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만드는] 평창군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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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민 승인 2021.08.28 15:45 | 최종 수정 2021.09.08 03:10 의견 0
평창역사연표
시대 일자 평창 강원 전국
구석기시대 기화리 쌍굴유적 : 기화리 쌍굴유적은 동굴 뼈 화석과 구석기의 뗀석기가 같이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이다.(연세대학교박물관팀, 2007년 11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발굴)
평창읍 도돈리 평창강 북쪽 언덕에서 찍게 찌르게 긁게 발견 (문화유적분포지도-평창군, 2004)
신석기시대 평창읍 유동리, 주진리, 빗살무늬토기 출토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87, ☞ 관련기사
용항리. 다수리와 천동리 일대 수혈유구, 야외 노, 토기류 발견 (주) 예백 문화재 연구원. 2010. ☞ 관련기사
후평리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편이 출토되는 야외 노 발견 『평창,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후평리 유적』2013,☞ 관련기사
청동기시대 기반식 고인돌군 평창군 내 다수 존재-상리,종부리, 계장리, 후평리, 임하리 등, ☞ 관련기사
하리 청동기 유적 - 최근 평창읍 하리 240-4번지의 신축건물 부지내의 유적은 고조선식의 청동검과 인골이 반출된 지석묘, ☞ 관련기사
천동리 220번지 주택신축부지:청동기 주거지 1동과 철기 주거지 1동 조사.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이중구연과 단사선문과 공열문 토기와 구순각목문토기, 적색마연토기등의 토기류와 석촉, 석부, 방추차 등의 석기류등이 출토되었다. 「평창 천동리 220번지 주택 신축부지애 유적발굴 조사 보고서」, (2011) ☞ 관련기사
천동리. 마지리 유적 : 청동기 시대 주거지 16동, 주구묘와 석관묘 각 1기의 유구 「평창 천동리 마지리 취락」(2012),☞ 관련기사
약수리, 종부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9동과 주구묘 1기, 수혈유구, 야외 노등이 조사되었다. 「평창 약수리 유적 」(2013). 「평창 종부리 유적 」(2013) ,☞ 관련기사
임하리 선돌,☞ 관련기사
철 기 시 대

방림농공단지 예정지에서 철자형 주거지 2동과 방형 주거지 1동,. 원형유구 7기이 조사되었다.(2009),

국도31호선 영월-방림노선 공사예정지에서 주거지 1동과 작업대로 추정되는 석조유구 1기, 원형유구 3기 등이 발견되었다(2015) ☞ 관련기사

천동리 주거지 1동 발견「평창 천동리 220번지 주택 신축부지애 유적발굴 조사 보고서」(2011)☞ 관련기사
고구려

우수주(牛首州:춘천)의 주군현성 : 우오현[于烏縣: 욱오(郁烏)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제 37 』 잡지 제 6, 지리, 4

하슬라주의 주군현성 : 동토현(東吐縣:지금의 평창군용평면 일대로 비정한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四 고구려(高句麗)』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인데, 우오현(于烏縣)이라고 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삼국시대 교주도(交州道)는 본래 맥(貊)의 땅으로 뒤에 고구려가 차지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권 12】
그 후 두타(頭陁) 신의(信義)는 곧 범일(梵日)의 문인이었던 사람인데 와서 자장법사(590-658)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서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또한 오래도록 폐하였더니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암자를]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이것이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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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왕(淨神大王) 태자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형제가 하서부(河西府)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더니, 문득 하루 저녁은 형제 두 사람이 속세를 떠날 뜻을 은밀히 약속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다. 시위하던 자들이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여 이에 나라로 돌아갔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보천 태자는 [오대산] 중대(中臺) 남쪽 아래 진여원(眞如院)터 아랫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곳을 보고 그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형제 두 사람이 예배하고 염불을 수행하고 오대(五臺)에 나아가 공경하여 예배하였다.『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705.03.08.

효명태자는 왕위에 올랐다. 재위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 비로소 진여원을 세웠다.

보질도태자는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수도하고 다시 오대산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 수도하였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통일신라 경덕왕

속제현 [梀隄縣 :한편 동제현(棟隄縣)이라고 쓴다:지금의 용평면 속사리로 비정한다]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속토현(束吐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二 신라(新羅))』

이름을 백오(白烏)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이 되었다.【고려사지리지 권10】

신라에서는 백오(白烏)로 고쳐서 내성(柰城)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선덕왕

[강릉] 신라 선덕왕 때에 소경(小京)으로 삼고 사신(仕臣)을 두었다.『고려사 지리지 권12』 동계. 명주.연혁)
891.10. 양길이 궁예를 비장으로 삼아 주천 내성 등의 군현을 점령하였다. 명주관내의 주천, 내성, 울오(鬱烏), 어진 등 10개군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동사강목)
고려 고려에 이르러 지금 이름(평창현)으로 바꾸고 원주에 내속하였다. (고려사지리지 권10)고려에서는 평창현으로 고쳐서 원주(原州) 임내로 하였다가 『세종실록지리지 153권』
1156

[후에] 일관이 터를 구하러 이곳에 와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안치할 곳이 아닌데 어째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3 탑상 제4)』 오대산문수석탑기

1217.07.05

최원세(崔元世)와 김취려(金就礪)가 거란군을 충주(忠州)와 원주(原州) 두 주(州) 사이로 추격하여 맥곡(麥谷)에서 싸우고, 박달현(朴達峴)까지 추격하여 대패시켰으므로 적들이 대관령(大關嶺)을 넘어서 달아났다. 『고려사 > 권22 』 세가 권제22 , 고종(高宗) 4년 7월

1290 충렬왕 16년(1290)에 영월·평창을 다시 (동계에) 내속(來屬)시켰다. 『고려사지리지 권12』동계
1299 충렬왕 25년 기해에 비로소 현령을 두었다.『세종실록 지리지 153권』 충령왕 25년 현령을 두었다.『고려사지리지 권10』
1383.06 교주·강릉도의 화척과 재인들이 왜적을 사칭해 약탈을 일삼다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화척(禾尺)·재인(才人) 등이 왜구를 사칭하여 평창(平昌)·원주(原州)·영주(榮州)·순흥(順興)·횡천(橫川) 등지를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體察使) 최공철(崔公哲)이 50여 인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처자는 주군(州郡)에 나누어 배치하였다.『고려사 열전 권48』
1383.07 최공철이 방림역에서 왜구를 물리치다. 교주강릉도체찰사(交州江陵道都體察使) 최공철(崔公哲)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구를 만나 8급(級)을 베었고, 무기와 말 59필을 빼앗았다.『고려사 열전 권48』 우왕 9년
1388

우왕 14년(1388)에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아울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고 충주(忠州)가 관할하던 평창군(平昌郡)을 내속(來屬)시켰다.『고려사지리지 권12』

조선 1392 [평창군] 본조 태조 원년 임신에 목왕(穆王) 효비(孝妃)의 내향이라 하여 다시 지군사로 승격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 153권』
1894.8 평창 오덕보가 신리 등에 동학접소 설치.『동비토론』
1894.8.20 동학농민군이 대화 김장수의 집을 훼손 『임영토비소록』
1894.8.25 제천 청주 영월 평창의 동학농민군 1,000여명이 대화면으로 들어와 모노치를 넘어 진부에 침입 『임영토비소록』
1894.9.3 동학농민군이 대관령을 넘어 구산역에 도착, 성산면집강을 사로잡다 『임영토비소록』
1894.9.4 동학농민군이 강릉부에 들어가다.최윤정이 술과 음식을 접대 『임영토비소록』
1894.9.5

동학농민군이 강릉부 동문에 방을 내걸다. 삼정(三政)의 폐단을 개혁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을 내걸다. 『임영토비소록』

1894.9.6 동학농민군이 선교장에 들어올 것에 대비, 강릉부민들이 잠복하였으나 비가쏟아져 해산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9.7 강릉부의 부민들이 공격하여 100여명을 사상하여 동학농민군이 퇴각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9.8 대관령을 넘어 동학농민군이 다시 들어온다고 소문이 돌다.전 좌수 김상연을 추대 중군장으로 삼다 『임영토비소록』
1894.9.9 정동면민 수백만이 읍에 도착 『임영토비소록』
1894.9.22

향중에서 출신 이진석을 중군으로 추대하고 의막을 설치하다『임영토비소록』

영춘의 동학도 성춘경이 선비 정운경의 집을 불태우고, 영월 평창 정선의 무기를 빼앗고 평창에 주둔하다. 『고문서』

1894.9.26 대화면의 구도미(九道味)의 김상오(金相五)·사전(士田)의 공계정(孔啓正)·안미(鴈尾)의 전순길(全順吉)·계촌(桂村)의 손영팔(孫永八)·평창(平昌)의 진사(進士) 박재회(朴載會) 등이 동도라고 칭하며 포수(砲手)를 모집해서 복수를 하러 영동(嶺東)을 공격하고 영동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한 사실을 보고하다 『동비토론』
1894.09-10 홍천의 차기석이 동학농민군 1000여명을 모아 진부면과 홍천 내면에서 활동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10.1 전승지 이00이 신임 강릉부사로 임명되다. /진부의 박인필, 전 좌수 최00이 통솔하여 수백명을 보내다. 이진석이 대화에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다.『임영토비소록』
1894.10.12 차기석과 박종백의 동학군이 강릉사람을 공격하다.이진석과 이영찬이 150여명의 군을 이끌고 봉평 내면의 동학도를 토벌하러 가다 『임영토비소록』

1894.10.17

-18

이진석 군이 정선 여량마을을 공격하다.원주의 중군과 일본군이 평창의 동학도 100여명을 사살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10.20 동학농민군 1000여명이 정선을 점령하다. 군수는 도망하다. 『임영토비소록』
1894.10.22 이진석(중군장), 이영찬, 박인필이 보좌하는 300여명의 군이 구산역에서 묵다『동비토론』
1894.10.25 이진석 군이 진부에 도착하고 봉평면의 강위서 등이 합류하다 『동비토론』
1894.10.26 강위서가 봉평의 창촌에 들어가 윤태열이창문 김대영 김희열 용하경 오순영 이화규 7명을 죽이다 『동비토론』
1894.10.27 관군은 바로 출병하여 진부역에 다시 주둔하다. 원주(原州) 중군(中軍)과 소모관(召募官) 정준시(鄭俊時) 등이 일본군과 함께 대화에 도착하였다. 강릉 중군 이진석과 박동의와 상의하여 그 포병을 숨기다.『임영토비소론』
1894.11.01 평창과 정선에 수천의 동학군이 모이다. 『동비토론』
1894.11.02

이진석 군이 봉평의 동학도 정창해를 죽이다. 안영보와 김순복은 잡다.

정선읍에는 3,000명 후평에는 1,000명의 동학도가 모이다 『동비토론』

1894.11.02 순영중군이 일본군 2개중대와 함께 운교참에 도착하다 『동비토론』
1894.11.03 봉평면 영군대장 강우서가 "차기석이 인제 양양 간성에 통문을 보내 봉평을 치려한다" 고 보고하다 『동비토론』
1894.11.04 중군 이진석이 포군 50명과 군정 수백을 인솔하여 진부에 주둔하고 있으며, 대화참에 포군 800명을 도착시키다 『동비토론』
1894.11.05

평창·후평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10,000여 명과 싸움을 하여 10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연이어 접주 이문보(李文甫) 등 5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 『동비토론』

1894.11.06

봉평대장 강위서가 내면에 출병하였으나, 차기석군에 패하였다. 『임영토비소록』

1894.11.08

속사리(束沙里)에 사는 참군(參軍) 홍종우(洪鍾愚)를 소모종사관으로 차출하고, 진부면 방내(防內)에 사는 전 만호(前萬戶) 홍인범(洪仁範)과 하거문리(下巨文里)에 사는 출신(出身) 임원호(任源鎬)를 솔군대장(率軍隊長)으로 차출하여 임명장을 보낸다. 『동비토론』

1894.11.11

박동의가 내면 1리 창촌에 주둔하고 강위서와 홍천(洪川)의 허경(許埛)에게 통문을 내어 합세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자운포(自雲包)에서 접주 위승국(魏承國)과 접사 심성숙(沈成淑) 등 17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동비토론』

1894.11.12

박동의가 이석범의 분의군병과 합세하여 바로 원당리로 진격. 차기석을 토벌할 때에 성찰(省察) 오덕현 등 3명을 사살, 차기석은 생포하다, 청두리(靑頭里)에서 홍천의 권성오(權成五) 등 12명을 쏘아 죽이다.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國範)은 신배령에서, 이석범의 부종(副從)인 김익제(金翼濟)는 응봉령에서 협공하여 접주 김치실(金致實) 등 11명을 사살하고, 접사 박학조(朴學祚)를 사로잡다. 손응선(孫應先) 등 60여 명은 귀화시키다.
강위서는 흥정(興亭) 3리 등지로 방향을 바꿔 임정호(林正浩) 등 38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은 귀화시키다. 홍천 등지에서는 지평현감(砥平縣監)이, 횡성에서는 현감이 소모관 정준시(鄭俊時)와 함께, 평창과 영월 등지에서는 일본군이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동비토론』

1894.11.20

영월·평창·정선에서 밀려난 동학도가 삼척의 상하장면(上下長面)에 숨었다. 『동비토론』

1894.11.21

봉평면 집강 겸 소모종사관 강위서(姜渭瑞), 포수대장(砲手隊長) 추운서(秋云瑞),진부면 도암면 포수도대장(砲手都隊長) 이순서(李順瑞),진부면 포수대장 출신(出身) 최윤범(崔允凡), 도암면 포수대장 권학녀(權學汝), 내면3리 방수도대장(防守都隊長) 황호녀(黃好汝), 내면1리 방수도대장 김윤신(金允信), 속사리 은두령(銀頭嶺) 방수군관(防守軍官) 김정선(金正善), 내면1리 집강 한학유(韓學愈)에 임명하다 『동비토론』

1894.11.22

차기석과 박학조의 머리를 베다 『동비토론』

1894.11.23

정선 여량리 주민이 동학도 지왈길을 잡아 관군에 넘기다 『동비토론』

1894.11.25

지왈길의 목을 베다 『동비토론』

1894.11.

동학점주 : 영서(嶺西) 구숙동(狗宿洞) 점주(店主) 하진주(河晋州) 영상(嶺上) 점주 김경윤(金敬允) 니토치(泥土峙) 점주 정학보(鄭學甫) 구길리(九吉里) 점주 조명서(趙明瑞) 전후치(前後峙) 점주 김경순(金景順) 부동(釜洞) 점주 조마동(曺馬童) 두두랑(頭頭郞) 점주 권정보(權正甫) 『동비토론』

1894.12.07

7일에 진부면 소모종사 박동의가 동학도인 성찰 김성칠을 잡아 문초하니, 동학의 성찰과 초장(哨長)의 직임을 가지고 있고 김상연 4부자를 생매장하였다고 자백하다. 『동비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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