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학연구] 평창의 동학농민운동

- 동비토론에 나타난 평창의 동학농민운동
- 1894년 9월부터 11월까지 치열했던 전투,
- 일본군 2개 중대도 참전

전형민 승인 2021.09.06 09:49 | 최종 수정 2021.09.06 09:50 의견 6

동비토론에 나타난 평창동학운동

동비토론은 강원도 지역의 농민군과 관군과 양반세력, 그리고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상황과 관련된 반동학세력의 문서를 모아놓은 책이다.

1894년 9월 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지역 농민군의 강릉부(江陵府) 점령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0월에는 차기석(車箕錫)을 중심으로 홍천(洪川)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자료에는 1894년 9월부터 1895년 3월까지의 문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문서들은 지방관청에서 농민군 진압을 위해 강원도 각 지역에 보낸 전령과 각 지역으로부터 보고받은 첩보가 대부분이다. 주요 내용으로, 영월·평창·정선 등지의 농민군 활동상, 봉평(蓬坪) 내면(內面)의 농민군 차기석과 소모군관(召募軍官) 강위서(姜渭瑞)의 전투과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본 자료는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이에 대한 진압활동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원본은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이회원(李會源) 후손인 이강융(李康隆)씨가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는 반동학세력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동학농민군은 도적(동도/동비 등)으로 묘사하였으나, 단어등을 고치지 않고 날자별로 사건을 정리하였다. (편집자주)

[1894.8]
본 군에 사는 동도 오덕보(吳德甫)라는 놈은 지난 8월에 포교(布敎)를 한다고 본 관아의 신리면에 와서 머무르며 접(接)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금 비류를 토벌할 때에 자취를 감추고 도망갔는데, 그놈이 한 짓을 보면 단순한 동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甲午十一月二十一日 關平昌郡]
1894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먼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동학의 이름을 내걸고 일어났다. 본도(本道), 강원도의 원주(原州)·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 4개 읍도 점점 그 피해를 입어 종종 동학의 접(接)을 설치하는 곳이 있게 되었다.
[在營 九月初八日]

[9.4]
1894년 9월 4일에 영월과 평창, 정선 등 5개 읍의 동학의 무리 수천 명이 부사(府使)가 바뀌는 때를 엿보아 일제히 읍내에 들어와서 삼정(三政)을 바로잡을 것을 사칭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래서 우선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연유를 공형(公兄)이 문장(文狀)으로 감영에 보고하였다
[在營 九月初八日]

동학도가 지나는 곳의 길목에서 말을 빼앗아 타고, 총과 칼을 가져갔으며 심지어 부중(府中)에 4~5일을 머물렀습니다. 유정(維正)註 001과 군세(軍稅) 및 적세(糴稅), 환곡 등의 삼정(三政)을 마음대로 삭감하였고, 요호(饒戶)를 불러다가 재물을 요구하고 전답문서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관원과 백성을 구타하여 관아의 옥사에 가두고 민간의 송사(訟詞)를 쉽게 처결했으며, 주리를 트는 형벌로 위협하고 도당(徒黨)들을 불러 모았을 뿐아니라 군기를 탈취하려고 했습니다.
「1894.9.8 순영 및 겸관에 보고」
이번 달 4일에 평창의 전 좌수 이치택(李致澤), 이름을 알수 없는 권지관(權地官), 진사 박재회(朴載會), 영월의 이름을 알수 없는 나교장(羅敎長), 삼척(三陟)의 황찰방(黃察訪), 정선(旌善)과 여량역(餘糧驛)의 지왈길(池曰吉), 본 관아 대화면(大和面)의 김상오(金相五)·공계정(孔啓正)·김순길(金順吉)·손영팔(孫永八) 등이 동학을 칭하면서 영월·평창·정선 등의 3개 읍에서 수천여명을 이끌었습니다.
[留鄕座首爲牒報事]

[9.7]
각 면(面)의 대소 민인 4,000~5,000명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 달 7일 술시(戌時) 쯤에 의병을 일으켜 일제히 일어나 한꺼번에 읍에 들어왔고, 관아의 백성들도 의기(義氣)를 내어 힘을 합하여 그들의 죄를 성토하였습니다. 그들을 몰아낼 때에 현장에서 죽인 자가 20명이고 부상을 당한 뒤에 도주하다가 죽인 자가 수십여 명이며 본읍의 백성들 중에 다친 자는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빼앗은 총은 7자루이고 창은 157자루이며 말은 3필입니다. 부상을 당한 읍촌의 백성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하여 거의 죽음을 면할 지경이 되었으나 감영의 물품으로 치료를 도와주는 것은 관아가 비어 마음대로 거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감영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빼앗은 창과 총은 숫자를 대조하여 관아에 들였고, 말은 원래 주인이 찾으러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어 줄 계획입니다. 의거를 먼저 제기한 사람과 매우 심하게 다친 백성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서 성책(成冊)하여 올려 보내고 연유를 첩보합니다.
[留鄕座首爲牒報事]
[9.9]
동학을 사칭하고 민간에서 폐단을 저지르는 자를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하는 일은 순영(巡營), 감영의 관문(關文)이 내려왔기 때문에 일전에 읍에 들어와서 폐단을 저지르는 동도를 읍촌(邑村)의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토벌하고 쫓아냈다. 그러나 앞으로의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니, 그것을 지키는 일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면내(面內)의 5가(家)를 1통(統)으로 만들어 10통을 2개의 초(哨)로 나누어 대장(隊長) 2명을 뽑고 총과 창을 준비하여 이번 달 13일 대점고(大點考)에 이르러 일제히 영솔하여 와서 점고를 받도록 배열하라.

[9.26 보고]
“ 본 관아의 대화면은 읍의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한양과 감영으로 가는 길목으로 공납의 진상과 문첩의 운송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습니다. 해당 면의 구도미에 사는 김상오(金相五)·사전(士田)에 사는 공계정(孔啓正)·안미(鴈尾)에 사는 전순길(全順吉)·계촌(桂村)에 사는 손영팔(孫永八)·평창(平昌)의 진사(進士) 박재회(朴載會)” 등이 동도라고 칭하며 본읍에서 그들을 몰아낸 것에 반감을 품어 군호로 도당을 모으며 포수를 모집해서 복수를 하러 영동을 공격할 계획이 있을 뿐 아니라 영동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문장초 文狀草」

[9.22]
동학군이 평창군 등지에 자리잡은 것은, 충청도 영춘( 永春)에서 정운경 허준 및 권준등과 함께 유생을 모아 동학의 접소를 불태우고 동학의 지도자를 죽였는데, 성두한(成斗漢)의 무리가 일본군에게 쫓겨 단양으로 피해들어와서 단양의 무기를 빼앗고 제천으로 들어가 또다시 군기를 빼앗아 세를 불렸으며, 9월22일 영춘현에 쳐들어가 정운경과 허준의 집을 불태우고 군기를 빼앗앗으며 다시 영월 평창 정선의 3개읍의 무기를 빼앗고 평창에 주둔하여 정비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강릉부를 점령한 동학군 이외에 성두한의 동학군도 평창군에 세력을 넓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문서」②,『동비토론』

[10.12]
또한 이해 10월12일에는 홍천의 차기석(車箕錫)과 접주 박종백(朴鍾伯)의 동학군이 봉평, 내면 등을 점령하였으며 정선과 평창 2개 읍의 공학군이 몇천명에 이르렀다고 하다. 이 때 중군 이진석과 전 감찰 이영찬을 대장으로 하는 관군 1500명이 봉평의 봉평 윤태열(尹泰烈)과 이창문(李昌文)·김대영(金大永)·김희열(金喜烈)·용하경(龍河京)·오순영(吳順永)·이화규(李和奎) 을 잡아 처형하였는데, 이후 정선과 평창 2개 읍에 각 읍내에 몇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0.12]
지난 달 22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도착한 비감(秘甘)내 감결의 내용을 요약한 것에 의하면, “홍천현감의 보고를 지금 받아보니, ‘동학의 무리가 이번 달 12일 밤에 불을 질렀습니다. 괴수(魁首) 차기석(車箕錫)과 접주 박종백(朴鍾伯)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강릉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습니다. 행패를 부린 놈들은 모두 본현의 사람들이어서 현감이 검시(檢屍)할 몇 사람을 데리고 시신이 보관된 곳에 도착하니 몇 백명의 동학의 무리들이 각기 총과 창을 소지하고 시신을 둔 곳을 에워싸서 검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동학의 무리가 강릉으로 방향을 바꿔 운지(雲地)에 머물러서 점점 도당을 모으고 아직 해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甲午十一月初一日 牒巡營]
그 날(10.12) 미시(未時, 오후 1~3시) 쯤에 본 관아의 중군(中軍) 이진석(李震錫)과 전 감찰 이영찬(李永燦)을 영수(領首)로 차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포군과 읍하군(邑下軍) 150여명을 이끌고 가서 영서의 군정과 힘을 합쳐 봉평(蓬坪) 내면(內面)의 동도들을 토벌하도록 단단히 타일러서 보냈습니다.
[甲午十一月初一日 牒巡營]

[10.22]
그래서 지난 달 22일에 군정을 징발하여 본부의 중군 출신 이진석과 전 감찰 이영찬(李英燦) 및 유생 박동의로 하여금 인솔해서 봉평면의 비도를 치게 하였습니다.
해당 면에 사는 강우서(姜禹瑞), 강위서가 비도의 못된 짓에 격분하고 백성들이 목숨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모집해서 비도의 괴수인 윤태열과 정창호 등 13명을 이미 잡아서 바쳤습니다.
[江原道行江陵大都護府使兼關東召募使]

10월 28일에 중군 이진석과 영수(領首) 이영찬의 보고에 의하면, “봉평 비도의 괴수 윤태열(尹泰烈)과 같은 패거리 이창문(李昌文)·김대영(金大永)·김희열(金喜烈)·용하경(龍河京)·오순영(吳順永)·이화규(李和奎) 등 7명은 사람들의 분노가 격발하여 그 자리에서 총을 쏴서 죽였고, 나머지 도망간 적들은 특별히 추격하여 체포한 뒤에 내면(內面)으로 방향을 바꿀 계획입니다.
甲午十一月初一日 牒巡營]

이 달 2일에 중군 이진석의 첩보에 의하면, “봉평의 비도 정창해(鄭昌海)는 뒤를 밟아 잡아서 총을 쏘아 죽인 뒤에 동도 안영보(安永甫)와 김순복(金順卜) 2명도 잡았다고 하기에 엄중히 조사하여 심문을 하였더니, 안영보가 말한 것에 의하면, ‘그 자신의 동생인 영달(永達)이 동도에 참여하여 저 무리 속에 왕래하다가 관군이 토벌하는 날에 먼저 도망하여 그 자신이 대신 잡혀왔다’고 하였습니다.
김순복이 말한 것에 의하면, ‘그 자신의 아들 성칠(成七)이 동학에 참가하여 난류(亂類)와 결탁해서 저 무리 속에 나타나다가 관군이 토벌할 때에 먼저 도망하여 향방을 알지 못해 그 자신이 대신 잡혀 와서 다른 변명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날 김상연 4부자를 잡아서 산채로 묻어 죽인 것은 안영보와 안영달 형제가 중간에서 조종하지 않은 것이 없고, 영서 등의 지역에서 평민을 위협하여 비도의 명단에 들어가게 한 것은 김순복 부자(父子)가 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소문이 무성하니 그들이 말한 것을 실제로 믿기가 어렵습니다.\[甲午十一月初三日 牒兼]

[11.1]
정선과 평창 2개 읍의 비도가 창궐하여 각기 읍내에 모였는데, 그 수가 몇 천명에 이르러 기세가 대단하고 본부로 향하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그래서 군정을 여러 곳의 요충지에 보내어 각별히 지키고 그들을 섬멸하려고 하지만 본읍의 형편으로는 이 비도들을 혼자 수색하여 토벌하기 어렵습니다
[甲午十一月初一日 牒巡營]

[11월 2일]
유학 이석범(李錫範)은 이미 의거를 일으켜 병사를 모집하였다. 그래서 종사관으로 차출하여 임명장과 전령을 보낸다.이번 달 6일까지 병정 300명을 이끌고 내려오되, 각각 병기를 가지고 기한 내에 보내라.
[甲午十一月初二日 戌時 關襄陽]

[11.3]
순영(巡營)에서 따로 순영중군도토포사(巡營中軍都討捕使)를 정해 병정을 이끌고 일본군 2개 중대와 함께 이 달 3일에 운교참(云交站)에 이르렀다. 읍의 포군(砲軍) 800명을 대화참에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어제 신시(申時)에 영서의 유진중군(留陣中軍)으로 하여금 정해진 숫자대로 병정을 이끌고 와서 협력하여 정선과 평창 등지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襄陽作廳 回納]
[11.4]
본 관아의 포군 800명에게도 할 일이 있어 이에 관문을 보낸다. 관문이 도착하는 즉시 엄중히 타일러서 경계하고 특별히 단속하라. 이 달 4일에 대화참(大和站)에 도착할 것이다.
[傳令 行陣中軍]

이 달 4일 미시에 도착한 순영 중군 이문(移文)의 절해에 의하면, “근래에 비도가 소요를 일으켜서 지금 순영문의 분부를 받들어 직접 포군을 이끌고 그들을 잡으러 나왔는데, 영서에 주둔하고 있는 본 관아의 포군에게도 할 일이 있으니 신속하게 알려서 소홀히 하여 낭패에 이르지 않도록 하시오”라고 했기 때문에 봉평의 비도를 토벌하러 나온 중군 이진석에게 명령을 내려 본 관아의 임계면과 정선의 통행로를 지키고 순중군의 명령을 전적으로 따라 회군(回軍)하도록 단단히 타일렀습니다.
[甲午十一月日 牒巡使]
[11.5]
이 달 5일에 평창·후평 등지에서 동학 10,000여 명과 싸움을 하여 비도 10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연이어 접주 이문보(李文甫) 등 5명을 잡아서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으며 정선 등지로 추격하여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 각처로 흩어진 10,000여 명은 쫓기는 대로 흩어졌다가 모이니 훗날의 걱정이 없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군대가 만약 정선을 나가면 강릉의 요충지에 방략을 많이 마련하여 엄중히 지키고, 수상한 자가 경내를 지나가면 보이는 대로 체포하여 소홀히 해서 나중에 후환이 되지 않도록 하라.
[在平昌邑 初十日]

“내면의 괴수 차기석이 몰래 기린(麒獜), 인제·양양(襄陽)·간성(杆城) 등에 통문을 보내고 군호(軍號)로 비도를 모아 봉평을 도륙하려 한다고 해서 특별히 병정을 징집하여 우선 방비한다고 하므로 이에 관문을 보냅니다”
[甲午十一月初五日 酉時 關杆城郡]

이 달 5일 진시에 도착한 감결에 의하면, “지금 동도가 충주와 제천 사이에서 패하여 흩어진 자가 많다고 들었다. 혹시 본 관아의 경내로 흘러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생각되니 읍에서는 반드시 그들을 방비하고 또한 토벌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순영문에서 나머지 무리를 추격하여 체포할 때에 순영 중군을 내려 보내니 만약에 혹시 영서(嶺西)의 방비하는 곳에서 서로 만난다면 포군을 징발하여 순영 중군의 지휘에 따라 힘을 합쳐 서로 구제하도록 즉시 출토군관(出討軍官)에게 명령을 내려 단단히 타이르고 그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甲午十一月日 牒巡使]

[11.6]
이 달 6일에 강위서의 수본에 의하면, “동도 거괴(巨魁) 차기석이 1,000여 명을 모아 봉평과 내면 및 영서의 각 읍 등지에 출몰해서 창과 총을 빼앗아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창고와 가옥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습니다. 그 기세가 대단하여 약간의 군병으로는 막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박동의에게 군병을 인솔하도록 하여 바로 내면으로 보내고 이어서 다시 양양관아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을 모집하였습니다. 해당 관아의 사인(士人) 이석범은 진신(縉紳)의 후예로서 이미 의병을 모집하여 경내의 비도를 토벌하였고, 소모사의 명령을 듣고 바로 같은 마을의 유생인 최주하·김준수·장혁주와 함께 병정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내면 등지로 보냈습니다.
[江原道行江陵大都護府使兼關東召募使]
정선읍의 비도를 토벌할 때에 이 달 6일에 본 관아 중군 출신 이진석과 출신 조철승(曺轍承)이 군정을 이끌고 가서 바로 정선군 여량으로 들어가 비도와 접전을 하여 1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이중집 등 5명을 사로잡아 결박하여 보냈습니다. 비도의 빈집 70여 호는 흩어진 비도가 돌아와서 거처하여 소굴이 될 것을 염려하여 바로 불태웠습니다. 방향을 바꿔 해당 읍으로 들어갈 때에 일본군이 먼저 들어가 그들을 섬멸했다고 합니다. 다른 군대가 이미 지나간 곳을 나아가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대로 회군하였고, 봉평대장 강위서가 인솔한 병정과 이석범이 인솔한 분의군(奮義軍)은 모두 박동의가 통솔하였습니다.
[甲午十一月日 牒巡使]

[11.7]
“봉평대장 강위서(姜渭瑞)가 내면에 들어갔는데 1리(里) 창촌(倉村)에서 동도에 패했다고 하였으니 정말로 보고대로라면 매우 안타깝습니다.
[傳令 召募從事官朴東儀]
그래서 이 달 7일에 포군을 인솔하여 정선읍에 가서 순영 중군과 함께 동서로 나누어 토벌하였으며, 봉평의 비도를 섬멸한 뒤에 내면의 비류를 추격하여 체포할 때에 봉평에 사는 강위서를 포군대장(砲軍隊長)으로 차출하고 해당 면의 포군을 인솔하여 가서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강위서가 내면 1리 창촌에 달려 들어가서 동비가 각각 도망하여 흩어진 때에 차기석이란 놈이 몰래 산위에서 무리를 모았다가 밤에 강위서의 진중(陣中)을 습격했는데 뜻밖에 일이라서 그들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3명이고 다친 자가 8명에 이르렀고 패하여 돌아왔다고 합니다. 봉평면 집강의 보고뿐만 아니라 저들이 다시 무리를 모아 백성을 위협하고 자신의 당(黨)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 사이에 해친 목숨이 60여 명이고 불을 지른 민가도 10여 호에 이릅니다. 그 패악한 행동은 용서할 여지가 없는데, 하물며 저들이 무리를 모아 당을 만들어 그 수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비도의 괴수인 차기석이 아직 내면에 있으면서 흉악한 행동을 꾸미고 저지르는 것은 정말로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한편으로는 경내에 남은 포군을 뽑고, 양양 관아에서 군정을 모집하였습니다. 양양관아의 유생인 이석범이 분의군병 50명을 인솔하여 왔기 때문에 바로 내면 등지로 보내어 본 읍의 포군과 함께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우선 함께 첩보합니다.
[甲午十一月日 牒巡使]

[11.8]
본 면 속사리(束沙里)에 사는 참군(參軍) 홍종우(洪鍾愚)를 소모종사관으로 차출하고, 본 면 방내(防內)에 사는 전 만호(前萬戶) 홍인범(洪仁範)과 하거문리(下巨文里)에 사는 출신(出身) 임원호(任源鎬)를 솔군대장(率軍隊長)으로 차출하여 임명장을 보낸다.
[傳令 珍富面執綱及風憲大小民人]

[11.9]
“봉평의 포수대장(砲手隊長) 강위서가 해당 면에 돌아왔는데, 창촌에서 부상을 당한 군정은 3명이고, 내면의 비도 수백 명이 민가 10여 호를 불태웠으며 찔러 죽인 민인도 10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
[傳令 召募從事官朴東儀珍富面都執綱金允熙]

[11.11]
이 달 11일에 박동의가 내면 1리 창촌에 주둔하고 강위서와 홍천(洪川)의 허경(許埛)에게 통문을 내어 합세하여 바로 토벌을 해서 자운포(自雲包)에서 접주 위승국(魏承國)과 접사 심성숙(沈成淑) 등 17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江原道行江陵大都護府使兼關東召募使]

[11.12]
그 다음 날에 박동의가 이석범의 분의군병과 합세하여 바로 원당리로 진격하였습니다. 차기석을 토벌할 때에 성찰(省察) 오덕현 등 3명을 우선 쏘아 죽였고, 차기석은 승세를 타서 사로잡았습니다. 청두리(靑頭里)로 진격하여 홍천의 비괴인 권성오(權成五) 등 12명을 쏘아 죽이고 약수포로 들어갔습니다.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國範)은 병정을 이끌고 신배령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이석범의 부종(副從)인 김익제(金翼濟)는 병정을 인솔하여 응봉령으로 바로 나아가 3 방향의 길에서 협공하여 접주 김치실(金致實) 등 11명을 쏘아 죽였으며, 접사 박학조(朴學祚)를 사로잡았습니다. 사로잡은 비도 중에 손응선(孫應先) 등 60여 명은 개고기를 나누어서 먹게 하고,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습니다.
강위서는 흥정(興亭) 3리 등지로 방향을 바꿔 임정호(林正浩) 등 38명을 쏘아 죽였고 나머지 무리 100여 명은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습니다. 홍천 등지에서는 지평현감(砥平縣監)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였고, 횡성 등지에서는 해당 현감이 소모관 정준시(鄭俊時)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으며, 평창과 영월 등지에서는 일본군이 먼저 토벌을 하였습니다. 다른 군대가 이미 지나간 곳은 나아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각 군대는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江原道行江陵大都護府使兼關東召募使]
이 달 14일에 박동의와 이석범의 수본에 의하면, “지금 12일에 내면 원당리에 행군하니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개 읍의 동비를 접주 차기석이 무리를 인솔하여 깃발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기세가 매우 대단하였기 때문에 양양과 강릉의 2개 진영이 길을 나누어 협공하여 차기석을 사로잡았고, 다시 이른바 성찰 오덕현·집강 박석원·지덕화 등 3명을 문초(問招)하니, ‘내면의 창고와 김학서(金學瑞) 등 14명의 집을 방화할 때에 함께 모의하여 흉악한 짓을 했다’고 하여 한꺼번에 쏘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 19명은 어리석은 기질로 차기석의 협박에 빠졌고 이와 같은 실상이 가련하였기 때문에 개고기를 나누어 먹게 한 뒤에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다”라고 하였습니다.
[甲午十一月日 牒巡使]

본 관아의 종사관 박동의는 궁벽한 산골에 있지만 이런 일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서 계책을 세워 승리하였습니다. 이석범 형제는 진신의 후예로서 해당 읍에서 의병을 일으켜 비류를 토벌하였고, 지금 병사를 모집할 때에 같은 마을의 유생 김익제·최주하·김준수·장혁주 등을 이끌고 때에 맞춰 협공을 했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봉평대장 강위서는 포수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해당 면의 비도를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고, 홍천의병과 힘을 합하여 도처에서 50여 명을 쏘아 죽였으며 귀화시킨 자들도 100여 명에 이르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중군 출신 이진석과 출신 조철승 등은 2차례 행군하여 비당(匪黨)을 섬멸하였으니 상을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사가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아 각처의 비도를 직접 토벌할 겨를이 없고 쇠약한 몸에 병까지 연이어 침범하여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병사를 모집하여 본 관아의 영서와 정선 및 여량 등지에 행군해서 비도를 지금에야 평정했습니다. 각 요충지를 지키는 일을 특별히 단속하여 감히 흩어진 비도가 다시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이런 엄동의 추운 날씨에 눈이 산마루에 쌓인 때를 만나 군정을 점차 돌려보내며 잘 타일러서 생업을 안정시켰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
[甲午十一月日 牒巡使]

[11.20]
상고할 일이다. 지금 본 관아 임계면에 주둔한 대장의 수본을 보니 영월·평창·정선에서 쫓겨난 비도가 모두 삼척의 상하장면(上下長面)에 도망가서 숨었다고 하였다.
[甲午十一月二十日 關三陟府]

[11.21]
봉평면 집강 겸 소모종사관 강위서(姜渭瑞)
포수대장(砲手隊長) 추운서(秋云瑞)
진부면 도암면 포수도대장(砲手都隊長) 이순서(李順瑞)
진부면 포수대장 출신(出身) 최윤범(崔允凡)
도암면 포수대장 권학녀(權學汝)
내면3리 방수도대장(防守都隊長) 황호녀(黃好汝)
내면1리 방수도대장 김윤신(金允信)
속사리 은두령(銀頭嶺) 방수군관(防守軍官) 김정선(金正善)
내면1리 집강 한학유(韓學愈)
[11.22]
차기석과 박학조 2놈은 이 달 22일에 교장(敎場)에서 머리를 베어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수급(首級)은 역자(驛子)註 016를 정해 본도의 감영에 보냈습니다.
[江原道行江陵大都護府使兼關東召募使]

[11.25]
첩보한 일입니다. 본부 임계면의 요충지는 해당 면의 진사 최윤수(崔允秀)가 지키도록 잘 타일렀습니다. 정선군 여량의 비괴인 지왈길을 잡아서 이 달 25일에 바로 목을 베었고, 삼척 상하장면(上下長面) 등지에 비도의 나머지 무리가 있다고 해서 최윤수를 보내어 모두 섬멸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
[甲午十一月二十六日 牒巡使]

임계면 1리(一里) 대장(隊長) 김두원(金斗源)
군량종사(軍糧從事) 함건섭(咸建燮)
군정도총장(軍丁都摠長) 최상집(崔常集)
2리(二里) 대장 이민두(李敏斗)
군량종사 이제덕(李濟德)
군정도총장 김장경(金章卿)
3리(三里) 대장 허증(許增)
군량종사 최윤엽(崔允燁)
군정도총장 최돈승(崔燉升)
도집강(都執綱) 함주섭(咸柱燮)

[11.29]
상고할 일이다. 본군에 사는 비도 오덕보를 잡아서 압송하라는 지시가 오래되었으나 아직 조백(皂白)註 018이 없으니 거행한 전례에 비추어보아 지체되는 것이 매우 심하다.
[甲午十一月二十九日 關平昌郡]

[12.7]
이 달 7일에 진부면 소모종사 박동의가 비도인 성찰 김성칠을 잡아들였기 때문에 위엄을 펼쳐 엄중히 문초하였더니, 그는 비류 중에 성찰과 초장(哨長)의 직임을 가지고 있고 김상연 4부자를 생매장한 일과 전후에 저지른 폐단을 일일이 자복하였습니다. 그 죄를 용서하기가 어려워서 시장에 개좌(開坐)註 020하고 군민(軍民)을 많이 모아 그를 쏘아 죽여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평창과 정선에 도망간 비도의 괴수는 특별히 기찰하여 체포하도록 타일렀고,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
[甲午十二月初十日 牒兼使]
[12.9]
출전한 박동의와 강위서 등의 공로는 이미 감영에 보고되고 임금께 보고하여 회계(回啓)를 공손히 기다리고 있다
. 그러나 소장 중에 종사관의 임무를 수행한 권(權)·강(姜)·한(韓)에게 중한 상을 주어야 한다는 등의 말은 백성이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이성구(李成九)가 출전하여 죽은 것은 매우 참담하니 우선 부의(賻儀)를 보내고 장례를 치루는 일은 각별히 넉넉히 주라
[蓬坪面興正里頭民兪慶煥等 報題]
[12.18]
지금 들으니, 진부와 도암 2개면에서 비도에게 총과 창을 빼앗기고 오히려 본면에 침입했다고 한다. 어찌 이와 같은 민습이 있을 수 있는가?
[傳令 大和面執綱及風憲防守軍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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