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심스테파노의 길과 계촌리 '굴아우' 이야기

- 정원대 향토사학자의 순교자 심능석과 이유일의 역사복원기

전형민 승인 2021.09.19 12:49 | 최종 수정 2021.09.21 19:55 의견 0

강릉에는 강릉바우길이라는 400Km에 달하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해안과 산악 지역 모두를 아우르는 트레킹코스라 인기가 많다. 그 코스중에 제 10번째가 이름이 ‘심스테파노의 길’이다. 최근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 사람들은 이 마을에 살았다고 알려진 순교자를 위해, 그의 삶과 신앙을 추모하여 걷는다고 한다.

강릉바우길 홈페이지에 심스테파노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해안과 새롭게 찾아낸 『심스테파노의 길』

우리나라 전국 어디를 가나 조선시대 말의 천주교 성지가 있습니다.

강릉바우길 홈페이지에 있는 심스테파노의 길 사진


그러나 강원도 원주와 횡성 동쪽에 성지와 성지길이 없었던 것은 태백산맥 동쪽으로 천주교의 전파가 그 만큼 더뎠다는 뜻입니다.

조선 말 병인교난(1866-1878년) 때 심스테파노라는 천주학자가 강릉 골아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방관아의 포졸들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서울에서 직접 내려온 포도청 포졸들에게 잡혀가 목숨을 잃은 기록과 마을을 찾아냈습니다.

심스테파노의 본명과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곳에서 믿음 깊은 한 신자가 자신의 기둥 같은 믿음 아래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명주군 왕릉에서 그 곳까지 이르는 길을 심스테파노의 길로 이름 지었습니다.”

심능석(沈能錫,스테파노)은 1868년 강릉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천주교 신자이다. 심능석이 살던 곳에서 이유일(李惟一,안토니오)도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 두명의 순교자에 대한 기록은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을 기록하여 만들고 서울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병인치명사적』과 187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하여 르 장드리(Le Gendre, 최창근) 신부가 정리하여 1895년 간행된 『치명일기』 등의 천주교계의 기록과 포도청에서 처리한 사건을 기록한 『좌포도청등록』 등에 남아있다.

이 들 기록을 중심으로 두 순교자와 강원도의 정착과정 및 체포기록을 정리해본다.

1862년에 천주교도 심능석이 ‘강릉 계촌’ 혹은 ‘강릉 굴아위’에 이사와 살았다.

1866년 당시 서울에서 천주교회의의 중요한 일을 수행했던 이유일(안토니오)은 박해가 일어나자, ‘강릉 계촌’ 혹은 ‘강릉 계골’ 의 심능석 집으로 파신하였다.

1868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치열해 지명서 홍천, 횡성, 소초, 둔내 등에서 체포된 신자가 있었고,

1868년 5월 5일 이유일과 심능석이 함께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이 두 순교자 외에 또 다른 순교자 유베드로(1846-1869)에 관한 기록에는 ‘강릉 계골’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본디 제천 북면 번지리 사람으로서 강릉 영서 계골 유벽처에 가 살다가 후에 평창 됴돈지방에 이사하였더니, 기사년(1869) 8월에 포교에게 잡혀 죽산까지 간 소식은 알았으나, 치명은 어떠한 곳에서 하였는지 나중 사정은 알지 못하나, 나이는 24러라.” (『치명일기』 432)

이들 행적에 나타나는 지명인 ‘강릉 계촌’, ‘강릉 굴아위’, ‘강릉 계골’, ‘강릉 영서 계골’ 등의 지명은 어디일까?

먼저, 강릉 바우길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는 “심스테파노의 길”의 한 쪽 끝인 강릉시 사천면 석교2리 구라미(仇羅味) 마을이라는 주장이 가장 먼저 등장하였다.

1982년 출간된 『성지』 1 이라는 책에서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가 순교자 심스테파노의 후손이라고 하는 심원수와 함께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 책에 “구라미 마을은 청송 심씨 문중이 씨족을 이루어 살던 전형적인 마을이었다. 청송 심씨 일족이 언제부터 이 마을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 부터 약 삼십년 전만 해도 심씨들이 10여호 살았는데, 현재는 모두 타고장으로 떠나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이 마을은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서 유일하게 순교자를 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살던 심 스테파노는 한 학에 능통한 선비로서 일찌기 천주교에 입교하여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열심히 수계하던 교우였다. 그는 29세 되던 1868년 5월에 마을 친구들과 동구밖 정자에서 상춘을 겸한 시회를 즐기다가, 어느 외교인의 밀고로 경포에게 잡혀 강릉 감영으로 끌려가 옥에 갇히었다가 치명하였는데, 그 치명 장소는 확실치 않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구라미 마을이 심능석이 살았던 곳이라고 단정한 근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오영환 교수는 이 기록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블로그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라는 책에서 “그동안 굴아위는 구라미 마을로 전해 왔는데, 옛날에 청송 심씨 문중이 씨족을 이루어 살던 양반 마을이었다.” 다만 오교수는 이 마을 외에도 ‘성산면 위촌리 골아우 마을’과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 있는 굴곡(窟谷), 골아우’을 후보지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장정룡(강릉원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구라미에 대한 지명 유래와 국어학적 분석을 통해 “ 심스테파노의 고향 강릉시 사천면 석교리 구라미 마을은 바위굴이 있어 굴암리라고도 하는데, 옛날부터 청송 심씨 문중이 살았던 전형적인 사족의 고향이다.”라고 구라미 마을이 심능석 순교자가 체포된 마을 일 뿐 아니라 심능석의 고향이라고 단언하였다.

두번째 설로 강릉시 성산면 위촌2리 경암(鯨巖) 이라는 주장이 있다. 방동인(전 관동대 사학과) 교수는 『강릉지역과 천주교』라는 책에서 2012년 ‘굴아위’의 위치를 강릉시 성산면 위촌 2리 경암 즉 고래바위라고 추정하였다. 그는 ‘계촌’과 ‘굴아위’라는 지명은 같은 지명을 두고 다르게 부른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계촌은 국어학적 분석을 통하여 ‘계촌’이 ‘경암’이라고 보았다.

강릉 지역에서는 심능석이 살았던 지역에 대하여 이 두설을 중심으로 방동인교수와 장정룡 교수는 몇차례 논박을 주고 받았다.

두 가지 설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강릉 바우길의 심스테파노의 길이 지정되었고 소설가 이순원은 “ 바우길 코스를 탐사하며 어느 산속에서 한순간 시간이 멎은 듯 너무도 깊고 너무도 아늑한 신비한 느낌의 마을을 발견했다며 여러 사람에게 묻고 자료를 뒤지던 중 심스테파노가 살았던 골아우라는 사실을 알고 길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심스테파노의 길을 이름지은 연유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주장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2019년 평창에서 활동하는 정원대 향토사학자가 천주교 원주교구 대화성당 곽호인 신부를 찾아가 심능석•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 순교자가 살던 곳은 평창군 방림면 계촌3리 굴아우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곽호인 신부는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에게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조규만 주교는 여진천(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교회사)교수에게 조사를 명하여 여진천교수가 문헌조사와 현장조사 등을거쳐 심능석과 이유일 두 순교자가 생활하다가 체포된 지역은 평창군 방림면 계촌3리 굴아우인 것을 확인하였다.

여진천 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신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이성과신앙 제66호』(2019)에 논문으로 발표하였고, 천주교 원주교구에서는 2019년 10월27일 『평창, 대화지역 교우촌의 형성과 변화』 라는 주제로 천주교대화성당에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심스테파노가 살았고 이유일이 피신하였다가 함께 잡혀 박해를 당하였던 장소를 마침내 ‘평창군 방림면 계촌3리 굴아우’로 천주교계가 공인한 것이다.

이 두 순교자가 피신해 살다가 관헌에 체포된 장소가 천주교계에 의하여 확인된 사실은 천주교 원주교구 조규만바실리오 주교가 2019년 4월 5일 정원대향토사학자에게 서한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한국천주교 시성시복특별위원회’에 통보하여 바로잡도록 할 것을 알렸다.

계촌리 굴바위산

평창의 정원대 향토사학자의 노력에 의하여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은 것은 단지 강릉바우길의 『심스테파노의 길』 명칭 하나를 바로 잡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천주교에서는 조선시대 순교자 132위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시복이란 로마카토릭교회에서 그 성성(聖性)이나 순교로 인해 이름 높은 자에게 복자(福者)라는 칭호를 주어 특정교구나 지역, 국가, 혹은 수도단체 내에서 공적인 공경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교황의 선언이다. 천주교에서 가장 추앙받는 성자의 바로 아래 단계가 복자이다. 현재 한국의 가톡릭 성인은 103위이며, 한국천주교에서는 132위에 대한 복자 승인을 위한 절차를 진행 중에 있고, 심능석과 이유일 두 순교자들도 시복을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

평창은 천주교 박해기에 원주, 횡성,강릉에 비해 월등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며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평창군 관내에만 12-3 곳의 공소가 존재하였고, 4-500여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교우촌을 형성하였던 역사적 배경에 순교자가 살던 마을이 평창군 지역으로 확인되면 천주교 박해시기의 강원도 지역 천주교의 중심이 달라질 수 있는 큰 의미가 있다.

2019년 발간된 『길위의 역사』(김진배 정원대 공저)에 실린 ‘굴아우’의 기사를 인용하여 그동안 정원대 향토사학자의 노고를 확인한다.

“방림면 계촌3리 마을에서 대미쪽으로 가다보면 굴아우라는 동네가 나온다. 바위에 굴이 있어 붙은 지명이다. 당시 강릉군 대화면에 속해 있어서 강릉 계촌, 강릉 굴아우, 영서 계골 등으로 불리었으며, 1906년 평창군 방림면에 편입되었다. 굴아우 마을 동쪽에 굴바우산이 있고, 매우 큰 바위들이 정상에 10여개 있고 그 중 한 바위에는 큰 굴이 나 있다. 직경 2m 정도 되는 굴은 돌로 입구를 막아 놓았고, 한국전쟁 당시 지역사람들이 피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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