 유적 조사

* 방림리유적 - 평창군 방림면 방림리 612-4 번지 (1,822㎡) 조선시대 토기류, 철기류 총 9점을 수습(조사기간 2015,10,6~10, 20)

* 주진리 유적 - 평창읍 주진리 488-11번지(6,580㎡) 청동기 시대 토기류, 석기류와 조선시대 도기류, 청동가류등 총 32점 (조사기간 2015,11,6-12,3)

* 주진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2동과 야외노 1기, 조선시대 토광묘 1기를 조사하였으며, 청동기 시대 구순각목 공열문, 구순각목문, 공열문, 무문토기와(적색마연) 대부소호, 적색마연 장경호, 토제 어망추와 조선시대 시유도기등 도, 토기류를 비롯해서 석촉재, 석추, 방추차, 지석, 고석, 연석, 작업대등의 석기류,용도미상의 청동기 제품등 총 32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3) 평창강 유역 철기시대 주거지 탄소연대 측정결과

유적명

방사성탄소

연대(BP)

보정(68,2%)

연대

보정(95,4%) 연대 연대눈금 측정기관
후평리 3호 1,740±30 259AD~340AD 80AD~240AD 국립 공주대학교공동실험 실습관
후평리 4호 1,850±30 125AD~245AD 80AD~240AD 국립 공주대학교공동실험 실습관
방림리 1호 1,860±30 80AD~120AD 80AD~240AD( 국립 공주대학교공동실험 실습관

종부리 2호(강고연2011)

1,720±40

1,860±40

AD320~D380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약수리 2호(강고연2013) 1,770±40 AD270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천동리 4호(강고연2012) 1,730±60 AD315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마지리(강고연2012)

1,570±50

1,980±60

AD486

AD40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강고연 = 강원고고문화연구원 )

* 각 유적 조사분은 하나씩 별도 발표함

이로서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은 평창의 청동시대,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 아래의 도판은 국도 31호선 영월-방림(1) 도로공사구간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와 유구및 유물현황중 발췌.

평창읍 후평리 일원
▲ 경질 무문토기 호
4호 주거지 발굴. 복원구경 22.0cm. 가로 41,5cm, 저경 12,3cm. 두께 0,95cm. 섹조2,5YR
◀ 왼쪽) 타날문 동체편- 7호 주거지 출토 타날문 잔존 고 4,9cm
▶오른쪽) 경질무문토기 뚜껑- 5호 주거지 내부 퇴적토 잔존고 7,7cm
왼쪽) 경질 무문 토기 호 -3호 주거지 노 주변 출토 복원구경 23,4
중앙) 타날분토기 동체편 -4호 주거지 내부 퇴적토 발굴
오른쪽) 4호 주거지 휴대 간편토록 납작한 활석이용. 상면 중앙에 발화 홈이 있다.
왼쪽) 유병식 석검편- 4호 주거지 내부 잔존길이 10,4cm
오른쪽) 타날문토기 단경호- 4호 주거지 종방향 타날문 구경 19,6 두께 0,5
21. 석제 방추차 - 4호 주거지. 직경 6,1 투공직경 1,0 천매암
23, 무경식 철촉 -후평리 유적 철기시대 4호 주거지 출토 (9,0*2,1 두께 0,25)
24)철착-5호 주거지 출토. 철재공구로 추정. 길이 4,1*0,65
25. 철도자편- 후평리 유적 철기시대 4호 주거지. 5,5*1,55
26. 철재 삽날- 후평리 유적 철기시대 4호 주거지. 20817,1 두께 0,8
49. 경질 무문 토기편
50. 타날문 토기 옹 구연부편
52. 석도- 9호 주거지 출토
53 지석- 중앙이 약간 오목한 장. 후면과 측면 모두 고타와 연마로 사용.하였고 중앙에 정마 흔이 분포하며 외면에 고타 흔, 후면에 일부 칡 마연흔이 보인다
121. 구순 각목 공열문 토기 편
구순을 포함한 기면을 물손질한 후 각목문과 공열문을 시문하였다
123~125) 토제 어망추

주진유적 2호지에서 출토, 무문토기편을 재활용. 크기는 5~6cm 두께는 2,2cm

주진강 위에 주거 하였기에 민물고기 잡이 도구로 반도와 유사한 도구를 사용한듯 합니다.

129) 주진리 유적으로 시유토기 구연부편

130) 미상 청동제품 (상하는 하나의 유물로 입체로 보이는것)

길이 18,3cm. 너비 0,2~0,6cm

철기시대 석조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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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과 이해>

이상으로 평창의 상고사를 기존의 내용에서 최근에 밝혀진 정확한 고고학적 시굴 조사 방법으로 밝혀진 역사사료에 의해 새롭게 조명하였습니다.

기존에 내용이란 읍면지나 군지, 지명지등의 군 발간의 연감등에서 역사서술이 아닌 새롭게 밝혀진 역사에 서술은 과거 시대에 역사자료를 출처도 없이 마냥 베껴쓰고는 자기가 답사하고 자기것인양 하는 악질적인 행위애서 탈피하여 새로운 평창 고대의 상고사를 조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 서술에는 개안으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자료를 찾는데,,,일전 대상리 사지 탑의 옛날 자료의 사진을 찾다보니 아마 그 출처는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7,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라는 책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동 책은 시판되지 않는 책으로 대화. 진부 도서관에 문의한 바 소장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래서 이 사진의 인터넷 게시자에게 문의 결과 평창군청 근무시 문화과에서 그 책을 스캔하였다 한다.

동 책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은 아마도 학술지에서 평창 역사를 서술할때 자주 인용되는 책으로 평창에서 실시하는 역사 세미나는 자주 인용되는 책으로 평창의 역사 사실 규명에 학자란 자들은 답사도, 증언도 없이 하는 제잘난듯 인용하며 무수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바 동 책 자체에서부터 검증을 하려 하여도 개인으로서는 구해 볼 수 없는 책입니다.

이렇듯 개인으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있기에 위의 게시한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과 "하리 청동기 유적"이나 "후평리 유적"등의 역사 글은 문화재청이나 고고문화원 사이트에 깊숙히 파 뭍힌 리포트를 들춰 찾아서 기록하는 것으로 또 하나의 문제는 개인이 리포트를 찾아 정리해 서술한다고 객관화 사료로 채택되는 것은 아니기에 개인이 정리할 사항이 아니라 평창군이나 평창의 관제 시스템의 공적인 역사 단체인 평창문화원이나 그 산하 평창 향토사학회가 주관하여 객관적으로 정립하여야 할 문제라고 보는 바이지만 그러한 단체들에서는 무엇이 바쁜 업무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평창 역사의 정사의 기록에 대해서 단 한마디 언급도 찾아 볼 길이 없다.

본인이 이러한 평창 상고사를 정리하게된 이유는 일전 평창 역사 연구자와의 이야기로 청동기 박물관을 만들면 채울만한 역사유물이 없다 하길래 본인은 몇 년전부터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내용도 단조로운듯 무리하다는 주장처럼 전달되기에 평창의 상고사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다시금 본인이 주창하는 청동기 역사 박물관이 필요한 점의 이해와 소통의 노력으로 평창의 상고사를 각 출처별로 빠짐없이 면밀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일련의 게시글에서 5~6 만년전의 미탄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인의 역사가 암사동 선사 유적이나 전곡리 구석기 유적보다 중요한 점은 기화리 쌍굴 유적의 특별한 점은 구석기인들의 도구인 밀게, 돌도끼등의 유물만이 아닌 상대적인 각 동물의 화석뼈를 통해 당시의 인간이 먹었던 동물들까지 생생하게 이해해 볼 수 있는 점이고, 하리 청동기 유적은 인골롸 함께 고조선식 청동검이 출토된 무후한 기록과 후평리, 천동리등 철기시대의 유물들은 평창읍 전 지역이 유물산포지로서 많은 유적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유적, 유물들은 영월- 방림간 도로 건설지역의 발굴 조사등이였고 앞으로 평창읍 전체가 유물산포지로서 어떠한 공사시에도 평창읍은 지금의 열 배 백 배의 공간이기에 채집될 수 범위는 크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앞으로 발굴될 수 있는 유물이 아직껏 발굴된 사료보다도 더 진귀한 역사 사료도 나올 수 있기에 아으로의 유적 발굴조사도 기대되는데 지금까지의 유적은 평창으로는 박물간이 없는 관계로 춘천 도립박물관이나 강릉등지의 박물관으로 전세살이 갔으나 앞으로 발굴될 유적도 모조리 타향살이를 보낸다면 그리고도 평창의 유산으로 무얼 더 기대할 것입니까??

우리는 노산성에 올라 충의제등 가식적인 제를 지내는 것은 무신정신만을 기리는 것으로 문치국가로서의 전체적인 이땅의 얼을 조명하기에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논고도 한 바, 진정 역사란, 이 땅의 먼 선인들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시적 삶의 궤로서 평창의 혼이 담긴 정채성과 우리의 기상을 자아낼 수 있는 역사물은 쓰레기로 보이듯 팽게치고,, 관치의 문화원이나 향토사 연구소나 향토사 연구자분들은 지금의 이런 상고사의 내용 한 번이라도 서술해 보았습니까??

위의 평창역사 서술에서 보듯 평창은 먼 옛날의 구석기시대 ,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궤적을 이루며 이땅에 선인들이 살아왔다. 이러한 점은 평창이 고대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이기에 선인들이 찾아들었고 모여살며 오늘에까지 이어 온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점은 평창초교의 교가에서 보듯 억만년, 억누리의 시,공을 넘어서서 우리는 산좋고 물맑은 천혜의 고장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얼은 팽개치고 내가 이땅의 주인이오 하고 유아독존하는 평창인들이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평창은 돌 체험관이란 기호적인 전시관도 생기듯이, 평창 시원에서 오늘에 이르는 삶의 역사궤적속에 평창 특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청동기 뮤지엄이 생긴다면 이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까??

앞으로 더 중요한 유적이 발굴되어도 이 땅의 주인들을 타향살이 보내실 것입니까?? 자주 인용할 것은 아니지만, 평창문화원은 평창의 유, 무형 자산을 기록화 하겠다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지만 본인으로서는 이러한 평창 역사이 얼이 가장 중요하고 또한 우리는 이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소명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문재는 지난해에 오대산 사고의 박물관이 건립되고 일본에서 돌아온 사고의 소장본의 원본이 소장되길 기대하였건만 영인본이라는 모조품만 비치되었습니다.

예전 유흥준 문화재 청장은 오대산에서 김진선 도지사에게 오대산에 박물관을 지으면 원본을 내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원본론을 언급한바 이때 평창의 사학자 한 분은 옆에서 들으니 원본을 준다 하여서 유청장은 다행히 계란 세례를 받지 않게 되었지만 후일 박물관이 건립되고서는 약속한 원본이 아닌 이비테이션의 영인본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 만약 평창에 박물관이 건설된다고 타지의 박물관에 비치된 평창의 유물이 모두 평창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문재입니다. 물론 청동기 박물관은 국립이나 공립으로 문화재청에 귀속되기에 일부 평창의 유산이 돌아 올 수는 있지만 중요 문화재의 보장성은 희박할 듯 한 것입니다. 과거 60년대 원주 단구동에 버려진 철불 5개를 춘천 박물관으로 입고되고나서 이후원주박물관이 생겼는데 원주 박물관의 메인 로비에는 단구동의 좌상 불이 전시되고 잇지만 그것은 원품이 아니라 이미테이션의 모조품입니다. 모조품이란 조각가 로댕의 활쏘는 브르텔이 호암 미술관에 있는데 이는 로트 번호를 가지고 로댕 회사에서 판매하고 80년대 초에 억대가 넘는 값일텐데,, 이럴때 이미테이션이 통하는 것이지 박물관에서 이미테이션(모작)은 박물관의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이라 보입니다.

평창에서 고고학회가 유물 조사시 지역 당당관은 발굴되는 유물에 대해 평창산이기에 후일 평창에 박물관이 건설되면 제 위치로 귀속의 반환 이행 서류를 작성하였을듯 하지만 오대산 사고의 영인본에서 보듯 시간이 흐를수록 반환의 보장성이 희박해질듯한 문제를 가지는것 아닌가 의문합니다.

그러나 평창 !!

위의 평창 상고사의 역사를 통해서 볼때 평창은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 삼국 시대로 이어 흐르는 역사를 유추해 볼때, 평창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마을이란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랗게 천혜의 자원을 선물받은 평창은 산이 굽고 물이 돌아 흐르며 빚어낸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인가 하는 점에서 바로 이곳이 금수강산이란 평창인의 긍지심을 자부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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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후평리및 평창읍 일대의 철기시대 도래는 삼한시대를 지나 삼국시대 불교가 전파되는 AD 300년대로 필자의 일설로는 (아직 역사서에는 없는 글로서) 당시의 철기 문화는 현재의 주철의 대량생산화는 아닌 초기 철기 시대 입니다.

철기는 용융점 1580도C이나 화목은 대략 1300도로서 주철생산에 한게를 가졌으며 물론 서양도 동일합니다.

이후 천년경 고려가 개국시 중국에 중원의 송나라는 풍로를 발명하여 숯을 만들어 풍로로 1580도의 철을 녹여 대량생산하게 되고 이웃 나라들의 주문에 의한 병기를 만들어 팔아서 중국역사상 가장 부유한 중국의 로마를 만듭니다.

여기서 세계 철기 생산이 대량화 되는 점에 관하여 필자의 생각을 담음에 그려 보이겠습니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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