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중 오대산 그림중 평창]

高 柱 浩 승인 2021.08.23 02:57 | 최종 수정 2021.08.23 03:10 의견 0

[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중 오대산 그림]

平昌歷史定立 후세백작 2018.06.12 15:4

청심대 (淸心臺)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1帖 1幅 청심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88년. 30 x 43.7 cm.

월정사(月精寺)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1帖 2幅, 오대산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88년 30 x 43.7 cm. 개인소장

오대산 중대 (五臺山 中臺)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1帖 3幅, 중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88년 30 x 43.7 cm. 개인소장

사고(史庫)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1帖 4幅, 사고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88년 30 x 43.7 cm. 개인소장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遠譜略)』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이다. 특이사항은 금강산에서 정진하던 사명당이 월정사 본전을 다시 짓고 금강산으로 돌아갔으나 선조의 명으로 사명당은 다시 오대산으로 돌아와 오대산 사고 건축의 총 감독관 하였습니다.

상원 (上院)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1帖 5幅, 상원사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88년 30 x 43.7 cm

대관령(大關嶺)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1帖 6幅, 대관령 전경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1788년, 30 x 43.7 cm

일반적으로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60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 화첩이다. 1첩(帖)당 12폭씩 묶어5첩(帖)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로 삼고 있다. 이 화첩은 본래 70폭이었다 하는데 근년에 10폭이 흩어지고 60폭만이 다시 5첩(帖)으로 꾸며져 있다.

겉표지에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표제가 묵서(墨書)되어 있을 뿐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제화시(題畵詩)등은 일체 없고 각 폭 그림마다 해당 진경(眞景)의 명칭이 역시 묵서(墨書)되어 있는데 단원 글씨는 아니라 한다. 또한, 제목이 되는 이 명칭 곁에 ‘檀園’ ‘弘道’라는 두 방의 방형백문(方形白文) 인장이 폭마다 찍혀 있으나 이 인장은 후낙관(後落款)으로 이 그림을 손상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이동주(李東州)의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나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을 통해 ‘금강사군첩’으로 소개된 60폭으로 이루어진 화첩은 김홍도의 진작(眞作)이 아닌 임모작(臨模作 :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린 작품)으로 판단된다. [Daum백과]

하지만 <금강전도>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원 특유의 산수기법을 도처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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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44세 때인 1788년 가을 정조의 어명으로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다닌 금강산및 관동 8경을 기행하며 사생한 작품이다.

금강산은 최고의 명승지로 그 아름다움에 정조도 선비들이 즐겨가는 뻬어난 관동 8경이나 금강산 얼마나 구경을 하고 싶었으면, 국정을 놓고 갈 수 없기에 그림으로나마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김홍도에게 김응환과 함께 관동 8경의 海山 승경을 그려오게 명하면서 이 두사람이 다녀가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필요한 물자의 부족함이 없도록 지시를 하였다. 그래서 홍도는 가는곳마다 관리의 대접을 받았다 한다.

조선 화가 신윤복, 장승법보다 김홍도는 왕실과도 가까은 조산의 마이스터 (거장)이었다.아뿔사,,, 왕도 궁궐내에서 제한적인 삶이라..낮이면 당파에 휘말리고, 밤이면 상궁들의 경쟁에 쌍코피가 터지는,, 때로는 매밀 반복되는 일상을 접고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시원한 밖의 세계가 얼마나 그리웠슬까??

세조는 상왕으로 당뇨를 치유하기 위해 오대산에 또한 주문진등 동해안을 돌며 소리꾼 경연도 했다는 기록으로세조가 궁에서 가장 먼 나들이를 했으며, 두번째로 세종도 당뇨에 의해 눈이 멀어지자 수안보를 행차함에도 과학은 묻어있다. 당시 다코메다로 150리라는 현대의 치수와 동일한 다코메다의 기원을,,,이 기록들이 임금이 궁을 가장 멀리 벗어난 기록이리라.

김홍도는 여행에서 그린 草本에 의거해 채색황권본과 화첩본의 두가지를 정조에게 진상하였다. 단원은 왕명을 받들어 70폭 그림을 그려 바치게 되고 정조는 이를 5권의 화첩으로 만들어 왕실 內部에 비장합니다

김홍도는 철원, 회양을 거쳐 단발령을 넘는 내금강으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관동팔경까지도 여행에 포함하여 힘든 산을 넘으면서도 당시 관동팔경을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김홍도는 한양을 떠나 양근(현 양평), 지평, 구둔 , 원주의 현재의 기찻길로 강원도 가는 길로 접어들었고 원주를 지나 안흥에서 문재와 전재를 지난 평창군 방림, 대화를 거쳐 모릿재를 넘어 진부 수항이 계곡으로 이어지는 옛 강릉으로 가는 구길로 지나며 수항계곡을 따라 청심대를 지나 월정사, 중대, 사고(史庫). 상원사. 대관령 굽이를 내려가며 보는 강릉과 경포호를 단원은 특유의 산수기법으로 진경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들이 위에서 말하는 이동주(李東州)의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나 1995년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의 그림들이 임모작(臨模作)이라고 역사가 최완수씨는 밝히고 있지만 강세황씨의 한국적 진경산수화는 제자 김홍도에 의해서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되었다.

김홍도의 화풍은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의 새로운 양식으로 등장하게 됨을 이 그림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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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옛 사진들>


1929년 조선사찰 31본산사진첩((朝鮮寺刹)三十一本山 寫眞帖)


1932 조선고적도보에 월정사

( 이 사진은 일본인 건축 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처음으로 우리 역사를 조사하며 남긴 사진으로 세키노 다다시는 1915년도에 월정사까지 답사후 금강산까지 답사루트를 탔기에 이 사진은 1915년 세키노 다다시의 사진기사 사와이치씨의 유리건판 사진으로 1932년도 발행 <조선 고적보도>에 게제됨.

월정사 옛 칠불보전

이 사진에 한 사람이 있는것은 물체의 척도를 알리는 것으로 다다시의 사진에는 대부분이 사람을 넣고 찍었다.

조선시대에 월정사 대웅전은 칠불보전이었으나 6,25때 전소되었다.

인천상륙후 인천시내의 "해광사"라는 절이 그동안 인민군 아지트가 되었었다 한다.여기에 연유하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공군 개입후 후퇴를 거듭하며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청야라는 방어전술에 의하여 산속의 사찰들의 소각을 명령하였다

당시 오대산은 49년에 강동정치학원출신의 이호재의 제1병단의 빨치산 (조선 인민 유격대)가 잠입하여인민군들의 남하를 도와주고 있던터라 워커장군과 김백일 1군단장의 월정사 소각명령이 내려지지만 군인들은 이에 불응하였고 당시 월정사 부근의 민간인들이 당우 22채 전부 소각시킨다.

방어전술의 청야란 개념은 후퇴시 적이 아군물자를 이용못하도록 전부 파기시키는 전술로 과거 2차대전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이 소련을 침입하자 소련은 독일군 반경 60km내의 모든 민간인을 철수시키고..철수가 아니라 추운 한파속에 밖으로 내몰리고 모든 집들은 불태워 식수나 모든 물자의 이용을 못하게 하였다.

전쟁은 방법론이 아니라 결과이기에 승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도 자행되었고, 또한 당시 월정사 아래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260여호의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월정사의의 관대거리에는 일제강점기시 "계림"이라는 벌목회사가 있었고 산판의 벌목, 목도 인부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당시 목재는 목기용으로 소나무보다 비싼 박달나무가 최고급이고 또한 오대천을 따라서 해발 1,000여m의산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이곳의 소나무 산지가 정선 아우라지보다도 몇배 더 많은편으로 오대천에 보메기 방법으로 떠내려보내 조양강과 만나는 곳에서 뗏목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정선 어라리에 진용선의 "산과 뗏목"이란 책에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러한 보메기 설명이나 벌목의 최대 산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실기하고 있다.

이 벌목공들이 인민군 총구앞에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부역을 한다면, 그리고 국군에 의해 부역자로 오명을 쓰면전시에는 재판도 없이 총살형이었기에, 그들은 살기위해 월정사를 전소한 듯 하다

이렇게 칠불보전은 불타 없어지고 해방후 탄허스님은 중창을하며 주지승인 장만허스님은 벌목했다는 사실로 경찰서에 불리어가고 벌목꾼들의 점심으론 감자를 싸 주엇더니 쉰밥이 되어 먹지를 못하는 불만속에 다시금 중창되며 탄허스님은 본 법당을 적광전이라 명하고 헌액을 걸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요하는것은 비 정상적인 논리이다. 물론 빨갱이들이 승리하면 산수갑산도 내것이 아닐테지만.사찰을 전부 전소시킨다고 빨갱이들 부역자가 아니될까..또한 유서깊은 본 찰은 조계종 31고구 종찰이였고 당시 중요한 문화재등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이 모두 불태운 것이다.

상원사도 불태우려하니 좌선한 방한암 스님은 나도 절간의 귀속체이오니 함께 불태우라는 호령에 선우 휘 중대장(조선일보 논설고문)은 아이디어를 짜내어 문짝만 뜯어다가 마당에 놓고 불사르고 전소하였다고 보고했다는 일화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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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淸野) 전법은 위에 설명처럼 방어전술의 청야란 개념은 후퇴시 적이 아군물자를 이용못하도록 전부 파기시키는 전술로 필자는 아직 미공개 서술중인 평창임진왜란사의 잉원도 임란사를 중심으로하는 연구와 각 오류들을 점검하는 글에서 평창의 군, 관민은 왜군 4번대의 큰 병력수에 중과부적이라 후일을 도모하고 응암굴로 피란가는데, 이러한 작전도 청야전술에 일환이기에 임진왜란시 평창의 응전은 청야전술이란 면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후 월정사 전경사진

1950년 12월 20일 전후쯤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이 밀리면서 워커장군 사망시 이전쯤 소각된듯 합니다. 모든것이 소각되고도 팔각구층석탑만 앙상히 남았는데...

현 우리나라 국보 403개중에 가장 만은 분야는 석탑으로 28개의 국보가 있는데..정말 국보로서의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월정사 경내 - 고유섭의 <구수한큰맛>이란 책에서 전경사진

고유섭은 일제 강점기시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우리나라에선 첫번째로 누두화 기록도 남깁니다. 그리고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술사의 개척자로 세끼노 다다시의 "조선 고적보도"도 올바르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미의 특징을 "무 기교의 기교" "무 계획의 계획" 그리고 "구수한 큰맛"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선생의 많은 논문중 "조선 탑파의 연구" 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은 다다시의 사진보다 입자 망이 굵고 선명도가 떨어지는사진기인듯 합니다.

또 하나 팔각구층석탑의 첫번째 옥개석 상단에 문제가 있고 두번째 옥개석 좌츨은 부서졌는데 지금은 완전한 모양새의 옥개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월정사 경내 담 뒤편에 약 5개의 부서진 탑 부재가 있는데. 언제 개수하였는지 그 시기가 알 수 없습니다.

가령 '70년도에 동탑의 보수공사시에는 감독관 단국대 정영호 교수와 실측관으로 후일 부여 박물관장 역의 홍사준의 보고서가 있는데 이를 개수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대산 고지도(1872년-고종9년)
사진에 중앙엔 상원사, 그 아래엔 월정사. 그리고 남대 서대등 오대산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듯이 그렸습니다.

눈으로 여행이지만 여행은 재미있습니다.

다음번엔 遊山記속에 나오는 평창엔 1700년당시 다리가 두개 있었다 합니다.

다음에도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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