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학자료] 임영토비소록 臨瀛討匪小錄

- 자료 임영토비소론

전형민 승인 2021.09.07 21:16 | 최종 수정 2021.09.15 22:46 의견 0

『임영토비소록』 :동학농민혁명종합지식정보시스템

江陵府使로 농민군 토벌을 지휘했던 李會源의 관련기록이다. 『東匪討論』과는 달리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끝부분에 어떤 過客이 ‘見主人抄討匪小錄曰...’이라 기재한 것으로 보아 李會源이 직접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는 儒道의 본질을 천명하고 東學의 異端됨을 설명하였다. 이어 東學軍의 활동상, 李會源의 공로, 民堡軍의 조직 등을 기술하였다. 끝에는 過客과 主人의 問答을 附記하였는데 李會源의 공적을 들어내려는 분위기를 깔고 있다.
이 기록은 1895년 가을에 완성하였는데 『東匪討論』과 내용의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이 原本은 지금 강릉 船橋莊에 소장되어 있다.(李離和)

한창려(韓昌黎)가 말하기를, “공자의 도가 밝지 않아 이단의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밝으면 저것이 쇠하여짐을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태양이 하늘에 있어 만국(萬國)이 밝으면 비록 요마(妖魔)나 호정(狐精)이라도 감히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으니, 그 빛이 가려져 양기(陽氣)가 내려가고 음기(陰氣)가 오르면 온갖 사악한 것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과 같다. 심지어 도깨비불과 반딧불이 오히려 빛나고 썩은 뼈와 썩은 나무들도 빛을 낸다. 설령 밝은 별과 달이 있어도 밝은 아침이나 대낮만 같지 못한데, 더욱이 구름과 흙비로 가려짐에 있어서야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그 요망함을 볼 수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도리어 신령스럽게 생각하여 두려워하거나 받들기도 한다.

아! 평소에 학문하는 노력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가 있다면 마음에서 의(義)와 리(利)를 구분하고, 눈앞에서 사도(邪道)와 정도(正道)를 명료하게 구별하여 참으로 의(義)가 목숨보다 중하고, 예(禮)가 밥보다 중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차라리 정도를 지켜 곤궁하게 죽을지언정 좌도(左道)에 현혹되어 스스로 금수의 지경에 빠지겠는가?

세상의 도가 이미 떨어져서 성인의 학문은 점점 어두워지고, 스승마다 그 가르침이 다르고 사람마다 이론(異論)을 세워 나라에는 하나로 관통하는 가르침이 없고 사람들은 나아갈 방향을 모르게 되니, 한밤중에 어두운 거리를 더듬으며 무턱대고 가는 것과 같다. 누가 몽매한 백성들을 위해 깨우쳐주겠는가? 어린애가 기어서 우물에 들어가니 가련하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흩어진지 오래되었다.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귀결을 살펴보면 우리의 도가 밝지 못한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들이 사설(邪說)에 내몰려져 어리석게 따랐을 뿐이다.

이른바 ‘동학’이라는 것은 어떤 학문인지 알지 못하나 오로지 요망한 술법으로 사람을 속여 재물을 빼앗는 도(道)에 지나지 않는다. 저 계해(癸亥), 1863년간에 최북술(崔北術)이 영남의 경주에서 교를 세우자 영남감영에서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그 후 30년이 지나 비도(匪徒)들이 양호(兩湖)에서 무리를 지어 북술이 남긴 가르침이라고 칭하며 ‘동학’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다시 세웠는데,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칭탁해 부르고, 사람과 재물을 겁탈하여 이익을 탐하였다. 1893년 봄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묘당에서 초유사(招諭使)와 안무사(安撫使) 등을 뽑아서 양호에 보내니, 이에 따라 놀라서 흩어졌을 뿐이었다. 1894(甲午)년 여름에 다시 무리를 모아 전철을 다시 밟았다. 아! 진시황의 채찍은 미치지 못하고 초석(楚石)은 쓸모없는 것이 많아서 마침내 급속하게 양호 영남에까지 두루 퍼져 두려워하거나 거리낌 없이 약탈을 자행하였다.

연달아 관동(關東)에 들어와 처음에는 백성을 꾀어 재물을 취하다가 끝내는 다른 뜻을 가지게 되어 장각(張角)과 황건적(黃巾賊)의 잘못된 계책을 펼치고, 송강(宋江)과 흑선풍(黑旋風)의 못된 짓을 답습하였다. 접소(接所)의 배열은 36방(方)을 다 지키는 듯하고 노략질을 자행하는 것은 108명의 장수와 같았다. 그 무리에 붙으면 매우 흉악한 자라도 종주나 맹주(宗盟)로 떠받드나, 그 명을 어기면 사족과 양민이라도 극악한 형벌을 가하였다.

지난날에 앙심을 품고 몸을 움츠렸던 자가 호응하여 손에 침을 바르고 일어났고, 재산을 보전하려 몸조심을 하는 자는 숨을 죽이고 사지를 떨며 두려워하여 바람을 따라 쓰러지듯 하니 누군들 감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쪽으로부터 오는 소식이 날마다 심해지니, 가까이서 이를 따르는 자는 살아있는 부처를 보듯이 살아갈 방도를 바라고, 멀리서 이를 듣는 자는 야차(夜叉)와 나찰(羅刹)처럼 두려워하였다. 설령 나약한 사람이 큰 마음을 품더라도 이는 바로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서는 꼴이다.

8월 20일쯤에 본읍의 대관령 서쪽 대화면(大和面)을 침범하여 김장수(金長水)의 집을 훼손하고 그 집의 가사와 집기를 탈취한 뒤에 대관령을 넘어 간다고 큰소리쳤다. 이 때 본읍 수령은 비어 있어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고 일은 통솔이 되지 않았으며, 아전과 군교(軍校)들은 간이 오그라들고 촌민들은 입을 다물었다. 한두 사람이 모의하여 도모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무리가 마을에 퍼져있는 것을 알고 보복이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였다. 마을의 아래위 어디에도 전혀 방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지난 날, 본읍의 신리면(新里面) 사람들이 화적을 방비하려는 뜻으로 마을사람들이 의논하여, 본면 가구마다 한사람씩 창검을 가지고 모여서 점고하는 전례처럼 검열하여 동정상구(同井相救)의 뜻을 보였다. 이때 본읍 정동면(丁洞面) 선교(仙橋)의 이 승지(□□)씨가 새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성묘하려고 고향에 왔다가 한양에 가지 못하고 길이 막혀버렸다.

이달 25일에 신리의 거사를 따라 본면의 사람들과 의논하여 운정(雲亭), 선교장안에 있는 정자 앞 공터에서 장정을 검열하였다. 사람마다 창을 한 자루씩 가지고 나오되 창이 없는 사람은 죽창을 가지고 나왔는데, 검열해보니 425자루 뿐이었다. 이 날 이 승지와 감찰(監察)인 정용화(鄭龍和)씨 집에서 점심으로 밥과 고깃국을 마련하였는데, 본면의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서 대접한 것이었다.

이에 영서(嶺西)에 있던 비도들이 큰소리치기를, “강릉의 어떤 부잣집은 우리들을 위해 술을 빚고 소를 잡아 저장하여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선교의 이 아무개는 우리를 해치려고 창검을 점고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이에 대해 해명하기를, “선교에서 창을 검열한 것은 다른 도둑을 방비하려는 것으로 결코 다른 뜻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자기네들을 칠까 혹 의심하기도 했는데, 위협하고 공갈치는 그들의 말들을 모두 기록하기는 어렵다.

호중(湖中)의 내군(內郡)인 제천과 청주 등지의 비도와 영동산골의 영월과 평창의 비도들이 합세하니 1,000명이 되었다. 본읍의 대화면에 들어와 모로치(毛老峙)를 넘어 진부면(珍富面)으로 가서는 노략질이 더욱 심해졌다. 수 십명을 사방으로 보내어 물건을 찾아내게 하였는데, 외진 산골 마을이라도 조금도 모면하지 못하였다. 포와 총 그리고 말은 있는 대로 빼앗았고, 창검과 미투리(麻鞋)도 있는대로 빼앗아 갔고 없으면 돈으로 대신 거두었다. 총 1자루는 10냥, 창 1자루는 2냥, 미투리 1켤레는 5전(戔)으로 호(戶)마다 내는 돈이 3~4냥에 이르렀다. 수많은 돈을 거둬 가지고 가서 도소(都所)에 낸 것은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이른바 예의가 없으면 도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니, 선현의 말씀을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

9월 3일에 대관령을 넘어와 득의양양하게 참새가 날고 이리가 날뛰듯이 무질서하게 와서 구산역(邱山驛)에 묵었다. 이날 밤에 사람을 보내 성산면(城山面) 집강(執綱)을 잡아왔는데, 집강은 바로 금산(琴山) 김양반이었다. 정강이 아래에 커다란 종기를 앓아 거동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수 십명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난입하여 갑자기 병자를 끌어내었다. 가족들이 소리내어 울면서 살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였다. 그 집에서 어쩔 수 없이 교자(轎子)에 태워 매고 구산역에 이르자 바로 덮어 씌우고 곤봉으로 어깨를 난타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 울며 목숨을 구걸하니, 위에 앉은 사람이 말하기를, “너처럼 완악한 놈이 집강이 되어 이번 우리 행차에 와서 기다리지 않은 것은 바로 양반의 기세인가? 그 죄가 죽음에 해당된다”라고 하였다. 인사불성이 되어서야 끌어내었다. 약으로 치료하여 겨우 회복되었는데, 다행히 나이가 적고 몸이 강건한 까닭이었다. 의지할 곳 없고 불쌍한 백성들의 처지가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9월 4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경에 읍에 들어오는데,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탄 자가 수 십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걸어서 뒤를 따랐다. 길게 늘어져서 모이고 흩어지는데 통솔이 되지 않았고 존비(尊卑)도 없었다. 반은 대낮에 우비를 입었고, 검은 때가 묻은 파의(破衣)를 걸쳤으며, 수백 대(隊)의 귀신 얼굴을 한 병사들은 도읍을 통과해 시장에 가는 백성들처럼 보였다. 13자(字)천주주문(天主呪文) 은 상가집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곡소리처럼 들렸다.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깜박이며 웃으면서 귓속말을 하는 비루한 모습들을 모두 적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세력은 대단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그것에 눌리어 따랐다. 이에 마을에서 항산(恒産)이 없는 무뢰배들은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 하고, 지각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징험할 수 있는 신비한 술법이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양반에게 눌린 분노가 있어도 지체가 낮아 펴지 못한 자나 남의 재물을 빼앗을 마음이 있으나 재주가 모자라서 빼앗기 어려운 자도 스스로 운수가 형통하리라 말하며 다투어 지름길을 찾아 몰려들었다.

아! 앞에서 “백성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다”라고 말한 것이 그릇된 것인가? 며칠이 지난다면 사방의 백성들이 서로 이끌어서 그것에 감염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 예전에 성현이 말하기를, “이단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라고 했는데, 지금 더욱 그것을 징험할 수가 있다. 대개 사람의 정리가 이익을 따르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아서 인의(仁義)로 이끌고 예법(禮法)으로 막지 않는다면 그 범람하는 물결을 누가 막고 돌려서 아래로 흘러가는 본성으로 나아가게 하겠는가?

지난날, 작청(作廳)의 아전들이 마을마다 요호(饒戶)에게서 쌀과 돈을 거두어 이 날 여러 점막(店幕)에 비용으로 나누어주었다. 한사람마다 1끼에 1되씩을 주어 먹이게 하였다. 먼저 온 자 수백 명이 작청에 들어가니 아전들이 술과 쇠고기를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대접하였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 경방(庚方)의 도사(都事) 최윤정(崔允鼎)의 집에 가니 그 집에서 점심으로 술과 밥을 대접하였는데, 그 수가 모두 1,000여 명이 되었다. 그 날 저녁부터 각 점막을 나누어 거처하였고, 삼경(三更)에 이르자 비도 수 백명이 구산역에서 내려와 길가의 촌민을 위협하여 횃불을 들어 비추게 하였다. 그 횃불이 성을 이뤄 몇 리에 걸쳤고, 그 후부터 밤마다 이처럼 하였다.

구산역에서 경방까지 길가의 10여 리의 촌민이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면서 분주히 그들을 전송하여 그 괴로움을 이루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알아보니, 점막에 나누어 거처한 무리들이 매번 어두워졌을 때 삼삼오오 대오를 지어 언덕가로 갔다가 다음 날 아침 밥먹을때 왔는데 그 숫자가 여전하여 더하거나 줄지가 않았다. 이것은 돌아가며 왕래해서 그 위세를 과장하려는 것이었다. 점주(店主) 모두 그것을 보아서 알고 있었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아아, 촌민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고 어린애 장난 같은 이런 술수를 행하니 놀랍고도 가소롭다.

9월 5일에 읍의 동문에 방을 내걸었는데, 삼정(三政)의 폐단을 개혁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한다고 하였다. 옛날부터 난을 일으킨 자들 중에 어찌 그렇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또한 엄연히 묘당(廟堂)과 영읍(營邑)의 일을 행하려고 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진사 박재호(朴在浩)는 본래 강릉사람인데, 지금 평창에 거주하다가 스스로 비도들의 괴수가 되었다. 앞서 와서 요호들을 두루 찾아가서 협박하거나 회유하여 몰래 돈과 재물을 토색질하였다. 대화 사람 김상오(金尙五)는 스스로 ‘접장’이라고 칭하고 비도들과 함께 와서 제멋대로 패(牌)를 발령하여 도(道)를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사족들을 잡아들였다. 또 상좌(上座)를 핑계대고 거짓으로 둘 사이를 거간질 한다고 하여 강제로 받아낸 전표(錢標)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패(牌)를 가지고 심부름나간 비도는 다시 족채(足債)를 강제로 거두어 많게는 100여 민(緡)이나 되었고 적게라도 40~50민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지난 날, 사탕을 파는 최가(崔哥)가 옥가(玉街)에 살고 있었는데, 비도들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먼저 가서 맞이해서는 자신의 집에 접(接)을 마련하니, 2~3일 사이에 모여 강(講)한 자가 무려 300명이 되었다. 비도들을 토벌하는 날 밤에 군인들이 그 집을 부수었다.

9월 6일 날에 비도들이 말하기를, “내일 선교(船橋)에 들어가겠다”라고 하여 위험이 눈앞에 있게 되었다. 읍의 아전인 정시중(鄭始中)과 최희민(崔凞民) 등은 본래 선교에서 신임하는 아전이었다. 종종 선교를 왕래하며 고을의 소식과 비도들의 동정을 알려왔다. 이날에 정(鄭)과 최(崔) 두 아전이 은밀히 선교에 통보하기를, “오늘 밤 닭이 운 뒤에 읍인(邑人)과 최도사(崔都事)가 은밀히 비도들을 토벌하는 논의를 이미 끝냈고, 정동면도 한밤중에 북문 안 군기고 앞에 와서 호응하기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승지가 바로 사람을 각 마을에 보내어 이런 뜻을 은밀히 알리는 한편, 사람들로 하여금 쌀 100말과 돈 300민(緡)을 가지고 가게 하여 비도들을 위해 점심과 저녁밥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선교에 들어오는 것을 늦추려는 계획이었다. 그날 밤에 5~6개의 부근마을에서 몰래 군정(軍丁)을 모아 배부르게 먹이고 단단히 채비하여 말하기를, “북문 안에 들어가지 말고, 읍후(邑後)에 가서 일어날 때를 기다리다가 읍내에서 나는 신호를 듣고 일제히 일어나라. 만약 읍에 신호가 없으면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훈계하였다. 과연 모든 군사들이 가서 일어날 때를 기다렸고, 읍내에서도 조용히 여러 시간을 기다렸는데, 동쪽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니 모든 군사가 놀라서 흩어져 각각 제 집으로 돌아갔다.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어지럽고 두려워하였다. 다행히도 큰 비가 계속되어 비도들이 모두 처소에 머무르고 또한 길에 행인이 끊겨서 대오를 아는 자가 없었다.

아침에 이승지가 비를 무릅쓰고 사람을 보내 최아전을 책망하고 사정을 따지니, 최아전이 최도사(崔都事)와 주고받은 서찰을 첨부하여 보낸 글에서 말하기를, “어젯밤 저에게 사람이 없어서 거동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모두들 비가 지금 그치지 않은 것은 곧 하늘이 돌보아주신 행운이라고 합니다. 비가 멈추면 반드시 거사할 것입니다. 이미 고무되었는데 어찌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바로 사람을 옥가(玉街) 길의 남쪽에 보내어 권씨와 여러 무리들을 보고, 그 돌아가는 형편을 이야기하였다.

권수동(權秀東)이 말하기를, “일이 다급해졌습니다. 오늘 다행히 비가 왔으나, 내일이 되면 도로의 점막에서 그것을 보고 아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가서 말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밤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남쪽으로 길을 잡고 아전들에게 비밀리에 알려서 초저녁에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나 각자 단봉(短棒)을 들고 동문에 난입하였다. 각 점막에 있던 비도들은 함성을 듣고 많이 도주하였고, 각 관아에 있던 비도들 중에는 도망가거나 부상을 당한 자들이 있었다. 어두운 밤에 난타를 당하여 죽은 자가 많았다. 정동면은 조금 멀고 어두운 밤에 함성을 지르는 것이 약속보다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함성을 듣고서야 일제히 달려갔더니 일이 이미 절반이 이루어졌었다. 이때에 비는 개이지 않아, 빗방울이 오락가락하였으며 달은 지고, 별은 어두워 상황이 참담하였다. 동남문 밖과 각 관아의 문 앞에는 시체가 이미 땅에 널려 있었다. 당일 밤에 죽은 자가 모두 100여 명이라고 말했는데, 다음날 아침에는 20~30여 명이라고 하니, 밤새 많이 살아서 가버린 것인지 많이 죽은 것을 읍인들이 놀라서 숨긴 것인지 모르겠다.

9월 8일 새벽에 어떤 사람이 비도 수천명이 창과 포를 가지고 대관령을 넘어 다시 온다는 헛소문을 전하니, 읍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고 지고 서로를 부축하며 외진 마을로 흩어졌다. 이를 금지했으나 그치지 않았는데, 며칠이 지나서야 진정되었다.

아전들과 약간의 백성들이 부사청(府司廳)에 모여 공형(公兄)의 글을 삼척 수령에게 보내어 감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마을에 통문을 보내어 11일에 모두 모여서 일을 논의하자고 하였다.

이때에 마을의 군정은 모두 수 백명이 되었는데, 해가 다섯 길이나 되었어도 아침을 먹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잘못 말하기를, “경방(庚方) 최도사 집에서 아침 밥을 준비하였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몰려 갔더니, 최씨 집은 전혀 사정을 알지 못하고 놀라서 연유를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침을 먹으려고 왔다”라고 하니, 주인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먼저 통보도 없이 갑자기 아침 밥을 찾는데, 내 집이 주막인가”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난입하여 창과 문을 부수고 주인을 밀치니 누가 그만두게 할 수 있었겠는가? 주인이 사과를 한 뒤에야 해산하였다.

이에 군정들이 전 좌수(前座首) 김상연(金商淵)을 추대하여 중군장으로 삼았는데, 갑옷을 입고 말에 타서 큰소리로, “비도들을 물리치려 금산평(琴山坪)으로 가겠다”라고 호언하였다. 금산의 진사 김상경(金尙卿)의 집에서 밥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가다가 회산(淮山)을 지날 때에 심씨 집안에서 갑자기 밥을 마련하기 어려워 읍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고, 밥을 지어 보낸 것이 모두 70~80말이나 되었다.

이날 최도사가 읍에 들어가 부사청에 갔더니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아 사람을 선교 이승지에게 보내어 읍의 일을 함께 의논하자고 요청하였다. 승지가 순순히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지금 부사가 빈 상황에서 누가 명령을 내고 관장(官長)의 일을 하겠는가? 비도들도 토벌하여 내쫓아서 마을이 전처럼 편안해졌는데, 달리 무슨 일이 있겠는가? 만약 시행하는 대책이 마땅하지 않으면 민심이 도리어 동요하니 나는 가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여러번 간청하여 어쩔 수 없이 오후에 읍에 가서 최도사를 보고나서 이교(吏校)들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영동의 농사일이 지금 한창이어서 마을사람들을 여러 날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또한 군졸들이 창을 들고 포를 메어 동서로 달려가는 것을 백성들이 보고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으니 바로 각 마을의 민졸(民卒)들을 돌려보내라. 영서지역은 겁을 떨쳐버리지 못한 평민과 죄를 지어 의구심을 풀지 못한 자가 있다. 건장한 이교 30~40명을 뽑아서 비도들의 잔당들을 몰아내려 대관령을 넘어서 왔다고 말한다.

면민(面民)들을 안무(安撫)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죄가 있고 없고를 다시 묻지 않고 모두 돌려보낸다면 죄를 지은 자는 의구심을 저절로 풀 것이고, 겁을 먹은 평민도 안정될 것이다. 영동은 마을마다 옛 규약을 정비하여 마을마다 각기 사는 곳을 보호하며, 한 곳에 경고가 있으면 즉시 모이도록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안으로는 내부의 변고가 없고, 밖으로는 넘겨다보는 변고가 없어 백성들은 저절로 안심하고 읍도 무사할 것이니, 함부로 조치를 취하여 도리어 민심을 동요시켜서는 아니된다”라고 하였다. 읍인들이 말하기를, “저 바깥 마을이 각각 그 거처를 보호하고 있다가 읍에 갑자기 변고가 생기면 어찌하겠습니까? 종종 점고하여 시위하고 방비해서 저들의 간담을 먼저 서늘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승지가 말하기를, “여러 차례 점고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반드시 그만 둘 수가 없다면 한번 점고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돈 300냥을 내어 수직(守直)하는 읍인들을 대접할 생각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최도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가 그것을 계속 받들 수 있는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즉시 군민(軍民)을 해산하여 보내고, 내일 아침식사 후에 일제히 모여 점고하기를 약속하였다. 바로 일어나 돌아갔는데, 이미 밤이 되어 어두워졌다.

9월 9일에 정동면민(丁洞面民) 수 백명이 읍에 왔으나, 다른 마을에서는 한사람도 오지 않았다. 다만 읍내의 군정들과 더불어 점고 흉내만 내고 돌아갔다.

9월 11일에 각 마을의 대민(大民)들이 객관(客館)의 동쪽 대청에 모두 모였는데, 아전들이 동비(東匪)에게 음식을 제공한 기록을 올려서 보았더니 전부 700냥이 넘었다. 각 요호에게 배당하려고 의논을 모았으나 이승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의견이 분분하여 일정한 결말을 내리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흩어졌다.

9월 15일에 각 요호들이 향사당(鄕射堂)에 모였으나 이승지는 오지 않았다. 선교와 내곡(萊谷) 두 집은 계산하지 않고, 그 나머지의 요호들이 많게는 120냥에서부터 적게는 25냥까지 60여 집안에 분배하여 돈을 모으니 모두 2,000냥이 넘었다. 600냥은 군기를 보수하는 비용으로, 700여 냥은 비도들의 음식을 접대한 비용으로 내주고, 나머지는 점고할 때에 군정들의 요기비용으로 한다고 하였다.

9월 22일에 각 마을의 군정들이 동문 밖 사대(射臺) 앞에서 크게 점고를 했는데, 먼 곳의 4개 면을 제외하고 나머지 11면의 군정들이 모두 수 천명이 되었다. 향중(鄕中)에서 출신(出身) 이진석(李震錫)을 추천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 삼고 사대 앞에 의막(依幕)을 설치하였다. 읍내의 군정들이 유산(幼山)의 조검서(曺檢書)가 요호전(饒戶錢)을 기꺼이 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빌미삼아, 읍의 군정 수 백명이 유산의 검서 조헌승(曺憲承)의 집에 가서 크게 난리를 쳤다.

그 때에 조검서는 상(喪)중이어서 여막을 지키고 있었는데, 군정들이 조검서를 끌어내어 둘러싸서 중군 앞에 데려왔다. 읍 밖의 마을사람들이 실색하고 낙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모의 상사(喪事)로 풀어주기를 요청하여 집에 돌아갔다. 그날 밤에 읍의 100여 명이 다시 금산의 김진사 집에 가서 요호전을 거두겠다며 소란을 피우니, 그 집에서는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밤에 여기저기에서 돈을 꾸어 80냥을 마련하여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회산의 장의(掌議) 심진팔(沈鎭八)의 집에서 소란을 피우고 돌아갔다.

10월 1일에 읍내 6개 동과 부근의 몇개 동, 모두 8~9개 동민이 좌수(座首)를 대장으로 삼아 스스로 점고하였다. 객관에서 신동문(新東門)으로 내려가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옥가로 갔다. 남쪽으로 길을 잡아 다시 장승가(長承街)에 이르러 북쪽 길을 따라 읍의 구동문(舊東門)으로 들어갔다. 대포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물고기가 꿰인 것처럼 걸어가는 자가 몇 리에 걸쳐 이어지니 민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날 초저녁에 경사(京司)에서 삼현령(三懸鈴)으로 공문을 보내와, 특별히 전 승지 이□□(李□□)을 강릉부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읍과 촌민들 모두가 임금의 은혜에 감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구덩이에 빠져 줄을 던져 구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았던 민심이 한순간에 반석(盤石)과 태산(泰山)의 위보다 편안해졌다. 이를테면 겨울이 지난 뒤에 따뜻한 봄이 다시 숨 쉬는 것과 같으니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지난 날, 내면(內面)에 있는 비도들의 괴수 차기석(車箕錫)이 스스로 득도했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회유하니 그 무리가 1,000여 명이 되었다. 전하는 말에, “자신들과 호비(湖匪), 호남과 호서의 동학도는 같지 않고 다만 학업을 하며 의롭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한갓 그들 무리를 보호하려는 말로 참으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면은 오대산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멀고 산과 계곡이 험준하여 가서 토벌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현저하게 나쁜 행적이 없어 잠시 그대로 두었으나 식자(識者)들은 그것을 걱정하였다.

9월 그믐쯤에 군사를 모아 난리를 일으켜서 창고를 불사르고 인민을 위협하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집을 태우고 사람을 죽였다. 또한 포목(布木)·해산물·가축 등의 상인들을 회유하여 그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죽여서 태워버렸다. 산골짜기 길의 행상 중에 죽은 자가 수 백명이었으나 길이 끊겨서 영동에서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봉평면(蓬坪面)도 읍의 관아와 떨어져 있었다.

내면 근처에 거주하는 윤태열(尹泰烈)·정창해(丁昌海)·조원중(趙元中)·정운심(鄭雲心) 등은 본래 무뢰배들인데, 교활하게 차적(車賊), 차기석을 빙자하여 마을사람들을 속이고 군사들을 모았으며 창고 옆에 목채를 세우고 강제로 각 마을에 명령을 내려, 호(戶)마다 속미(粟米) 6말, 미투리 한 켤레씩을 빠짐없이 거두었다. 또한, 소를 빼앗아 날마다 여러 마리를 잡으니 고기와 포(脯)가 산과 숲을 이룰 정도였다. 기꺼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바로 죽였다. 이에 완악한 무리들이 모두 일어나 한 패가 되었다. 진부면 안영달(安永達)·김성칠(金成七) 등도 거기에 가담하였다. 김상연은 진부면 두일촌(斗逸村)에 살았는데, 어느 날 밤에 잡혀가서 4부자(父子)가 함께 구덩이 안에서 죽었다. 지난 날에 잠시 중군을 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행상과 부고(負賈), 보부상들이 모두 불 속의 귀신이 되었고, 요호와 양민이 솥 안의 물고기로 절로 나뉘어졌다.

오대산이 10년 동안 적의 소굴이 된다는 정감록의 말을 누가 허무맹랑하다고 했는가? 두개의 면≪내면과 봉평면≫은 100리가 되는 산골짜기인데 곧 양산박(梁山泊)과 같은 소굴이 되었다. 대화면에 잠복한 비도들이 그 형세에 의지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살펴보았고, 약탈을 당한 진부의 면민들은 이고지고 가며 그들의 동정을 듣고 죽이고 빼앗는 것을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난번에 단양과 청주의 비도들도 이와 같지 않았는데, 누가 강량(强梁)보다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옛날 녹림(綠林) 무리들도 이와 같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 하늘이 알고 있으니 어찌 천벌을 피하겠는가? 죄 없는 백성들이 공공연히 죽음을 당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다.

10월 보름쯤에 봉평의 주민들이 새로 수령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는 몰래 와서 글을 올렸는데, 동비들의 전말을 구체적으로 아뢰었다. 본 수령이 바로 교졸(校卒) 몇 명을 보내어 염탐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보고내용에, “비도들이 조만간에 진부와 도남(都南)을 가로막고 죽이겠다고 말하여 두 곳 면민들이 놀라고 낙담하여 활에 다친 새가 활의 그림자에 겁을 먹은 것과 같았습니다. 학의 울음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고 귀박(鬼朴)이 다시 온 것에 혼백을 빼앗겼으니, 단공(檀公)같은 최상의 계책을 세워도 영서의 여러 면들이 조만간에 황폐해질텐데 영동만이 어찌 홀로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들의 말이 모두 한결같았다. 이에 읍내가 흉흉해져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영서는 지키기 어려우니 고갯길을 튼튼히 지켜 영동을 보호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거나,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읍 밖 마을 군정들을 징발하고 요호들에게 돈과 곡식을 분배하고, 고갯길마다 막아서 그 결말을 살피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태수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 백성이 아닌 자가 없다. 영서의 6개 면은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애와 같은데, 내가 돌보지 않고 차마 사지(死地)에 던져두겠는가? 영동은 난리를 새로 겪어 민심이 모두 흩어지려하는데, 다시 군사를 모집하고 곡식을 거둔다면 반드시 민심이 크게 동요를 할 것이니 어찌 차마 그것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0월 22일에 읍내의 작대군(作隊軍)을 징발하니 100여 명이 되었다. 다시 보부상 100여 명을 선발하여 좌사(左司)와 우사(右司)로 삼고, 또한 각지의 포수 100여 명을 모집하여 중군장 이진석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전 감찰 이영찬(李永璨)과 부이방(副吏房) 박인필(朴寅弼)이 보좌하였다. 구산(邱山)으로 보낼 때에 훈계하기를, “나는 이미 늙어서 군대에 종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 구해주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들의 부모라고 하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이런 뜻을 명심하여 가서 백성들을 침범하지 말고 그 괴수를 베어,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에만 뜻을 두어라. 저 비도들이 다만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기만 하니 반드시 장구한 계책이 없는 것 같고, 대군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놀라서 흩어질 것이다. 그들을 잡아들일 때에 옥석이 함께 불타버리는 탄식[玉石俱焚之歎]이 있을까 걱정이 되니 신중하게 살피도록 하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이 도적들의 본래 모습이니 철저히 소굴을 타파하여 훗날의 염려가 없도록 하라. 소용되는 군수는 내가 창고에서 낼 터이니 조금도 백성에게서 거두지 말라”라고 하였다. 같은 날에 구산역에서 묵었고 날마다 수 십리를 행군하였다.

10월 25일에 진부역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다. 봉평 면민 강위서(姜渭瑞)는 본래 의기(義氣)가 많고 포(砲)를 잘 쏘았는데, 비도들의 불의에 분개하여 몰래 여러 사람들과 모의하였다. 은밀히 사람을 본진(本陣)에 보내어 말하기를, “군대가 들어오면 우리가 내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중의 사람들이 의심스러워 결정하지 못하고 박동의(朴東儀)에게 청하여 점을 쳐보았더니 길하였다.

10월 26일에 바로 진군하여 봉평의 창촌(倉村)에 들어갔더니 정말로 적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고, 단지 빈 목채(木寨)만 있어 마침내 창촌에 주둔하였다. 이 날 강위서가 윤태열 등 7명을 사로잡아 진영 앞에 포박하여 데리고 와서 심문을 한 뒤에 바로 목을 베거나 총살하였다. 그래서 강위서를 대장으로 삼아 본면의 군정과 포군(砲軍)을 통솔하여 내면에 가서 비도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관군은 다음 날에 바로 출병하여 진부역에 다시 주둔하고 장차 대화면으로 가려고 하였다. 마침 원주(原州) 중군(中軍)과 소모관(召募官) 정준시(鄭俊時) 등이 일본군과 함께 대화에 도착하였다. 강릉 중군 이진석과 박동의와 상의하여 그 포병을 숨기고 다만 창을 든 약간의 병졸만을 데리고 원진(原陣)에 갔는데, “포군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기에, “모두 내면에 비도들을 토벌하러 보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창을 든 이런 병졸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두 돌아왔다.

이때에 영월과 평창의 비도들이 제천과 청주 등지의 비도들과 합하여 1,000명이 정선군에 몰려갔다. 그 때가 10월 20일쯤인데, 군수가 한양으로 도망쳤다. 비도들이 이방의 목을 자르고 평민들을 약탈하며 널리 말하기를, “강릉에 가서 9월의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정선군 여량(餘粮) 등지의 비도들의 괴수인 지왈길(池曰吉)·이중집(李仲集) 등이 위세를 믿고 난리를 일으켜서 강릉 임계(臨溪) 등지의 부유한 자들을 잡아가서 재물을 빼앗았다. 따르지 않으면 형벌을 가하니 이에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면임(面任)들이 연달아 첩보하여 말하기를, “지금 병사를 징발하여 막지 않으면 임계 등지는 빈 땅이 되고 읍내가 흉흉하고 두려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순무영(巡撫營)에서 강릉부사 이□□를 묘당에다 관동소모사(關東召募使)로 특별히 추천하여 군사를 일으켜 비도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10월 1일에 첩문(帖文)이 내려왔다. 이에 소모사가 각 마을의 요호와 대성(大姓)에게 명령을 내려 건장한 종 10명씩을 뽑게 하였는데, 응모한 숫자가 100여 명이 되었다. 다시 각 진민(津民), 뱃사공과 역졸들을 뽑고, 별선군관(別選軍官)을 정하니 그 수효가 수 백명이 되었다. 진부에서 박인필을 불러들여 전 좌수 최□□(崔□□) 함께 통솔하여 구산역에 보냈는데, 봉평의 군사를 보내는 것처럼 하였다. 이 날 저녁에 이진석이 대화에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다시 임계로 보내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임계면에 7~8일간 주둔했다가 출병하여 정선군 여량마을을 공략하여 그 접소(接所)와 비괴(匪魁)들의 집을 불태웠다. 그 때에 원주의 중군과 일본군이 평창의 비도들을 격파하고 100여 명을 포살(砲殺)하였다. 정선에 있던 비도들이 이를 듣고 그 예봉(銳鋒)을 피하려고 동쪽 강릉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강릉의 군사가 여량을 불태우고 올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정선의 군민들이 와서 그 연유를 아뢰고 군대를 물릴 것을 청하였다. 이진석 등이 드디어 군대를 돌리고 이중집 등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10월 19일에 읍에 돌아오니 소모사가 남문 밖까지 나와서 맞이하여 군사들에게 음식을 크게 대접하고 상을 주었으며, 정조(正租) 100석을 읍군(邑軍)에게 나누어 주었다.

11월 6일에 봉평 대장 강위서 등이 군정을 이끌고 내면에 출병하여 1리(里) 창고에서 묵었다. 차기석·정운심 등이 밤을 이용하여 진채(陣寨)를 공격하니 강위서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부상자 몇 명이 소모영(召募營)에 수본(手本)을 올리며 말하기를, “비도 수 천명이 몰려왔는데, 본 읍의 군대는 수 백명에 지나지 않아서 상대할 수가 없으니 군사를 증파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모사가 박동의를 소모영 종사관으로 삼아 진부면의 군정을 인솔하여 강위서에게 가서 돕게 하였다. 또한 강위서를 종사관으로 올려 기한을 정하여 비도들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지난 날 양양부(襄陽府)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을 모집하게 하였다. 양양부의 사족 이석범(李錫範)은 작고한 승지 휘진(暉晋)의 후손으로 사람됨이 과감하고 절개를 숭상하였다. 지난 10월 초에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경내에 숨어있는 비도들을 토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모사의 명령을 듣고 동생인 국범(國範)과 동향의 사족 최주하(崔舟河) 김준태(金儁泰) 등과 함께 포병 100여 명을 인솔하여 왔다. 소모사가 크게 기뻐하고 바로 이석범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내면에 파견하여 강위서·박동의 등과 함께 합세하여 비도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다시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과 부종사관인 김익제(金翼濟) 등을 양양에 돌려보내어 나머지 병사들을 규합하게 하였다.

이들에게 명령하여 내면 동북쪽의 길로 나와서 불시에 강위서·이석범 등과 동서에서 협공하게 하여 비도들이 앞뒤에서 서로 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등 일일이 그 계략을 주어서 보내었다. 이에 강위서는 보래령(甫來嶺)을 넘어서 들어와 홍천 의병인 허경(許坰)과 합세하여 자운포(自雲包)를 바로 공략하였다. 이석범은 박동의와 합세하여 운두령(雲頭嶺)을 넘어 들어와 바로 청두리(靑頭里)로 진격하였고, 이국범은 신배령(新排嶺)을 넘어 들어왔다. 김익제는 응봉령(鷹峰嶺)을 넘어서 들어왔다. 사방의 길에서 협공하니 포 소리가 땅을 울렸고, 연기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비도들이 놀라서 궤멸하였다.

강위서 등은 접주(接主)인 위승국(魏承國)과 접사(接司)인 심성숙(沈成淑) 등 7명을 포살하였고, 이석범 등은 오덕현(吳德玄)과 홍천의 비괴인 권성오(權成五) 등 5명을 포살하였다. 여러 군사가 약수포(藥水包)를 돌아 들어가서 차기석을 생포하였고, 김치실(金致實) 등 3명을 포살하였다. 또한, 거괴(巨魁) 박학조(朴學祚)를 사로잡았고, 그 나머지 손응선(孫應先) 등 70여 명은 개고기를 먹이고 잘 타일러서 풀어주었다. 3리(里) 흥정(興亭) 등으로 방향을 바꿔 적의 괴수 임정호(林正浩) 등 30명을 포살하고, 붙잡힌 수 백명의 무리들은 잘 타일러서 풀어주었다.

11월 22일에 내면의 군사가 돌아와서 차기석과 박학조를 면박(面縛)하여 소모영에 바쳤다. 소모사가 사대(射臺)앞에 교장(敎場)을 열어 두 놈의 목을 베고, 여량의 괴적인 이중집 등 7명을 포살하였다. 차(車)·박(朴) 두 놈의 머리를 원주(原州)순무영(巡撫營) 에 담아 보내었다. 다음날 여량의 주민들이 괴적 지왈길을 사로잡아 바치기에 바로 목을 베었다. 그래서 관동일대의 동비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어떤 객(客)이 돈천재(沌泉齋)를 지나다 주인이 쓴 토비소록(討匪小錄)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실록입니다. 지난날에 강릉의 운수가 형통하고 태평했고 강릉주민의 명(命)도 길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의 모두 고기밥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인이 쳐다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공자는 명(命)을 말한 적이 드문데, 그대는 인사(人事)의 마땅한 바에 대해 말하지 않고 먼저 명(命)이 형통하고 길함을 말씀하시니 어찌 그 사리를 아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나는 그렇게 된 사리는 알지 못하나 눈으로 본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비도들이 한창 극성일 때에 하루 이틀을 늦추고 토벌하지 않았다면, 강릉을 둘러싼 100리 안이 모두 금수의 땅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늘이 길운(吉運)을 빌려주어 기세를 타서 토벌하여 마침내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놀라게 하여 모두 본읍을 절의의 고향으로 우러러보게 하였습니다.

곳곳마다 의병이 바람을 따라 일제히 일어나서 마침내 동비들을 남겨 두지 않았는데, 마치 박랑사(博浪沙)에서 한번 철퇴를 휘둘러 천하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나 진(秦)을 망하게 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 명(命)이 아니겠습니까? 비도를 토벌한 뒤에 읍촌이 서로 원망하고 두려워하여 거의 변란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강명(剛明)한 우리 태수께서 위력과 은혜로 진무(鎭撫)하여 모두 편안하게 했으니 이것도 명(命)이 아닙니까? 내면의 차적(車賊)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에 영서의 주민은 새롭게 노략질을 당한 뒤라서 모두 새나 짐승처럼 놀라 흩어지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영동 사람들은 이미 심한 괴로움을 겪어서 이때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걱정이 더한 때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월척(越瘠)처럼 보고는 가서 구제하지 않았다면 영서의 주민들이 대나무가 쪼개지고 하천이 터지는 것처럼 되는 것은 머지않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조급하여 군사를 징발하고 백성들에게 거두었다면 영동 주민들이 흙이나 기와처럼 무너지는 것은 필연의 일이었습니다. 어질고 밝은 태수께서 도리에 맞게 지휘하고 마땅하게 조치하여 10,000냥에 가까운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고 1,000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마련하는데, 요호에게서 조금도 거두지 않고 평민에게서도 터럭 하나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한번 북을 치고 나아가 적의 소굴을 깨뜨렸으니 이것도 명(命)이 아니겠습니다? 그 후에 정선의 비도들이 다시 동쪽으로 내려오기를 도모할 때에, 일본군이 서쪽에서 평창을 압박하여 궁박한 비도들의 형세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동쪽으로 내려오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고개를 넘었다면 실제로 격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만약 토벌하여 흩어졌다면 일본군이 동쪽으로 오는 형세를 모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동의 주민들이 어떻게 안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미리 일의 형세를 헤아려 군사를 파견하여 막고 남들보다 앞서 인력을 빼앗으니 적의 간담이 놀라서 하룻밤 사이에 도망하여 흩어졌습니다. 영동사람으로 하여금 밭을 갈고 시장가는 것을 변함없이 하고 지금까지 편안하고 즐겁게 사는 것은 어찌 명(命)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그대가 태수의 공(功)과 덕(德)을 먼저 말하고 그 마지막에 바로 명(命)에 맡기면서 태수의 은혜를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명은 미묘한 하늘의 이치로 길한 천명이 있더라도 인사(人事)가 미치지 못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천명을 어겼으나 인사에 정성을 쌓으면 도리어 흉이 바뀌어 길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늘의 상도(常道)입니다. 그래서 정자(程子)는 ‘사람이 최상의 수명을 다하고, 국가의 명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바라는 것은 공부가 그 안에 도달해야만 이런 효과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의 성패는 다분히 인도(人道)가 선한지 아닌지에 달려있습니다.

지난 번에 동비들이 동쪽으로 온다는 말에 모든 마을 사람들이 두렵거나 사모하는 마음이 들어 토벌하여 내쫓자는 말이 전혀 없었고, 도리어 심복을 몰래 보내어 그들이 오는 것을 안내하고 아첨하여 화를 모면하려는 자도 있었습니다. 내가 수령의 지팡이를 잡고서 혼자 마음 속으로 계책을 세워 먼저 문 앞에서 창과 칼을 점검하고 비밀리에 친분이 있는 아전에게 방략을 주었습니다. 그 신묘한 계획으로 그들이 알거나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번개처럼 공격하여 적도(賊徒)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에도 듣거나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소위 이것이 잠자리 위에서 사람의 일을 지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들판에서 짐승을 쫓아 잡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에 ‘천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나 사람이 하는 일이 없으면 하늘이 어찌 신병(神兵)을 내려 토벌하겠습니까? 하릴 없이 놀라서 꾸는 꿈(噩夢)으로 그들을 누르겠습니까? 남에게 은혜를 입고 보답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오히려 사람답지 않다고 하는데, 하물며 잊어버리는 것에 있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기기(器欹)를 바로 잡았으나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니 장익주(張益州)에 부끄럽지 않고, 편안을 조처했으나 자랑하지 않았으니 한위공(韓魏公)에 견줄 수가 있습니다.

강릉 사람들이 실을 사서 평원군(平原君)의 얼굴을 수놓고, 화사(畵師)가 넉넉히 두어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그대가 천명을 말하니 사람이 어찌 거기에 간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주(神州), 중국본토가 적에게 점령되어 100년 동안 비게 된 것은 왕이보(王夷甫)의 잘못이 아닙니까? 성인의 학문이 다시 밝아져서 당세에 빛난 것은 바로 주렴계(周濂溪)의 공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나는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려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믿기에 부족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믿지 못하겠습니까? 사람의 수명은 바로 하늘에서 받은 기(氣)가 많고 적은 차이에 있고, 받은 기를 모두 쓰고 죽는 것이 바로 정해진 운명입니다. 조심하지 않아 생(生)을 해쳐서 일찍 죽고, 죄를 지어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이 어찌 명(命)이겠습니까? 부귀에 합당하면서 부귀한 자가 명인데, 부당한 부귀를 분수에 맞지 않게 함부로 바라는 것이 어찌 명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이치가 시(詩)·서(書)·예(禮), 예기·역(易), 주역에 실려 있으니 그대는 돌아가서 그것을 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객이 일어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지금 지극한 말씀을 들으니 마치 저의 어리석음을 환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대가 아니라면 사람답지 못하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갔다. 따라서 문답한 말을 모아서 그 뒤에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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