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만드는] 평창군 연표

- 연표에 수록되었으면 하는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전형민 승인 2021.08.28 15:45 | 최종 수정 2021.09.30 18:04 의견 0

평창역사연표
시대 일자 평창 강원 전국
구석기시대 기화리 쌍굴유적 : 기화리 쌍굴유적은 동굴 뼈 화석과 구석기의 뗀석기가 같이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이다.(연세대학교박물관팀, 2007년 11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발굴)
평창읍 도돈리 평창강 북쪽 언덕에서 찍게 찌르게 긁게 발견 (문화유적분포지도-평창군, 2004)
신석기시대 평창읍 유동리, 주진리, 빗살무늬토기 출토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87, ☞ 관련기사
용항리. 다수리와 천동리 일대 수혈유구, 야외 노, 토기류 발견 (주) 예백 문화재 연구원. 2010. ☞ 관련기사
후평리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편이 출토되는 야외 노 발견 『평창,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후평리 유적』2013,☞ 관련기사
청동기시대 기반식 고인돌군 평창군 내 다수 존재-상리,종부리, 계장리, 후평리, 임하리 등, ☞ 관련기사
하리 청동기 유적 - 최근 평창읍 하리 240-4번지의 신축건물 부지내의 유적은 고조선식의 청동검과 인골이 반출된 지석묘, ☞ 관련기사
천동리 220번지 주택신축부지:청동기 주거지 1동과 철기 주거지 1동 조사.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이중구연과 단사선문과 공열문 토기와 구순각목문토기, 적색마연토기등의 토기류와 석촉, 석부, 방추차 등의 석기류등이 출토되었다. 「평창 천동리 220번지 주택 신축부지애 유적발굴 조사 보고서」, (2011) ☞ 관련기사
천동리. 마지리 유적 : 청동기 시대 주거지 16동, 주구묘와 석관묘 각 1기의 유구 「평창 천동리 마지리 취락」(2012),☞ 관련기사
약수리, 종부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9동과 주구묘 1기, 수혈유구, 야외 노등이 조사되었다. 「평창 약수리 유적 」(2013). 「평창 종부리 유적 」(2013) ,☞ 관련기사
임하리 선돌,☞ 관련기사
철 기 시 대

방림농공단지 예정지에서 철자형 주거지 2동과 방형 주거지 1동,. 원형유구 7기이 조사되었다.(2009),

국도31호선 영월-방림노선 공사예정지에서 주거지 1동과 작업대로 추정되는 석조유구 1기, 원형유구 3기 등이 발견되었다(2015) ☞ 관련기사

천동리 주거지 1동 발견「평창 천동리 220번지 주택 신축부지애 유적발굴 조사 보고서」(2011)☞ 관련기사
고구려

우수주(牛首州:춘천)의 주군현성 : 우오현[于烏縣: 욱오(郁烏)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제 37 』 잡지 제 6, 지리, 4

하슬라주의 주군현성 : 동토현(東吐縣:지금의 평창군용평면 일대로 비정한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四 고구려(高句麗)』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인데, 우오현(于烏縣)이라고 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삼국시대 교주도(交州道)는 본래 맥(貊)의 땅으로 뒤에 고구려가 차지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권 12】
그 후 두타(頭陁) 신의(信義)는 곧 범일(梵日)의 문인이었던 사람인데 와서 자장법사(590-658)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서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또한 오래도록 폐하였더니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암자를]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이것이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647

정신대왕(淨神大王) 태자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형제가 하서부(河西府)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더니, 문득 하루 저녁은 형제 두 사람이 속세를 떠날 뜻을 은밀히 약속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다. 시위하던 자들이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여 이에 나라로 돌아갔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보천 태자는 [오대산] 중대(中臺) 남쪽 아래 진여원(眞如院)터 아랫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곳을 보고 그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형제 두 사람이 예배하고 염불을 수행하고 오대(五臺)에 나아가 공경하여 예배하였다.『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705.03.08.

효명태자는 왕위에 올랐다. 재위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 비로소 진여원을 세웠다.

보질도태자는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수도하고 다시 오대산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 수도하였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통일신라 경덕왕

속제현 [梀隄縣 :한편 동제현(棟隄縣)이라고 쓴다:지금의 용평면 속사리로 비정한다]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속토현(束吐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二 신라(新羅))』

이름을 백오(白烏)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이 되었다.【고려사지리지 권10】

신라에서는 백오(白烏)로 고쳐서 내성(柰城)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선덕왕

[강릉] 신라 선덕왕 때에 소경(小京)으로 삼고 사신(仕臣)을 두었다.『고려사 지리지 권12』 동계. 명주.연혁)
891.10. 양길이 궁예를 비장으로 삼아 주천 내성 등의 군현을 점령하였다. 명주관내의 주천, 내성, 울오(鬱烏), 어진 등 10개군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동사강목)
고려 고려에 이르러 지금 이름(평창현)으로 바꾸고 원주에 내속하였다. (고려사지리지 권10)고려에서는 평창현으로 고쳐서 원주(原州) 임내로 하였다가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1156

[후에] 일관이 터를 구하러 이곳에 와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안치할 곳이 아닌데 어째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오대산문수석탑기

1217.07.05

최원세(崔元世)와 김취려(金就礪)가 거란군을 충주(忠州)와 원주(原州) 두 주(州) 사이로 추격하여 맥곡(麥谷)에서 싸우고, 박달현(朴達峴)까지 추격하여 대패시켰으므로 적들이 대관령(大關嶺)을 넘어서 달아났다. 『고려사 > 권22 』 세가 권제22 , 고종(高宗) 4년 7월

1290 충렬왕 16년(1290)에 영월·평창을 다시 (동계에) 내속(來屬)시켰다. 『고려사지리지 권12』동계
1299 충렬왕 25년 기해에 비로소 현령을 두었다.『세종실록 지리지 153권』 충령왕 25년 현령을 두었다.『고려사지리지 권10』
1304.11 11월에 원 나라에서 환관 이숙(李淑)을 보내 왔다. 숙은 곧 복수(福壽)인데, 본래 평창군(平昌郡)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태백산(太白山)의 무당이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황제에게 일을 아뢰어 청했을 때, 숙이 일찍이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왕이 특별히 그를 후대하였다. 『고려절요』
1310.9 이숙(李淑)을 평창군(平昌君)으로 삼았다. 『고려절요』 제23권, 충선왕
1364.1

평창현령(平昌縣令) 배 중련(裵仲連)의 가산을 적몰(籍沒)하였다.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불법을 저지른 때문이었다. 『동사강목』 제15상

1383.06 교주·강릉도의 화척과 재인들이 왜적을 사칭해 약탈을 일삼다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화척(禾尺)·재인(才人) 등이 왜구를 사칭하여 평창(平昌)·원주(原州)·영주(榮州)·순흥(順興)·횡천(橫川) 등지를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體察使) 최공철(崔公哲)이 50여 인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처자는 주군(州郡)에 나누어 배치하였다.『고려사 열전 권48』
1383.07 최공철이 방림역에서 왜구를 물리치다. 교주강릉도체찰사(交州江陵道都體察使) 최공철(崔公哲)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구를 만나 8급(級)을 베었고, 무기와 말 59필을 빼앗았다.『고려사 열전 권48』 우왕 9년
1387

홍무(洪武) 20년 정묘에 본토 사람인 환관(宦官) 이신(李信)이 총애를 얻었음으로 지군사로 승격하였으나, 뒤에 현령으로 강등되다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지리지/강원도/강릉대도호부/평창』

1388

우왕 14년(1388)에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아울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고 충주(忠州)가 관할하던 평창군(平昌郡)을 내속(來屬)시켰다.『고려사지리지 권12』

조선 1392 태조 원년 임신에 목왕(穆王) 효비(孝妃)의 내향이라 하여 다시 지군사로 승격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 153권』
1395.11.24 한산군 이색이 오대산(五臺山)에서 돌아왔다. 당초에 색(穡)이 외방으로 버림을 받았다가 종편(從便)하라는 은총을 입어 관동 지방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에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부르니, 색이 왔다. 임금이 친구의 예로 접대하고 조용하게 담화를 하고 술을 마시고 즐겼다. 나갈 때에는 중문까지 나가서 보냈다.『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397.12.3

임금이 명하여 강릉도(江陵道) 쌀 6백 석을 대산(臺山)·금강산(金剛山)의 여러 절에 시사(施舍)하게 하였다.『태조실록 12권; 태종 6년』

1398.1.21

인왕사 내원당에 거둥하다. 당주 조생이 오대산에서 오다 『태조실록 7년』

1398.8.17

천변지괴 때문에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 표훈사에 법석을 베풀다『태조실록』 태조 7년

1400.10.24

태상왕이 정릉에 이르러 정근 법석을 베풀다. 오대산ㆍ낙산사 행차계획을 아무도 모르다『정종실록 정종2년』

1400.10.26

중 설오를 보내어 태상왕의 환가를 청하였으나 끝내 오대산으로 행차하다『정종실록 정종 2년』

1400.11.13

태상왕이 오대산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각사 1원씩 거느리고 장단의 마천에 가서 맞이하다『정종실록 정종 2년』

1401.10.2

수륙재(水陸齋)를 대산(臺山)의 상원사(上元寺)에 베풀었으니, 천재(天災)를 없애기 위하여 빈 것이었다.『태종실록 태종 1년』

1404.10.22

삼성의 관리인 정역·조휴·윤수·안성·윤향 등을 유배시키다. 탁신(卓愼)은 평창(平昌)에 귀양보냈다『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405.2.3

경상도 계림·안동, 강원도 강릉·평창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제사를 지내다『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1407.5.27

큰비가 내려 도성안의 개천이 모두 넘치다. 평창은 민가 30여 채 표몰『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1409.4.12

안악(安岳)·풍주(豐州)·신주(信州)와 강원도 평창(平昌)에는 우박이 내렸다.『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1411.5.10 강원도(江原道) 평창(平昌)·정선(旌善) 등지에 우박이 내려 삼[麻]과 보리[麥]을 상하게 하였다『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1412.5.14 원주(原州)·정선(旌善)·평창(平昌)·영월(寧越) 등의 고을에 큰 물이 화곡(禾穀)을 상하였다.『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1414.2.6

이관(李灌)에게 명하여 전지(傳旨)하였다. “관음굴(觀音窟)ㆍ진관사(津寬寺)ㆍ대산(臺山) 상원사(上元寺)ㆍ거제(巨濟) 견암사(見庵寺)에 매년 2월 15일에 수륙재(水陸齋)를 행하였는데, 금후로는 정월 15일에 행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으라.” 『태종실록』 태종14년

1415. 2. 3. 평창, 대화, 방림, 진부 등지에 사렵을 금지시켜 강무할 장소로 정하다.
1415.8.20 강무를 대비해 조세를 본고을에 축적하라고 명하다. 『태종실록 30권; 태종 12년』
1415.9.29 강릉(江陵) 대화역(大和驛) 서쪽 들에 머무르고, 대가를 따르는 대소 인원에게 5일 동안의 인마(人馬)의 요속(料粟)을 주었다.『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421.2.25

상왕이 강원도 진부 등으로 강무하러 갈 채비를 하게 하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421.3.2

인부 2천 명을 동원하여 눌두산(訥豆山)에서 짐승을 몰이하고, 저녁에 행차가 대화역(大和驛)의 들에 머물렀다. 서울에 있는 여러 신하가 참찬 변계량을 보내어 문안하고, 술과 과일을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닷새에 한 번씩 문안하라 했는데, 어찌하여 이레나 되어서 오느냐." 하니, 계량이 대답하기를, "좌의정 박은(朴訔)이 늦지 않을 줄로 생각하고 지난달 29일에 술을 봉하여 신에게 주었기 때문에, 늦게 오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왕이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술을 내리고, 사슴 2마리를 주면서 말하기를, "뒤에 문안하러 오는 자는 비록 길에서 만나더라도 네가 데리고 서울로 돌아가라." 하였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421.3.3

구단산(仇段山)에서 몰이하였다. 상왕이 사슴을 많이 쏘았는데, 사슴 두 마리가 달아나다가 상왕의 말에 부딪쳐, 말이 무릎을 꿇어서 떨어졌다. 저녁에 대화역(大和驛)의 들에 돌아와서 시종한 각급 신하와 군사에게 급료를 나누어 주었다.『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421.3.4

행차가 모로현(毛老峴)을 넘어 진부역(珍富驛)의 미면촌(未𥸴村)에 이르렀다. 함길도 감사가 사람을 보내어 방물(方物)과 매를 상왕에게 올렸다.『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421.3.6

행차가 진부에 머물렀다. 송동산(松洞山)에서 몰이를 하는데, 상왕은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아니하여, 활과 화살을 휴대하지 아니하고, 다만 개를 놓아 짐승을 잡는 것만 구경하였다..『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421.3.7 행차를 〈서울로〉 돌렸다. 모로현을 넘어 대화(大和)의 옛 현(縣) 자리에 머물렀다. 잡은 짐승을 의정부와 육조에 나누어 주고, 인하여 술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422.12.28. 관찰사의 건의로 강원도 평창 등지에 기르던 국마를 충청도로 옮기고, 지난 해에 바치지 않은 공물을 면제해 주다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424.4.28.

예조에서 계하기를,“강원도 강릉 상원사(上院寺)는 원래 수륙사(水陸社)이었으니, 혁제(革除)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제〉 교종(敎宗)을 고쳐서 전라도 전주 경복사(景福寺)를 상원사에 붙이고, 원속전(元屬田)은 1백 40결인데, 60결을 더 주고, 항거승(恒居僧)은 1백명으로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6년

1425.12.19

강원도의 수륙사(水陸社)인 상원사(上元寺)가 화재를 당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이 절의 수륙재(水陸齋)는 고려 왕씨(王氏)를 위한 것이다. 또 경상도에 현암(見庵)이 있었는데, 이 절도 이미 화재를 입었으니 혁파(革罷)하라.”하였다. 『세종실록』세종 7년

1426.11.3. 형조에서 "평창(平昌)의 죄수 대고지(代古之)는 싸우다가 사람을 때려 죽였사오니, 율에 의하여 교형(絞刑)에 처할 것을 계하다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426.11.11. 지평창군사(知平昌郡事) 박전(朴箋)과 강릉 판관(江陵判官) 최안선(崔安善) 등이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강원도는 지난해 실농(失農)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많이 유리(流離)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그 고을에 가서 밤낮으로 염려하고 삼가며 농상(農桑)을 권장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소복(蘇復)되게 하여 내 뜻에 부응(副應)하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430.12.8.

호조에서 공법(貢法)에 대해 보고하는 가운데 평창에 관한 논의가 있다.

"(강원도)관찰사 조치(曹致)·도사 윤무(尹務)·원주 판목사(原州判牧使) 전흥(田興)·판관 이수량(李守良)·춘천 부사(春川府使) 이안경(李安敬)·회양 부사(淮陽府使) 이원비(李原備)·간성 군수(杆城郡守) 이사임(李思任)·평해 군사(平海郡事) 김포(金布)·평창 군사(平昌郡事) 김유보(金兪甫) 등은 아뢰기를, ‘땅의 비옥함과 척박함이 각기 다르고, 묵히기도 하고 개간하기도 하는 등 산 위에 화전(火田)의 경작이 몹시 많으므로, 전대로 손실에 따라서 조세를 거두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1442.1.5

의정부에서 호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귀맥(鬼麥)이라는 것이 보리 같으면서 알이 작고 바람과 추위에 견디는 성질이 있으며, 또 메마른 땅에도 잘되며 황무(黃霧)에도 손상됨이 없습니다. 3월에 파종하면 6월에는 수확하게 되어 강원도의 진부(珍富)·대화(大和)와 함길도(咸吉道)의 갑산(甲山) 등지의 백성들이 이것을 잘 길러낸다 합니다. 본부(本府)에서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그 품종의 경작하는 기술과 식물(食物)로 요리하는 방법을 물어 보고, 그 종자 2섬을 바꿔 와서 전농시(典農寺)를 시켜 시험으로 경종(耕種)하게 하였더니, 37석 8두나 소출되었습니다. 이것을 쪄 말려서 방아간에 찧으니 3두에서 4승 5합의 쌀이 났는데, 밥도 되고 떡도 만들 수 있어 백성들 쓰임새에 모두 적절하다 합니다. 청하옵건대, 각도에 종자를 나누어 보내서 경종토록 해서 민중의 이익이 되도록 지도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1443.1.20. 강원도 원주·영월·평창현(平昌縣)에 지진(地震)이 일었다.『세종실록 99권』, 세종 25년
1446.7.21. 강원도의 춘천(春川)과 낭천(狼川)·양구(楊口)·인제(麟蹄)·정선(旌善)·평창(平昌)·원주(原州)·울진(蔚珍)과 경기도의 양주(楊州)·양근(楊根)·지평(砥平)·가평(加平)·포천(抱川)·연천(漣川)·마전(麻田)·적성(積城)에 황충(蝗蟲)이 발생하였다.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1449.2.9

유학(幼學) 최진현(崔進賢)이 상서(上書)하기를, "강릉부(江陵府) 진부현(珍富縣)을 강무장(講武場)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음은 신이 갖추 아옵니다. 예전 우리 태종께서 여기에 거둥하신 것은 놀고 사냥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온데, 뒤에 드디어 강무하는 곳으로 만드옴은 우리 태종의 본의가 아니옵니다. 근래에 길이 험하고 멀어서, 만승(萬乘)023) 으로 가서 순행할 땅이 아니므로, 강무하는 곳을 고쳐서 망패(網牌)를 설치하는 장소로 삼아, 새와 짐승의 해를 없애고, 건두(乾豆)의 자료를 준비하게 하여, 공사(公私)가 편리하게 하려고 하였사오나, 해마다 망패가 내려가면, 여염(閭閻)을 침해하여 개와 닭이 편히 쉬지 못하여, 소란스러운 폐단이 대가(大駕)를 공돈(供頓)하는 비용보다 심하옵니다. 더구나, 대관령 서쪽은 거민(居民)이 적어서, 본래 새·짐승이 성하게 자라는 곳이 되었으니, 비록 날마다 사냥을 계속할지라도 오히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온데, 이제 백성들이 금령(禁令)을 두려워하여 감히 사사로 사냥하지 못하오니, 그곳에 있는 새·짐승들이 천백 마리나 떼를 지어 지나가게 되면, 벼곡식이 그 자리에서 없어져서, 그 해가 수해와 한해보다 심하오니, 그곳 백성들이 떠나고 옮기는 것이 다른 곳보다 갑절 많은 것도 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경작을 금지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산의 돌밭을 경작하므로, 흙이 말라 힘이 없으니, 한번 심은 땅은 두번 심을 수 없습니다. 지금 평원 광야(平原廣野)가 아득히 눈에 가득하나, 노루·사슴의 사는 곳이 되고, 백성들은 갈아 농사짓지 못하오니, 비록 새·짐승의 해가 없을지라도, 백성들이 무엇을 경작해 먹고 붙어 살겠습니까. 일에 경중(輕重)이 있사오니 마땅히 살펴서 행할 것입니다. 만약 국가에서 철원(鐵原)의 강무하는 곳이 건두(乾豆)의 자료에 부족하다면, 진부(珍富) 등처의 소민(小民)들의 해는 족히 헤아릴 것이 못되오나, 그렇지 아니하오면, 이 땅의 백성들만이 태평한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이 가하옵니까.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시는 마음으로써, 어찌 아시면서 고치지 아니하겠사오리까. 반드시 감히 천총(天聰)에 상달(上達)하는 신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은 최치운(崔致雲)의 아들이옵니다. 신의 아비가 성상의 지우(知遇)를 지나치게 받사와, 전하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이 일은 마땅히 파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신이 낮고 천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천위(天威)를 모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채택해 주옵소서."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강무장의 연고로써 영서(嶺西) 인민들이 태반이 흩어져 옮겼는데, 횡성(橫城)·홍천(洪川)·이천(伊川)·평강(平康)에서 더욱 심하였다. 『세종실록 123권; 세종 31년』

1449.3.6.

경기 지역에 동궁이 대행할 강무장을 세울 것을 의논하다

하고, 효전(孝全) 등은 아뢰기를,"삭녕(朔寧)·안협(安峽)·이천(伊川)·김화(金化)·낭천(狼川)·횡성(橫城)·방림(芳林)·진부(珍富)·남곡(嵐谷)·금성(金城)·원주(原州)·춘천(春川)·홍천(洪川)·지평(砥平) 등지는 군사들의 수렵(蒐獵)035) 을 훈련하는 곳으로 삼고, 평강(平康)·철원(鐵原)과 같은 새와 짐승이 번성한 곳은 강무장으로 삼는 것이 가하오나, 군사의 수렵하는 곳으로 삼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449.4.17

사졸의 강무법을 새로이 정하다;·방림(芳林)·진부(珍富)·원주(原州)·지평(砥平) 등처에서 연사(年事)의 풍흉(豐凶)을 물론하고 윤차(輪次)로 사냥하게 하소서." 『세종실록 124권; 세종 31년』

1449.10.6. 평창의 죄수 대산 등을 교형에 처하다. 『세종실록 123권; 세종 31년』
1450.9.19.

화약원료인 염초를 만드는데, 평창은 원주(原州) 임내(任內)의 주천현(酒泉縣)을도회(都會)로 삼아서 정선 평창 영월 원주 횡성 홍천을 소속으로 하여 제조토록 할 것을 의정부에서 아뢰다.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1450.12.29.

평창 군사(平昌郡事) 강일우(姜一遇)는 포대(布帒) 3백 개를 만들어 거향(居鄕)1518) 온양(溫陽)에 보내어 민간에 강제로 판 사실로, 충청도 경차관 박원형이 왕에게 알려 추국하다 『문종실록 5권; 문종 즉위년』

1451.1.25.

장령 나홍서가 "평창군사 강일우가 지은 죄를 모두 자복하였으니 처벌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사면 전의 일이라 하여 처벌치 않았다. 『문종실록 5권; 문종 1년』

1451.3.17

강릉부(江陵府) 대화(大和) 등지의 즙암산(葺巖山)·지두등산(池豆等山)·대덕암산(大德巖山)·구단산(仇短山)·유수산(楡樹山) 등지에는 백성들이 살기가 편하고 노루와 사슴이 적으니, 원유를혁파(革罷)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문종실록 6권; 문종 1년』

1451.11.28.

평창 정선 영월 군인 1,566명으로 강릉읍성을 쌓도록 하겠다는 등의 강원도 감사의 청이 있었다. 『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453.6.9.

의정부에서 각 고을에 군기(軍器)의 액수가 정해지지 않아 폐단이 있다며 각 고을의 군기액수를 정하도록 청하다.

원주 도회소(原州都會所)에서 본주(本州)와 평창(平昌)·횡성(橫城)·홍천(洪川)·영월(寧越) 등 5개 고을이 갑(甲) 3부(部), 주(胄) 3정(頂), 각궁(角弓) 15장(張), 장편전(長片箭)·궁대(弓帒)·나도 통아(羅韜筒兒) 각각 15부(部) 『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1455.9.11

병조에서 각 도의 내지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시행하다.

원주도(原州道)는 그 중익을 원주(原州)·횡성(橫城)으로 하고, 좌익은 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으로 하며, 우익은 춘천(春川)·양구(楊口)·홍천(洪川)·인제(麟蹄)·낭천(狼川)으로 합니다..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459.5.14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종 상좌(上佐)가 고발하기를, "강원도(江原道)의 평창(平昌) 사람 이위(李爲)가 말하기를, ‘고을 사람 전 교유(敎諭) 유득량(劉得良)이 사현(沙峴)의 북쪽에 풍악원(豐樂院)을 지어 문기(文記)를 만들고, 이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노산군(魯山君) 등의 반당(伴儻)과 장차 난리를 꾀하려고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이위(李爲)와 그 종형(從兄)인 이금목(李金牧)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게 하고, 진무(鎭撫) 이유의(李由義)로 하여금 영월(寧越)과 평창(平昌) 등지에 가서 유득량(劉得良)과 반당(伴戃) 70여 명을 잡아 가두도록 하였다. 『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

1460.11.9

하삼도에서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에 이주하는 사람에게 혜택을 주다.

강원도의 원주(原州)·강릉(江陵)·삼척(三陟)·양양(襄陽)·평해(平海)·통천(通川)·정선(旌善)·간성(杆城)·영월(寧越)·평창(平昌)·고성(高城)·울진(蔚珍)·흡곡(歙谷)·안협(安峽) 등의 고을에 옮겨 사는 사람은 12년을 복호(復戶:호역을 면제하는 것) 하고 9년을 면세(免稅)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462.8.5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다.보안역(保安驛)·인람역(仁嵐驛)·부창역(富昌驛)·안보역(安保驛)·원창역(原昌驛)·연봉역(連峯驛)·천감역(泉甘驛)·창봉역(蒼峯驛)·갈풍역(葛豐驛)·오원역(烏原驛)·안흥역(安興驛)·유원역(由原驛)·단구역(丹丘驛)·안창역(安昌驛)·신림역(神林驛)·신흥역(新興驛)·양연역(楊淵驛)·연평역(延平驛)·약수역(藥水驛)·평안역(平安驛)·벽탄역(碧呑驛)·호선역(好善驛)·여량역(餘糧驛)·운교역(雲交驛)·방림역(方林驛)·대화역(大和驛)·진부역(珍富驛)·횡계역(橫溪驛)·고단역(高丹驛)·임계역(臨溪驛) 이상 30역은 보안도 찰방(保安道察訪)으로 일컫고,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

1462.11.5

상원사에 거둥할 때 관음 보살이 현상(現相)하자 살인ㆍ강도 이외의 죄를 사면하다 『세조실록』 세조 8년

1463.9.27

이보다 앞서 상원사(上院寺)의 중[僧]이 상언(上言)하기를, “소승(小僧)이 관음 보살(觀音菩薩)이 현신(現身)하신 곳에 나아가서 이미 불전(佛殿)을 지었는데, 주된 불상(佛像)이 없습니다. 원컨대 경상도(慶尙道)의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고, 〈그 돈으로〉 불상을 만들어서 안치(安置)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禮曹)에서 이르기를,“불전(佛殿)은 있는데 불상(佛像)이 없을 수가 없으니, 청컨대 호조(戶曹)로 하여금 대납(代納)하는 일을 마련하게 하소서.”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권남(權擥)에게 이르기를, “내가 삼계(三界)를 훤히 내다보고 마땅히 무량 공덕(無量功德)을 이루려 하는데, 어찌 즐겨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어 작은 일을 자질구레하게 하겠는가? 또 상원사(上院寺)는 국가에서 창건한 바가 아니고,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원찰(願刹)이니, 예조에서 아뢰는 것은 매우 잘못이다. 내가 박원형(朴元亨)을 벌주려고 하는데, 어떠하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세조실록』 세조 9년

1465.2.20

중 신미(信眉)가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상원사(上元寺)를 구축(構築)하려 하니,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경상도 관찰사에 치서(馳書)하여 정철(正鐵) 1만 5천 근(斤), 중미(中米) 5백 석을 주고, 또 제용감(濟用監)에 명하여 면포(綿布) 2백 필(匹), 정포(正布) 2백 필을 주게 하고, 내수소(內需所)는 면포(綿布) 3백 필, 정포 3백필을 주게 하였다. 『세조실록 세조 11년』

1466.윤3.17

상원사(上院寺)에 거둥하니, 왕세자(王世子)가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ㆍ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ㆍ물거윤(勿巨尹) 이철(李徹)ㆍ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ㆍ영의정 신숙주(申叔舟)ㆍ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ㆍ좌의정 구치관(具致寬)ㆍ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김수온(金守溫)ㆍ김국광(金國光), 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ㆍ호조 판서 노사신(盧思愼) 등과 더불어 수가(隨駕)하였다. 임금이 행궁(行宮)에 돌아와서 신숙주ㆍ한계희ㆍ노사신에게 명하여 문과 시장(文科試場)에 나아가서 참시(參試)하게 하였다. 『세조실록 세조 12년』

1466.7.12

병조에서 군기를 다시 설정하다.

·평창(平昌) 등지 에는 각기 향각궁(鄕角弓) 17장(張), 마전(磨箭) 9부(部), 통전(筒箭) 8부(部), 장창(長槍) 7자루, 중창(中槍) 10자루, 환도(環刀) 17파(把), 궁현(弓絃) 34개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1467.11.6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여 강릉부(江陵府) 산산 제언(蒜山堤堰)을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에게 내려 주니, 신미는 그때 강릉(江陵)의 대산(臺山) 상원사(上元寺)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세조실록』 세조 13년

1469.2.14

.호조에 전지하기를, “강릉부(江陵府) 산산 제언(蒜山提堰)을 상원사(上元寺)에 주고, 또 잡역(雜役)과 염분세(鹽盆稅)를 면제해 주도록 하라.”하였다. 『예종실록』 예종 1년

1469.2.30

강릉인 선략 장군 남윤문과 생원 김윤신이 상소하니 추국하게 하다 ; 염양사(艶陽寺)와 영서(嶺西)·진부(珍富) 사이에 창고(倉庫)를 많이 설치하였는데, 노적(露積)이 있기까지에 이르렀으니, 생민(生民)들의 피해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469.윤2.25

"찰방(察訪)이 행차(行次)하는 마필(馬匹)의 수를 가려서 들이는데, 진부(珍富) 역리(驛吏)의 장문(狀文)과 단구(丹丘) 역리(驛吏)의 공초(供招)에 의거하여 나를 원주(原州)에 불러와서 꾸짖으며 그 장문(狀文)에 하명(下名)하게 하여서 두 역리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하였으니, 나는 찰방의 아전으로서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장문에 이름을 썼는데, 찰방은 의당 이것을 가지고 계달한 것입니다. 소인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근심과 한탄이 하늘에 차서 머리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예종실록 4권; 예종 1년』

1470.2.30

병조에서 지금의 군액 및 분번할 수와 3도 군정의 감액할 수 등을 기록하여 아뢰다--그 중 평창은 제색군사가 51이다 『성종실록 3권; 성종 1년』

1470.4.6

유점사ㆍ봉선사ㆍ정인사ㆍ낙산사ㆍ상원사의 부역을 감하게 하다 『성종실록』 성종 1년

1471.11.22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장령(掌令) 박숭질(朴崇質)이 아뢰기를, “강원도(江原道)는 인연(人煙)이 드물고 토지가 척박하여 백성이 빈곤하니, 마땅히 먼저 무휼(撫恤)하여야 되는데, 중[僧] 학열(學悅)이 상원사(上元寺)를 창건하면서 사치하고 화려함을 다하여 노역을 허비한 것이 이미 많았고, 제언(堤堰)을 함부로 점거하는가 하면 근방에 사는 백성의 전토를 빼앗아 다 자기의 소유를 삼았습니다. 사채(私債)를 불리며 수령(守令)에게 간청(干請)하여 폐단을 짓는 단서가 많으니 승도(僧道)에 어그러짐이 심하고, 또 낙산사(洛山寺)를 짓는데 대로(大路)가 절에 가깝다 하여 그 길을 옮기어 행인(行人)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니, 청컨대 이 폐단을 물리치고 학열(學悅)을 배척하여 민생을 소생케 하소서.”하다. 『성종실록』 성종 2년

1472.9.15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서근(徐赾)이 와서 아뢰기를, "김순성(金順誠)은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서 한성 서윤(漢城庶尹)에 배명되었다가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뜻에 만족하지 못하여 아내의 병을 칭탁하고, 그 자식을 시켜서 글을 올려 인연(夤緣)으로 계달(啓達)하여 면하려 하니, 청컨대 그 연유를 국문하고 법(法)에 의하여 기한(期限)을 준해서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또 김자정(金自貞)은 우등(優等)으로 천전(遷轉)되었고, 권율(權慄)은 사일(仕日)730) 을 계산하지 않고 승진 제수되었으니, 모두가 미편(未便)합니다. 청컨대 개정(改正)하게 하소서." 하니, 듣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22권』 성종 3년

1472.12.3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허적(許迪)이 와서 아뢰기를, "김순성(金順誠)은 전에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제수하였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법으로 마땅히 6년을 서용(敍用)하지 않아야 하는데, 몇 달을 넘지 아니하고 갑자기 명하여 서용(敍用)하였으니, 뒷날 수령(守令)을 규피(規避)830) 하는 자는 반드시 김순성(金順誠)으로 예(例)를 삼을 것이니, 청컨대 내리신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성종실록 25권』 성종 3년
1476.6.26

하였는데,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중은 굶주림을 면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널리 논밭을 점유(占有)하고 재물[貨利]을 늘리고자 하니, 이는 중의 도리가 아닙니다. 세조조(世祖朝)에 이 제언을 상원사(上元寺)에 속하게 허락하였었는데, 학열 등이 근처의 민전(民田)을 아울러 거두니, 20여 석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빼앗긴 사람의 신소(申訴)로 인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을 추국(推鞫)하게 하였으나, 끝내 결정을 보지 못하였으니, 대간(臺諫)이 아뢴 대로 가납(嘉納)함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성종실록』 성종 7년

1477.1.24

호조(戶曹)에서 양전 순찰사(量田巡察使) 이극증(李克增)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강릉(江陵)의 진부역(珍富驛)·횡계역(橫溪驛)·대화역(大和驛)·임계역(臨溪驛)과, 양양(襄陽)의 오색역(五色驛)과, 인제(麟蹄)의 부림역(富林驛)은 극심하게 잔폐(殘敝)하여 모든 공급(供給)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공수위전(公須位田)139) 을 대로(大路)140) 의 예(例)에 따라 20결(結)을 주어서 회복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75권』 성종 8년

1479.6.7

우부승지(右副承旨) 채수(蔡壽)가 아뢰기를, “신(臣)의 아비가 일찍이 강원도를 맡아 다스렸는데, 신이 뵈오려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상원사(上院寺)와 낙산사(洛山寺)의 사이를 보았더니, 험지(險地)를 넘음이 몇 겹이 되고 서로의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그런데 무릇 재목을 실어나르고 돌을 운반하는 것은 모두 다 거민(居民)을 부리어, 그 백성들이 애써 노력하여 종사(從事)하면서도 감히 수고로움을 고(告)하지 못하니, 학열을 겁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니, .『성종실록』 성종 10년

1480.5.6

호조에 전교하여 산산의 제언을 전대로 상원사에 주라고 하다.『성종실록』 성종 11년

1481.3.9

강원도 관찰사 권윤에게 평창군의 남쪽에서 옥같은 돌을 캐지 못하도록 하서하다 .『성종실록 127권』 성종 12년

1483.6.16

중 학조가 월정사의 행겸을 서울로 불러오기를 청하니 그에 따르다.『성종실록』 성종 14년

1484.12.17

“지금 이후로는 봉선사(奉先寺)ㆍ회암사(檜巖寺)ㆍ용문사(龍門寺)ㆍ정인사(正因寺)ㆍ수종사(水鍾寺)ㆍ개경사(開慶寺)ㆍ상원사(上院寺)ㆍ낙산사(洛山寺), 그리고 정업원(淨業院)ㆍ복세암(福世菴)ㆍ연굴암(演窟菴) 등의 절은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맡아서 검찰(檢察)하게 하라.” 『성종실록』 성종 15년

1491.7.4.

개성부 유수 유순·경기 관찰사 김제신 등에게 하서하여 북정 일정을 통지하다

강원도(江原道)의 원주(原州)·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횡성(橫城)·춘천(春川)·인제(麟蹄)·낭천(狼川)·홍천(洪川)·김화(金化)·이천(伊川)·양구(楊口)·회양(淮陽)·금성(金城)·안협(安峽)·철원(鐵原)·평강(平康)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8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5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였다. .『성종실록 255권』 성종 22년

1492.1.17

전라도 관찰사 허침에게 고 평창현령 이세무의 관을 꺼내어 검사하게 하다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

1492.1.17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강겸이 말하기를, “강원도(江原道)는 인민이 희소한데,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五臺山)에는 사찰(寺刹)이 대단히 많고, 여기에 살고 있는 중의 무리가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니, 만약 이들로 충군한다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하다 『성종실록 273권』 성종 23년

1502.8.12

. 대사헌 김영정(金永貞)이 아뢰기를,“장령 김진석(金晉錫)이 일찍이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는데, 항상 말하기를 ‘강원도는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한데도 월정사(月精寺)ㆍ낙산사(洛山寺)ㆍ유점사(愉岾寺) 등에 1년에 주는 소금이 2백여 석이나 되는데, 백성들에게 운반해 바치게 하여 만약 정한 수량에서 모자라면 백성들의 옷과 갓을 빼앗기까지 하고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하니, 수량을 줄이기를 청합니다. 만약 줄일 수 없다면 중들로 하여금 받아가게 한다면 백성들이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8년

1511.5.1 평창군수 박장원 등을 파직하다.백성 다스림에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도태해야 한다는 논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1515.윤 4.6. 강원도 평창군(平昌郡)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새알만하여 벼와 곡물이 약간 손상되었다. 『중종실록 22권』 중종 10년
1519.10.14 강원도 평창현(平昌縣)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인가가 흔들리고 꿩들이 놀라 울었다.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520.4.3

강원도의 원주(原州)·평창(平昌)·횡성(橫城)에 3일 동안 잇따라 서리가 내렸다. 『중종실록 39권』 중종 15년

1521.3.21 강원도의 원주(原州)·강릉(江陵)·평창(平昌)·횡성(橫城)·홍천(洪川)에 우박이 내렸다.『중종실록 41권』 중종 16년

1522.1.20

원주(原州)·영월(寧越)·평창(平昌)·홍천(洪川)·춘천(春川)에도 역시 눈이 내렸는데 빛깔이 조금 붉었다.『중종실록 43권』 중종 17년

1522.4..3 강원도 원주(原州)·회양(淮陽)·정선(旌善)·평창(平昌)·인제(麟蹄)에 우박이 내렸다. 『중종실록 44권』 중종 17년
1523.5.12

강원도 철원·정선·평창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다 『중종실록 48권』 중종 18년

1523.5.15 헌부에서 "평창 군수(平昌郡守) 신희정(辛熙貞)은 전일 수령으로 있을 때 모두 근신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아울러 체직하기 바랍니다."고 아뢰니 "

신희정의 일은 전 평창 군수가 불법한 일로 파직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반드시 전관(前官)보다 현명한 사람을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수령들이 체직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조가 꼭 주의(注擬)할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그렇게 한 것이니, 보내더라도 어찌 방해롭겠는가?"하였다. 『중종실록 48권』 중종 18년

1525.10.13

이연령 살해죄로 평창현 남의동 부자를 잡아 추문할 것을 지시하다 『중종실록 55권』 중종 20년

1526.3.23

강원도 금화·영월·평창 등지에 눈이 내리다 『중종실록 56권』 중종 21년

1527.5.6 강원도 평창(平昌) 등 다섯 고을에는 3일∼6일까지 우박이 내렸다. 크기는 탄환만하였다.『중종실록 59권』 중종 26년
1529.9.7 강원도(江原道) 평창군(平昌郡)에 지진이 발생했다. 소리는 약한 우레소리 같았고 가옥이 흔들렸다.『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529.11.20 기강관 권예가 아뢰기를 "신이 어사(御史)로서 강원도에 갔을 때 백성들이 신에게 ‘여러 군(君)과 옹주(翁主)들의 집을 지을 재목을 본도(本道)에 배정했는데 원주(原州) 등지에는 본디 재목이 없다. 때문에 배정받은 각 고을에서는 모두 평창(平昌)·정선(旌善)·영월(寧越) 등지로 가서 베어서 하산하게 되니, 노력이 배 이상 들었다. 지금 각 고을에서 그 재목을 강변에다 운반해 놓은 것이 매우 많다.’고 하였습니다"고 아뢰다.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531.8.27

강원도(평창 등)·황해도·충청도의 여러 고을에 지진이 일어나다 『중종실록 71권』 중종 26년

1532.4.12

정선·영월·평창·이천·낭천·인제에 우박이 내리다 『중종실록 73권』 중종 27년

1540.2.19

최근에 들으니, 강원도 강릉(江陵)에 사는 유생과 조곤(朝官) 등이 서울에 왕래할 때에 외람되게 역말을 타고 복물(卜物)도 짐바리로 운반하기 때문에 횡계(橫溪)·진부(珍富)·대화(大和)·방림(芳林)의 각역이 이 때문에 쇠잔해져서 지탱해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므로 본부에서 각별히 공문을 보내 적발하게 했으나 관찰사 정순붕(鄭順朋)이 태만하여 거행하지 않았으니 추고하소서. 『중종실록 92권』 중종 35년

1546.4.24

강원도·전라도·경상도 등지에 우박이 내려 큰 피해를 입다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1546.9.27

평창에서 병을 얻은 이완에게 음식과 의원·약을 보내 구료하게 하다 『명종실록 4권』 명종 1년

1546.10.4

양사가 이완의 배소에 대한 일로 아뢰니 처음 정한 곳으로 보내다 『명종실록 4권』 명종 1년

1546.11.20

강원 감사가 울진에 왜선이 출몰하니 무신을 택차하여 보내 줄 것을 아뢰다- 그 중 " 원주(原州)·평창(平昌)·영월(寧越) 등의 고을에서 한량을 뽑아서 이정검(李貞儉)을 통장(統將)으로 삼아 압령(押領)하여 급히 보"냈다는 언급이 있다.『명종실록 4권』 명종 1년

1547.4.16 강원도 철원(鐵原)·평창(平昌)·평강(平康)에 서리가 내려서 벼곡식[禾穀]에 간혹 동상(凍傷)이 있어서 다시 부종(付種)하였으며 .『명종실록 5권』 명종 2년
1547.윤9.22

강원도 평창·울진·영월·정선 등지에 천둥 소리가 나다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1551.1.18 전교하였다. “지평(砥平) 용문사(龍門寺)와 강릉(江陵) 월정사(月精寺)는 조종조로부터 푯말을 세워 출입을 금지시켰으므로 지금도 예전대로 푯말을 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해에 두어 곳에 푯말을 세운 곳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즉시 예조와 내수사에게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게 했는데, 요즈음 아뢴 상소나 차자에 산과 들에 금지 푯말이 가득 서 있다고 하니, 들은 사람에게 사실을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위에서 금지시켜 고치도록 해야겠다.” 『명종실록』 명종 6년
1554.6.13 사간원이 강원감찰사 임억령의 죄를 고하다"평창(平昌)의 관비(官婢)를 가까이 사랑하여 말태워 따르게 하여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하고 시를 읊는 것만 일삼으니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는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
1557.5.24

헌부가 평창 군수 이유언의 파직을 청하다 『명종실록 22권』 명종 12년

1558.5.10

강원도 평창에 폭풍이 일고 비와 우박이 내리다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

1559.2.17

지평 유승선이 아뢰기를 "--갑인년에 신이 강원도 도사가 되어 왕래할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고기잡이를 금하는 건은, 강릉부(江陵府) 서쪽에 오대산(五臺山)이 있고 산 아래에 내[川]가 있는데, 신이 그 도의 도사로 있을 때 마침 구황의 명을 받고 편복 차림으로 순행하다가 우연히 해가 저물어 월정사에 투숙하였더니, 절 아래 긴 푯말 위에 ‘금렵(禁獵)’이라 쓰여 있기에 신이 이상히 여기고 물어 보니, 야로(野老)들이 ‘이 내는 근처 주민이 이전부터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는데, 중들이 절 안에 비린내가 풍길까 염려하여 이를 금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직접 본 사실입니다. " 『명종실록』 명종 14년

1561.2.17

평창 군수 양사언이 궁핍한 백성의 실상을 상소하다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

2월. 평창군수(平昌郡守) 양사언(楊士彦)이 상소하기를, “본군은 옛날 예맥(濊貊)의 작은 고을입니다. 처음에 목조비(穆祖妃)의 고을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견감하였는데, 이때도 전결이 800결, 민호가 500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갚아야 할 환자곡이 700석, 민호가 40호, 잔혹한 아전이 8, 9명이니, 고을을 없애고 다른 고을에 부속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물(貢物)을 견감하거나 조세를 면제해야지 마냥 빈 그릇만 껴안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하니, 해조로 하여금 적절히 헤아려서 조처할 것을 명하였다. 『국조보감 명종 16년』

1562.4.4 강원도 평창(平昌)·삼척(三陟)·강릉(江陵)·간성(杆城)·고성(高城)에 서풍이 크게 불어 모래와 돌멩이가 날고 수목이 뽑히고 부러졌으며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다. 『명종실록 28권』 명종 17년
1580.5.6

강원 감사가 회양·평창에 서리가 왔다고 보고하다 『선조실록 14권』 선조 13년

1590 유몽인이 관동기행록을 남기다
1596.1.23

관찰사 정구가 강원도 평창과 정선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음을 보고하다 『선조실록 72권』 선조 29년 2월 24일

1596.11.7

상이 이르기를, “조상의 실록(實錄)이 몇 짐인지 모르겠으나, 강화에 두는 것은 미안하니 향산(香山)에 옮겨 두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향산의 상원사(上元寺)는 지세가 매우 높아서 쇠사다리로 기어올라야 통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596.12.8

강변을 수비하는 일에 대하여 비변사가 아뢰다; "경상좌도의 안동(安東)·영천(榮川)을 거쳐 영월(寧越)·평창(平昌)에 이르는 한 길"로 왜적이 올수 있다. 『선조실록 83권』 선조 29년

1597.10.13 평창 현령(平昌縣令) 백유항(白惟恒)은 왜적이 경내에 들어올 때 최후에 피신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었는데 가까스로 도망해서 지금은 도내(道內)에 있습니다."『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604.1.7

헌부가 평창 군수의 체차와 강릉 부사를 유임시키지 말 것을 건의하다.""평창(平昌)은 산골짜기의 매우 잔폐(殘弊)한 고을로서 백성이 30호도 못되므로 소생하도록 하려면 현저하게 근간(勤幹)한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새 군수 강봉수(姜鳳壽)는 나이가 늙고 성품도 어리석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선조실록 170권』 선조 37년

1604.1.18 김호(金浩)를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삼다. 『선조실록 170권』 선조 37년
1605.7.1 ·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인제(麟蹄) 등의 재해가 더욱 혹심하였다. 산사태가 나고 죽은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관청과 민가가 거의 떠내려가고 깊은 산의 큰 나무들도 뿌리째 뽑혀 한강과 낙동강으로 떠내려왔다.『선조수정실록 39권』 선조 38년
1605.7.23

강원도 영서(嶺西)의 영월(寧越)·정선(旌善)·춘천(春川)·평창(平昌)·인제(麟蹄)·원주(原州)·횡성(橫城) 등 고을에 이번 7월 17일부터 동풍(東風)이 매일같이 크게 불더니, 바다의 갈매기떼가 까맣게 날아왔는데, 보기에 매우 놀랍고 괴이하였다. 20일 밤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더니 갑자기 큰 홍수가 져 객사와 관청, 군기(軍器)·창곡(倉穀)을 휩쓸어 버렸고, 크게는 사찰과 작게는 촌락이 물이 지나친 곳은 모조리 쓸려나갔으며 우마(牛馬)와 가재 도구도 남김없이 모두 익사하거나 떠내려 갔다. 『선조실록 189권』 선조 38년

1605.8.1 평창 군수(平昌郡守) 김호(金浩)의 첩정에는 ‘이달 20일 큰비가 억수 같이 퍼붓고 동북풍이 거세게 불어 물가의 민가 10여 채가 전부 떠내려 갔고 올곡식과 늦곡식이 모두 손상되어 추수할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변이가 비상하다.’ 했다.『선조실록 190권』 선조 38년
1605.10.8

강원 감사 윤수민(尹壽民)이 치계하였다. “실록(實錄)을 봉안할 곳의 지세를 살피는 일로 건각 차사원(建閣差使員) 정선 군수(旌善郡守) 이여기(李汝機)를 거느리고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간심(看審)하였는데, 금년 수재에 이 산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어 곳곳이 무너져 내렸으므로 평탄한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상원사(上院寺)가 동구(洞口)부터 30리에 위치하였는데 지세도 평탄하고 집이 정결하므로 임시 봉안하기에는 아마 편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막중한 선왕의 실록을 사찰(寺刹)에 소장하는 것이 또한 미안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요량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38년

1606.4.28 강화의 사각(史閣)은 작년에 이미 수축했고, 태백산(太白山)ㆍ오대산(五臺山)ㆍ묘향산(妙香山) 등처의 사각도 거의 공사가 끝나가고 있다고 들은 듯합니다. 『선조실록』 선조 39년
1606.5.7 실록청이 아뢰기를, “《실록》은 지금 봉심하고 분류하였습니다. 구건(舊件)은 그대로 강화(江華)에 보관하고 새로 인출한 3건은 춘추관(春秋館) 및 평안도 묘향산(妙香山)과 경상도 태백산(太白山)에 나누어 보관하고, 방본(傍本) 1건은 바로 초본(草本)인데 지금 보관할 만한 지고(地庫)가 없으나 그냥 버리기가 아까우니,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길일을 이미 가렸으니, 당상과 낭청을 속히 나누어 보내 장마 전에 봉안해야 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9년
1606.8.16 조공근(趙公瑾)을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삼았다. 『선조실록 202권』 선조 39년
1617.2.14

동부승지 이홍주가 보고하다. "열읍(列邑)들 중에 평창군(平昌郡)이 더욱 심하게 잔폐되었습니다. 군의 경내는 모두 큰 산과 깊은 골짜기로 온 종일 길을 가도 인적을 볼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영서 지방의 궁벽한 곳입니다. 그 고을 백성 10여 명이 길을 막고 하소연하기를 ‘본군은 평상시에도 꼴이 말이 아닌데, 난리를 겪은 뒤로는 온 경내가 텅 비어서, 전결이 겨우 60여 결이고, 백성이 17호 밖에 안된다. 그런데 근래에 여러 도감의 별복정(別卜定)0이 전후로 잇달아 있어서 몇 안 되는 잔약한 백성이 형세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답답한 정상을 성상께 진달해 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산골짜기 백성들의 정상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12권』 광해 9년

1617.7.27

전교하였다. “구 유격(丘遊擊)의 표문(表文) 안에 오대산(五臺山)에서 약초 캐기를 요청하였다. 〈이 글을〉 해조로 하여금 속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광해군일기 』 광해 9년

1617.8.2

의주 부윤의 서장(書狀)으로 인하여 전교하였다. “이번에 오는 차관은 저들의 재촉을 받고 곧바로 오대산(五臺山)으로 갈 염려가 없지 않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상의해서 미리 한 통의 자문을 만들어 진강(鎭江)으로 보내 뜻밖에 발생할 지도 모르는 걱정이 없게 할 〈일을 살펴서 하라.〉 ” 『광해군일기 』 광해 9년

1617.10.17 평창 부수(平昌副守) 이만수(李萬壽)는 정철 4백 근을 바친다고 하여 도정을 제수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20권』 광해 9년
1617.11.25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의정부에서 논의하다. -- 평창도정(平昌都正) 이만수(李萬壽)는 의논드리기를, "국가에 불행이 닥쳐 전에 없던 큰 변고를 만났으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어느 누가 마음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 유생들의 많은 상소가 일제히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유생들의 상소 중에는 옛일을 낱낱이 들어서 제시한 것이 많다고 하는데 고사(古史)를 상고해서 거행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21권』 광해 9년

1618.4.11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산골짜기의 잔약한 백성들로서는 형세상 감당해내기가 정말 어려우니 각사(各司)의 공물을 앞으로 3, 4년 동안만이라도 예전처럼 견감해 주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처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양구(楊口)·평창(平昌) 등 고을도 피폐된 정도가 심하니 모두 똑같이 시행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26권』 광해 10년
1620.10.7

단양·청풍·평창 등 14개 읍의 조세 실수를 책으로 작성할 것을 명하다; 전세 등을 목재로 납입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 『광해군일기 중초본 127권』 광해 12년

1625

?

이여경(李汝敬) 평창 군수(平昌郡守)에 제수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자 고을 백성들이 차류(借留)를 청원하니, 1년을 더 있도록 허락하였다. 『동춘당집』 제18권 묘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공(李公) 묘표'

1628.9.14 원주(原州)·회양(淮陽)·철원(鐵原)·평창(平昌)·홍천(洪川)·양구(楊口) 등 읍에 이른 서리가 내렸다.『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
1629.7.21

종부시가 선원록을 오대산ㆍ태백산에 나누어 보관하는 일로 아뢰다. 『인조실록』 인조 7년

1629.9.29

《선원록(璿源錄)》을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7년

1630.2.25

강원도 영월(寧越) 사람 엄여겸(嚴汝謙)이 상소하기를, "본군은 평창(平昌) 및 정선(旌善)과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인구가 적고 잔약한 상태가 평창이나 정선 두 고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고을의 공부(貢賦)는 10년 기한으로 전액을 탕감해 준 반면 본군은 부역이 옛날과 똑같으니, 두 고을의 예대로 햇수를 정해 견감해 주소서." 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조실록 12권』 인조 8년

1639.6.5

주강을 마치고 검토관 허적이 전 영춘 현감 박해의 죄상을 계하다. 영춘을 평창군으로 정배하였다. 『인조실록 38권』 인조 17년

1640.7.17

평창 군수 심지한을 태인현감 때의 일로 체차하다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1644.11.2 평창 군수(平昌郡守) 김정립(金正立)에게 표리 1습을 하사하였으니, 이는 강원도 어사 김시번(金始蕃)의 계(啓)에 따른 것이다. 『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1646.6.26

강원도 평창(平昌)·홍천(洪川)·춘천(春川)·양구(楊口) 등지에 큰물이 졌다.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1648.윤 3.1 강원도 통천(通川)·평창(平昌) 등 고을에 큰눈이 내렸다.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1648.7.19 처음 예조가 사관(史官) 홍우원(洪宇遠)을 태백산(太白山)과 오대산(五臺山) 두 사각(史閣)에 보내어 왕세손 책봉시의 복색에 대해 조사하여 오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전거할 만한 글을 얻지 못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26년
1649.2.3 신이 보건대, 내국(內局)에서 어공(御供)에 쓰는 약삼(藥蔘)은 반드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는 것이라야 좋다고 하는데, 근래 이웃 지경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일찍 들어와 미리 캐므로 법대로 깨끗이 말려도 그 품질이 좋지 않으며, 또 화전(火田)이 늘어난 뒤로는 갖가지 약초가 모두 귀해졌습니다. 먼저 화전을 금하고 지경을 넘어 들어가거나 제철이 아닌 때에 일찍 캐는 자가 있을 경우 일체 엄금하기 바랍니다.”『인조실록』 인조 27년
1653.10.11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선왕의 실록을 이제 네 곳에 봉안해야 하겠는데 한꺼번에 나누어 두기 어려운 형세이니, 적상성(赤裳城)과 오대산(五臺山)에 먼저 배왕(陪往)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접때 조복양(趙復陽)ㆍ이단상(李端相) 등이 나라의 일이 중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천(史薦)에서 분란을 일으켜, 사국(史局)이 텅 비게 하여 실록의 봉안을 이제까지 지체시켰으니, 참으로 놀랍다. 모두 관작을 삭탈하라.”하였다. 『효종실록』 효종 4년

1657.5.6 평창 군수(平昌郡守) 유비(柳秠)가 상소하여 본군의 민폐에 대해 자세히 아뢰니 대동청에 명하여 본군의 세포(稅布)를 감해 주라고 하였다. 『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1657.10.5

태화가 아뢰기를, “새로 수찬한 실록을 각처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해야 하는데 사관이 세 명뿐이어서 한꺼번에 아울러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강도(江都)와 태백산(太白山)의 사고에 우선 먼저 나누어 보관해 두고, 오대산(五臺山)과 적상산(赤裳山)의 사고에는 그 뒤에 보내도록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효종실록』 효종 8년

1658.4.10 동지춘추 오정일(吳挺一), 봉교 이명익(李溟翼)을 오대산(五臺山)에 보내어 《실록》을 봉안하였다. 『효종실록』 효종 9년
1661 허목이 대화 석굴 등을 여행하고 여행기를 남기다
1661.8.20

《효종대왕실록》을 태백산과 오대산에 봉안하다 『현종실록』 현종 2년

1667.윤4.18 이 달 21일에 평창(平昌)·정선(旌善) 등지에 서리가 내렸다. 『현종실록 13권』 현종 8년
1669.3.21 원양도(原襄道)의 춘천(春川)·금화(金化)·안협(安峽)·평창(平昌)에 본월 1일에 눈이 내렸다.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1672.윤7.8 관동에도 7월부터 큰물이 져서 원주(原州)·평창(平昌)·영월(寧越)의 세 고을이 참혹하게 침수를 당해 냇물이 거꾸로 흐르고 물가가 떨어져 나갔는데 온 도가 마찬가지였다. 『현종실록 20권』 현종 13년
1678.5.29 춘천(春川)·강릉(江陵)·평창(平昌)·삼척(三陟)·양양(襄陽) 등의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
1678.9.19

《광해군실록》을 강화ㆍ오대산ㆍ적상산의 사고에 보관하다. 『숙종실록』 숙종 4년

1681.5.11 평창(平昌)·정선(旌善)에도 또한 산악(山岳)이 크게 흔들려서 암석(巖石)이 추락하는 변괴(變怪)가 있었다 『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
1682.2.12 평창(平昌) 땅의 냇가에서 땅이 함몰하였다. 『숙종실록 13권』 숙종 8년
1683.1.15 . 강원도(江原道)의 강릉(江陵)·삼척(三陟)·평해(平海)·울진(蔚珍)·평창(平昌)과 경상도(慶尙道)의 안동(安東)·청송(靑松)·진보(眞寶) 등지에서 지진(地震)이 있었으므로 해괴제(解怪祭)035) 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숙종실록 14권』 숙종 9년
1687.11.9 비국(備局)에서 강릉(江陵) 진부면(珍富面)을 도로 본부(本府)에 소속시키도록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앞서 암행 어사(暗行御史) 서문유(徐文𥙿)가 강릉에서 해마다 공상(貢上)하는 인삼(人蔘)은 본래 이 진부면에서 나온 것인데,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 두 궁(宮)에서 갈라 받으면서는 백성들이 인삼을 캘 수 없게 되고, 모집(募集)해 들인 유민(流民)들이 점점 많이 바싹 가까이에 있게 되므로, 사고(史庫)가 화재에 연소(延燒)될 염려가 있어 또한 매우 우려스러움을 이유로 진계하고, 혁파하기를 청했었다. 그러므로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한 것인데, 임금이 단지 사고(史庫)에서 1백 리 안은 세(稅)를 거두지 말게만 했었다. 이때 궁장(宮庄)의 폐해가 자못 온나라에 두루 퍼지게 되어, 서민들이 생업(生業)을 잃고 공세(公稅)가 날로 줄어들게 되었다.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1690.8.25

동춘추 유명견 등이 오대산 《실록》을 살피고 아뢰다 『숙종실록』 숙종 21년

1695.5.2 강원도 평창(平昌) 지방에 서리가 내렸다. 『숙종실록 28권』 숙종 16년
1697.12.5 평창군(平昌郡)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699.3.1

장릉을 봉하는 데 노역의 피폐가 큰 영월 등에 부세를 감면하다 ; "평창(平昌)·정선(旌善)·제천(堤川)에는 재목을 베고 돌을 뜨는 노역이 있었으니, 반을 견감시켜 주소서."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1706.6.2 강원도(江原道) 정선(旌善)·평창(平昌) 등 고을에 큰 비가 갑자기 쏟아져 강물이 넘쳐서 행로(行路)가 거의 끊기고 인가(人家) 2백여 호가 표류(漂流)·매몰(埋沒)되었으며, 무더위에 죽고 눌려서 죽은 자가 매우 많으므로,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알렸다. 『숙종실록 43권』 숙종 32년
1708.윤3.24 암행어사 심수현이 평창 군수(平昌郡守) 이형(李瀅)·을 포계(褒啓)하였다. 『숙종실록 46권』 숙종 34년
1711.7.16 정호를 평창(平昌)으로 양이하였다. 『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
1723.5.13 강원도 평창(平昌) 등 읍에도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사발 만하였다. 『경종실록 12권』 경종 3년
1725.9.27

삼척(三陟) 사람 신희(申熙)가 상언(上言)하기를, "삼척(三陟)·평창(平昌) 등지에서 지석(誌石)이 있다고 알려 왔으니, 이는 국가(國家) 선대(先代)의 능침(陵寢)인 듯 싶습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을 보내어 봉심(奉審)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언유(鄭彦儒)가 간심(看審)한 후에 치계(馳啓)하기를,"신(臣)이 평창 겸임(平昌兼任) 정선 군수(旌善郡守) 이덕소(李德邵)와 더불어 국릉(國陵)이 지석(誌石)을 지효길(池孝吉)에게 추구(推究)하고 힐문(詰問)하였는데, 지효길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읍인(邑人) 철백(哲白)과 이웃 사람 이용진(李龍進)과 더불어 군(郡) 서쪽 백자전(栢子田) 뒷 동리에서 뗄나무를 베다가 섬돌[階砌]쌓은 것이 완연(宛然)하게 푸른 돌이 나무 뿌리 밑에 노출(露出)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돌을 보니, 길이가 한 자[尺]쯤에 넓이가 3, 4촌(寸)이고, 두께가 1촌쯤 되는데, 네 모서리가 다 떨어져나가 부스러졌으며, 앞면에 네 글자가 있는데 제일 밑에 있는 글자는 이미 반은 떨어져 나간 글자로 크기가 거의 손바닥만 하였습니다. 철백(哲白) 등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옛부터 국릉(國陵)이 있다고 전하여 왔는데, 지금 이 돌에 새긴 것도 또한 심상(尋常)한 것은 아니다.」고 하면서 인하여 가지고 왔으나, 무식하여 글을 모르기 때문에 마침내 돌 위의 글자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이듬해에 본군(本郡)의 토반(土班)인 김득우(金得禹)·김득하(金得夏)가 그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능동(陵洞)에 묘지(墓地)를 정하려고 하여 그 전년(前年)에 얻은 석각(石刻)을 찾고 있으므로, 위협(威脅)에 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내어주었는데, 지금 김득우는 비록 죽었으나 김득하는 아직 살아 있으니, 김득하에게 물어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철백(哲白)과 이용진에게 함께 캐물어 보니, 지효길이 말한 것과 낱낱이 서로 부합되었습니다. 때문에 곧 지효길·철백 등이 공초한 것을 가지고 김득하에게 물어보았는데, 김득하가 말하기를, ‘능동(陵洞)에는 애초에 아비를 장사지낸 일이 없으니, 모두 이것은 지효길이 속여서 한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득우의 3세(世)의 연속(連屬)된 무덤이 능동 좌우(左右)에 빙 둘러 있으므로 다만 석각(石刻)이 하나라도 나올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흔적을 없애려고 하였기 때문에 애당초 찾아간 것이니, 다만 그 아비만 입장(入葬)할 계획을 했을 뿐이 아닙니다. 그 정상(情狀)이 십분(十分) 음흉하고 간교(奸巧)하기 때문에 엄한 형벌로 캐물었으나 마침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조실록 7권』 영조 1년

1727.6.15

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예문관 검열 정익하(鄭益河)가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의 사각(史閣)을 봉심하고 올린 서계에 ‘선원각(璿源閣)과 사각이 한 담장 내에 같이 있는데, 근래에 화전(火田) 농사가 습속이 되어 불이 번지기가 매우 쉬우니 본부(本府)로 하여금 사각의 사면을 따라서 몇 보(步)를 경계로 하여 수목을 베어서 불이 번지는 우환을 막는 것이 합당합니다. 영감사(靈鑑寺)는 사각을 수직(守直)하는 곳인데 창건한 지 오래되어 극심하게 퇴락했으니 반년만 지나면 무너지는 우환을 틀림없이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전에 사관의 서계로 인하여 재빨리 보수하라는 명이 내렸지만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또한 본도에 신칙하여 개수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각을 반드시 깊고 험한 산중에 두는 것은 깊은 뜻이 있는데, 근년 이후에 유민(流民)과 점한(店漢)들이 오대산 안팎에 많이 들어와서 동쪽과 북쪽의 양 산기슭 사이에 한 줄기 산길을 멋대로 열어 놓으니 양양(襄陽)과 강릉에서 왕래하는 사람들이 빠르고 가까운 길을 취하게 되고 물건을 약탈하는 무리도 이곳을 거쳐서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수직하는 승려들이 살 수가 없어서 상원사(上元寺) 위쪽의 여러 절들이 모두 텅 비었으니 중요한 지역을 수호하는 일이 날로 점점 허술해질 뿐만이 아닙니다. 사각을 엄히 지키는 뜻에서 이처럼 해서는 안 되니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워서 각별히 금지시킨다면 3, 4년 이후에는 저절로 길이 막힐 것입니다.’라고 하니, ‘알았다. 서계에 덧붙여 아뢴 일은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라고 전교하여 명을 내리셨습니다.

사각의 체모는 얼마나 엄중합니까. 그런데도 사각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경작한다는 것이 참으로 매우 놀라우니 지금부터는 모두 금지시키고 또 그 사면에서 각각 50보를 한계로 하여 수목을 베어서 화재를 방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영감사를 빨리 보수하도록 명이 내렸는데도 본부에서 아직도 거행하지 않은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니, 올가을에 즉시 보수하도록 하소서. 유민과 점한이 오대산의 안팎에 들어와서 살고 또 잡인의 왕래로 인하여 산길이 멋대로 열려서 중요한 지역을 지키는 일이 날로 허술해지고 있으니 또한 매우 놀랍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강릉과 양양의 두 부(府)에 분부하여 산지기(山直)를 정한 뒤에 엄히 과조를 세워서 각별히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니, 이런 뜻으로 본도에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3년
1728.10.28 영월 관노(寧越官奴) 전지화(田枝華)라는 놈이 연전에 진부면(珍富面) 수다촌(水多村)에 왕래하며 꾀하여 입안(立案)을 내서 한 마을을 모두 제 문건으로 만들어 도저동(桃渚洞) 박 감사(朴監司) 집에 몰래 팔았고 박 감사 집에서는 숙빈방(淑嬪房)에 전매하였습니다 『영조실록 19권』 영조 4년
1728.10.29

기사관(記事官)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신이 오대산(五臺山)의 포쇄(曝曬) 때에 보니 《문종실록(文宗實錄)》의 신미년 10월 이후 임신년 2월 이전이 빠져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마는, 인쇄한 종이가 얇고 나쁘며 또 주필(朱筆)한 흔적이 있었으니, 찬수(纂修)할 때의 중초(中草)일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곳의 포쇄 때에 상고하여 여쭈도록 하라.” 하였다. 이종백이 말하기를, “오대산 사각(五臺山史閣)의 금표(禁標) 안에서 촌백성이 몰래 화전(火田)을 경작하는 폐단이 있으니, 지방관(地方官)에게 신칙(申飭)하여 금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포쇄 때에는 사관(史官)이 금단해야 할 것이니, 해를 걸러 본도의 도사(都事)를 시켜 복심(覆審) 때에 적간(摘奸)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4년

1731.5.22 평창현(平昌縣)에 우박의 재변이 있어 부상(負傷)한 자와 죽은 자가 9인이고, 우마(牛馬) 역시 다섯 마리가 죽었다. 『영조실록 29권』 영조 7년

1731.6.9

강원도 어사 한현모의 서계로 인해 수령 신의집 등의 파직과 민사연 등의 논상을 아뢰다 ; "평창 군수(平昌郡守) 최창억(崔昌億) 등은 치민(治民)의 실적이 없으니 파직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조실록 29권』 영조 7년

1732.3.13

춘추관에서 《경종실록》을 우선 1건만 오대산에 봉안하자 하니 윤허하다.『영조실록』 영조 8년

1733.11.4

한림(翰林)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문종실록(文宗實錄)》 제11편이 본관(本館)과 적상산(赤裳山)ㆍ태백산(太白山)의 여러 사고(史庫)에 누락되었으니, 청컨대, 오대산(五臺山) 사고의 포쇄(曝曬) 행차 때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본관에 도착한 뒤 각본(各本)을 전서(傳書)하여 여러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합당하게 여겼다. .『영조실록』 영조 9년

1747.9.25

제조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신이 예조의 일로 앙달(仰達)할 것이 있습니다. 함흥(咸興)의 유학(幼學) 이세좌(李世佐)·이경석(李景錫) 등이 상언하기를, ‘저희는 목조 대왕(穆祖大王)의 13대손으로서, 삼척(三陟)·평창(平昌) 두 능의 표석(表石)·지석(誌石)을 우리들이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하므로 불러 물어 보았더니,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됨이 몽매하여 대답하는 바가 매우 분명하지 못하였습니다. 혹 말하기를, ‘표석이 깨진 채 묻혀 있습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지석을 직접 보았으나 글자는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다만 ‘적간(摘奸)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일을 소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전례에 따라 회계(回啓)할 수 없으니, 청컨대 낭청(郞廳)을 보내어 살펴 조사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751.윤5.12

장령 박첨이 상서하여 평창군수 정양신 등을 죄줄 것을 청하다 .『영조실록73권』 영조 27년

1758.9.4 연호전(煙戶錢)은 평창(平昌)이 7백 16냥 영이었었는데 전부 감하였으며, 『영조실록92권』 영조 34년
1764.4.13 황해도 은율(殷栗)과 강원도 영월(寧越)·평창(平昌)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영조실록103권』 영조 40년
1776.8.4

관서와 관동에 진휼을 1월에서부터 설시하여 이에 이르러 마치다. 관동(關東)은 강릉(江陵)·삼척(三陟)·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 등 읍과 보안역(保安驛)의 총기민이 4천 1백 62구인데 진휼한 곡식은 2천 8백 92석이었다.『정조실록 2권』 정조 즉위년

1779.5.29

경기·관동·영남·관북·호서에 진구를 마치다 『정조실록 7권』 정조 3년

1782.8.20 김정채(金貞采)는 호남 강진(康津)의 사람이었는데, 사굴죄(私掘罪)를 범하여 관동의 평창군(平昌郡)에 편배(編配)되었다. 『정조실록 14권』 정조 6년
1783.10.29

비변사에서 올린 제도 어사 사목 ; "영월(寧越)·강릉(江陵)·원주(原州)·평창(平昌) 등 곡식이 많은 고을에 있어서는 전후에 도신(道臣)이 진문(陳聞)한 것에 따라 조가(朝家)에서 진실로 이미 익히 알고 있거니와" 『정조실록 17권』 정조 7년

1784.5.11

관동의 진휼을 마치다 『정조실록 17권』 정조 8년

1788. 김홍도 청심대, 오대산, 대관령 등을 관동팔경에 남기다

전 원춘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상에게 아뢰기를, “목조(穆祖)의 국구(國舅)인 천우위(千牛衛) 장사(長史) 이숙(李肅)과 돌산군부인(突山郡夫人) 정씨(鄭氏)의 묘소가 평창군(平昌郡)에 있는데, 태조께서 전지를 지급하여 본 고을 호장(戶長)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셨고, 복두(幞頭)ㆍ단령(團領)ㆍ옥권(玉圈)ㆍ서대(犀帶)를 하사하여 복장을 갖추고 제사를 행하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병란(兵亂)을 겪는 바람에 묘소의 표지가 없어져서 근년에는 고을의 청사에서 제사를 설행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별도로 사당을 세워 사판(祠版)을 봉안하고 국초의 수교(受敎)에 따라 제사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국조보감』 제 72권 정조조 4

1788.3.1 원춘도(原春道) 간성(杆城)·평창(平昌)·회양(淮陽), 황해도 토산(兎山), 평안도 성천(成川), 경상도 풍기(豊基)에 눈이 내렸다.『정조실록 25권』 정조 12년
1793.5.24 영월·평창(平昌)·정선(旌善)·울진(蔚珍)·평해(平海)·원주(原州)·횡성(橫城)·홍천(洪川)·강릉(江陵)·삼척(三陟)의 기민이 총 7천 5백 9명이었는데, 감영과 고을에서 스스로 곡식 5천 7백 13석과 돈 8백 12냥을 준비해서 구휼하였다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
1796.12.25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하여 올린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태백산ㆍ오대산ㆍ적상산 세 산성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남ㆍ호남ㆍ관서에 명하여 그대로 다시 새겨서 올리게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20년
1800.4.16 강릉의 영서(嶺西)는 대화창 등 모두 여섯 개의 창고가 있고 피곡(皮穀)과 잡곡이 도합 2만 6천 40석인데 거주하는 사람이 적어 가구수가 46통(統)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나누어 줄 수량을 응당 받아갈 통에 분배한다면 가구당 받는 수량이 많게는 1백 석 안팎에 이르고 적더라도 사오십 석을 내려가지 않을 판이니, 일년 내내 애써 농사를 짓는다 해도 장차 어디에서 이 수량을 마련해 바치겠습니까. 게다가 또 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고 고을 아전의 농간에 일임한 상황이니, 곡식은 쭉정이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도망가는 백성이 끊이지 않아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으니, 분배하는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감해 주는 정사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동(嶺東) 각 창고의 경우에는 각종 공적으로 소비되는 곡물과 다른 고을로 옮겨가는 몫이 다 그곳에서 나가기 때문에 곡물 장부가 차츰 축소되고 유통이 간혹 끊깁니다. 그러니 차라리 영서의 곡물을 편리한 대로 좇아 환작(換作)하여 영동으로 옮겨둠으로써 저쪽에서 덜어내 이쪽에다 보탠다면 실로 두 쪽이 다 편리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1842.8.13 강원도 암행 어사(江原道暗行御史) 이우(李㘾)를 희정당에서 소견(召見)하였다.·평창 군수(平昌郡守) 이관하(李灌夏) 등을 차등있게 죄주었다 『헌종실록 9권』 헌종 8년
1868.5.5 계촌리 굴아우에서 천주교 신도 심능석 이유일 체포되어 후일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1894.8 평창 오덕보가 신리 등에 동학접소 설치.『동비토론』
1894.8.20 동학농민군이 대화 김장수의 집을 훼손 『임영토비소록』
1894.8.25 제천 청주 영월 평창의 동학농민군 1,000여명이 대화면으로 들어와 모노치를 넘어 진부에 침입 『임영토비소록』
1894.9.3 동학농민군이 대관령을 넘어 구산역에 도착, 성산면집강을 사로잡다 『임영토비소록』
1894.9.4 동학농민군이 강릉부에 들어가다.최윤정이 술과 음식을 접대 『임영토비소록』
1894.9.5

동학농민군이 강릉부 동문에 방을 내걸다. 삼정(三政)의 폐단을 개혁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을 내걸다. 『임영토비소록』

1894.9.6 동학농민군이 선교장에 들어올 것에 대비, 강릉부민들이 잠복하였으나 비가쏟아져 해산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9.7 강릉부의 부민들이 공격하여 100여명을 사상하여 동학농민군이 퇴각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9.8 대관령을 넘어 동학농민군이 다시 들어온다고 소문이 돌다.전 좌수 김상연을 추대 중군장으로 삼다 『임영토비소록』
1894.9.9 정동면민 수백만이 읍에 도착 『임영토비소록』
1894.9.22

향중에서 출신 이진석을 중군으로 추대하고 의막을 설치하다『임영토비소록』

영춘의 동학도 성춘경이 선비 정운경의 집을 불태우고, 영월 평창 정선의 무기를 빼앗고 평창에 주둔하다. 『고문서』

1894.9.26 대화면의 구도미(九道味)의 김상오(金相五)·사전(士田)의 공계정(孔啓正)·안미(鴈尾)의 전순길(全順吉)·계촌(桂村)의 손영팔(孫永八)·평창(平昌)의 진사(進士) 박재회(朴載會) 등이 동도라고 칭하며 포수(砲手)를 모집해서 복수를 하러 영동(嶺東)을 공격하고 영동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한 사실을 보고하다 『동비토론』
1894.09-10 홍천의 차기석이 동학농민군 1000여명을 모아 진부면과 홍천 내면에서 활동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10.1 전승지 이00이 신임 강릉부사로 임명되다. /진부의 박인필, 전 좌수 최00이 통솔하여 수백명을 보내다. 이진석이 대화에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다.『임영토비소록』
1894.10.12 차기석과 박종백의 동학군이 강릉사람을 공격하다.이진석과 이영찬이 150여명의 군을 이끌고 봉평 내면의 동학도를 토벌하러 가다 『임영토비소록』

1894.10.17

-18

이진석 군이 정선 여량마을을 공격하다.원주의 중군과 일본군이 평창의 동학도 100여명을 사살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10.20 동학농민군 1000여명이 정선을 점령하다. 군수는 도망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10.22 이진석(중군장), 이영찬, 박인필이 보좌하는 300여명의 군이 구산역에서 묵다『동비토론』
1894.10.25 이진석 군이 진부에 도착하고 봉평면의 강위서 등이 합류하다 『동비토론』
1894.10.26 강위서가 봉평의 창촌에 들어가 윤태열이창문 김대영 김희열 용하경 오순영 이화규 7명을 죽이다 『동비토론』
1894.10.27 관군은 바로 출병하여 진부역에 다시 주둔하다. 원주(原州) 중군(中軍)과 소모관(召募官) 정준시(鄭俊時) 등이 일본군과 함께 대화에 도착하였다. 강릉 중군 이진석과 박동의와 상의하여 그 포병을 숨기다.『임영토비소론』
1894.11.01 평창과 정선에 수천의 동학군이 모이다. 『동비토론』
1894.11.02

이진석 군이 봉평의 동학도 정창해를 죽이다. 안영보와 김순복은 잡다.

정선읍에는 3,000명 후평에는 1,000명의 동학도가 모이다 『동비토론』

1894.11.02 순영중군이 일본군 2개중대와 함께 운교참에 도착하다 『동비토론』
1894.11.03 봉평면 영군대장 강우서가 "차기석이 인제 양양 간성에 통문을 보내 봉평을 치려한다" 고 보고하다 『동비토론』
1894.11.04 중군 이진석이 포군 50명과 군정 수백을 인솔하여 진부에 주둔하고 있으며, 대화참에 포군 800명을 도착시키다 『동비토론』
1894.11.05

평창·후평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10,000여 명과 싸움을 하여 10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연이어 접주 이문보(李文甫) 등 5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 『동비토론』

1894.11.06

아뢰기를, “지금 탁지아문의 보고를 보니, ‘평창 군수(平昌 郡守) 심의평(沈宜平)이 전에 재령 군수(載寧 郡守)로 있을 때 공금을 횡령한 액수가 많으니 추징하도록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국법으로 헤아려 볼 때 그냥 버려둘 수가 없으니, 평창 군수 심의평을 파면하고 법무아문에서 잡아다가 횡령한 돈을 추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계초존안』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1894.11.07

봉평대장 강위서가 내면에 출병하였으나, 차기석군에 패하였다. 『임영토비소록』

1894.11.08

속사리(束沙里)에 사는 참군(參軍) 홍종우(洪鍾愚)를 소모종사관으로 차출하고, 진부면 방내(防內)에 사는 전 만호(前萬戶) 홍인범(洪仁範)과 하거문리(下巨文里)에 사는 출신(出身) 임원호(任源鎬)를 솔군대장(率軍隊長)으로 차출하여 임명장을 보낸다. 『동비토론』

1894.11.11

박동의가 내면 1리 창촌에 주둔하고 강위서와 홍천(洪川)의 허경(許埛)에게 통문을 내어 합세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자운포(自雲包)에서 접주 위승국(魏承國)과 접사 심성숙(沈成淑) 등 17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동비토론』

1894.11.12

박동의가 이석범의 분의군병과 합세하여 바로 원당리로 진격. 차기석을 토벌할 때에 성찰(省察) 오덕현 등 3명을 사살, 차기석은 생포하다, 청두리(靑頭里)에서 홍천의 권성오(權成五) 등 12명을 쏘아 죽이다.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國範)은 신배령에서, 이석범의 부종(副從)인 김익제(金翼濟)는 응봉령에서 협공하여 접주 김치실(金致實) 등 11명을 사살하고, 접사 박학조(朴學祚)를 사로잡다. 손응선(孫應先) 등 60여 명은 귀화시키다.
강위서는 흥정(興亭) 3리 등지로 방향을 바꿔 임정호(林正浩) 등 38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은 귀화시키다. 홍천 등지에서는 지평현감(砥平縣監)이, 횡성에서는 현감이 소모관 정준시(鄭俊時)와 함께, 평창과 영월 등지에서는 일본군이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동비토론』

1894.11.20

영월·평창·정선에서 밀려난 동학도가 삼척의 상하장면(上下長面)에 숨었다. 『동비토론』

1894.11.21

봉평면 집강 겸 소모종사관 강위서(姜渭瑞), 포수대장(砲手隊長) 추운서(秋云瑞),진부면 도암면 포수도대장(砲手都隊長) 이순서(李順瑞),진부면 포수대장 출신(出身) 최윤범(崔允凡), 도암면 포수대장 권학녀(權學汝), 내면3리 방수도대장(防守都隊長) 황호녀(黃好汝), 내면1리 방수도대장 김윤신(金允信), 속사리 은두령(銀頭嶺) 방수군관(防守軍官) 김정선(金正善), 내면1리 집강 한학유(韓學愈)에 임명하다 『동비토론』

1894.11.22

차기석과 박학조의 머리를 베다 『동비토론』

1894.11.23

정선 여량리 주민이 동학도 지왈길을 잡아 관군에 넘기다 『동비토론』

1894.11.25

지왈길의 목을 베다 『동비토론』

1894.11.

동학점주 : 영서(嶺西) 구숙동(狗宿洞) 점주(店主) 하진주(河晋州) 영상(嶺上) 점주 김경윤(金敬允) 니토치(泥土峙) 점주 정학보(鄭學甫) 구길리(九吉里) 점주 조명서(趙明瑞) 전후치(前後峙) 점주 김경순(金景順) 부동(釜洞) 점주 조마동(曺馬童) 두두랑(頭頭郞) 점주 권정보(權正甫) 『동비토론』

1894.12.07

7일에 진부면 소모종사 박동의가 동학도인 성찰 김성칠을 잡아 문초하니, 동학의 성찰과 초장(哨長)의 직임을 가지고 있고 김상연 4부자를 생매장하였다고 자백하다. 『동비토론』

1895.5.26

지방제도를 개정하다.

충주부(忠州府) 에 속하다【충주군(忠州郡), 음성군(陰城郡), 연풍군(延豐郡), 괴산군(槐山郡), 제천군(堤川郡), 청풍군(淸風郡), 영춘군(永春郡), 단양군(丹陽郡), 진천군(鎭川郡), 청안군(淸安郡), 여주군(驪州郡), 용인군(龍仁郡), 죽산군(竹山郡), 음죽군(陰竹郡), 이천군(利川郡), 양지군(陽智郡), 원주군(原州郡), 정선군(旌善郡), 평창군(平昌郡), 영월군(寧越郡)이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강릉부(江陵府), 춘천부(春川府)를 두다 전국을 23부로 나누다

1900.11.14

-11.24

뮈텔주교 평창지역 순방(서내, 향교터, 물푸레, 하일, 산너미, 새골, 고인돌 공소)
저작권자 ⓒ 평창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