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록(東遊錄) <금강산 유람록/평창기록>

방림역 사료 보정/ 예족 산성/ 대관령 마을 고증

高 柱 浩 승인 2021.09.24 16:40 | 최종 수정 2021.09.28 23:04 의견 0

[금강산 유람록] 동유록(東遊錄) 이세구(李世龜)

이세구의 동유록은 1691년 9월2일부터 10월 8일까지 관동지방의 사군(四郡)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록이다. 이 중에 현재의 평창군 지역을 유람한 것은 10월3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다. 이를 발췌하여 수록한다.

▪ 이세구(李世龜, 1646-1700)의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은 목사(牧使)를 지낸 이시현(李時顯)이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증손이다.

1697년 장령을 거쳐 서연관·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한 뒤 병으로 사직했다. 1691년 관동지방의 사군(四郡)을 유람하고 「동유록(東遊錄)」을 남겼다.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에 조예가 깊었다. 『대학』의 「물격설(物格說)」에 있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의 설과 다르다고 반박했으며,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상의 잘못을 지적했다.

한사군(漢四郡)과 삼한(三韓)의 위치를 논증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 소론(少論)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가졌다. 저서로 『양와집』이 있다.

1691년 10월 3일(갑신).

강릉부사가 둘째 아들을 보내 따르게 했다. 이번 유람 길에는 인근 고을의 수령이 간혹 와서 만났는데, 나는 병들고 어지러워 응접하기가 곤란해 모두 가서 사례하지는 못했다. 저들은 몹쓸 병 때문이라고 서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나는 마음이 매우 편치 않았다.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20리를 가서 구산역(丘山驛)에 이르렀다. 구산역 서남쪽 1리쯤에 구산서원(丘山書院)이 있다. 그 서원에는 공자의 화상(畫像)이 있고, 증조부 백사(白沙)선생의 문집 판목도 있다. 찾아가 보려 하니,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서원에 들린다면 캄캄해져서야 횡계(橫溪)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서쪽으로 대관령(大關嶺) 골짜기로 들어가니 산길이 점점 험준하고 위태로운 바위가 솟아있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5리 남짓 가서 제민원(濟民院)에서 말을 먹였다. 산비탈에는 집이 서너 채뿐이었다. 왼쪽으로 긴 시내를 끼고 서쪽으로 고갯길을 오르자, 흰 바위와 맑은 시내가 또한 완상할 만했다. 돌부리는 갈수록 험준하고, 고목은 촘촘하게 하늘에 닿아 해를 가리고 있었다.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려 몹시 추웠으며, 피곤한 말이 자주 넘어져 간혹 부여잡고 끌어당기며 걸어 올랐다. 10리를 가서 독수주촌(禿水酒村)을 지나고, 다시 5리를 가서 반정현(半程峴)에 이르러 잠시 말을 쉬게 했다. 여기부터는 돌이 점점 적어지고, 길은 모두 휘고 꺾여 빙빙 돌아서 올라갔다. 이른바 ‘아흔아홉 굽이’라고 한 것이 진실로 빈말이 아니었다.

또 5리를 가서 고개 마루에 있는 제민원에 올랐다. 마을 사람 신두립(辛斗立)이 말하기를 “반정현 남쪽의 높은 봉우리 위에 옛 왕성(王城)이 있고 중간에는 궁궐터가 있는데, 간혹 솥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 위쪽에 있는 것은 예맥국 시대에 쌓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라고 했다. 이에 고개에 올라가 조망하니 과연 성 터가 산등성이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한 무더기의 푸른 기운이 하늘과 닿아 있었다. 가까이서 바라볼 때와 비교하면 매우 높았다. 따르는 자가 경포의 남쪽에 있는 한송정(寒松亭)을 가리켜 보여주어, 발걸음이 더뎌지고 작별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서쪽으로 15리를 내려가 횡계역(橫溪驛)에 이르렀다. 길은 더욱 평탄하고, 역촌은 자못 들녘이 트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6월에 서리가 비로소 그쳤다가 7월에 다시 내려 오곡을 심을 수 없고 귀리만 자라니 살기가 매우 힘듭니다.”라고 했다. 대개 그 땅이 바로 산등성이에 있기 때문이었다.

대관령의 북쪽은 귀농령(貴農嶺)이고, 동쪽은 양양(襄陽)이다. 서쪽은 강릉의 철계(鐵溪)이다. 귀농령의 북쪽이 조침령(曹砧嶺)이고, 조침령의 북쪽이 오색령(五色嶺)이다. 그 동쪽은 양양이고 서쪽은 인제(獜蹄)이다. 오색령의 북쪽은 미시파령(彌時坡嶺)이다. 미시파령은 하설악(下雪岳)의 북쪽 기슭에 있고, 하설악의 남쪽은 중설악(中雪岳)이며, 중설악의 남쪽은 상설악(上雪岳)이다. 미시파령의 북쪽은 소파령(所坡嶺)이고, 그 동쪽은 간성(扞城)이며, 서쪽은 인제이다. 소파령의 북쪽은 탄둔령(炭屯嶺)이고, 동쪽은 고성이며, 서쪽은 인제이다. 탄둔령의 북쪽이 풍악산이고, 또 그 북쪽이 온정령(溫井嶺)이다. 동쪽은 고성이고, 서쪽은 회양이다. 온정령의 북쪽은 쇄령(瑣嶺)이고, 쇄령의 북쪽은 추지령(楸池嶺)이다. 그 동쪽은 통천이며, 서쪽은 회양이다. 대관령의 남쪽은 백복령(百福嶺)이고, 동쪽은 삼척(三陟)이며, 서쪽은 정선(㫌善)이다. 또 그 남쪽은 태백산(太白山)이니, 하늘이 동쪽과 서쪽을 경계 짓는 산이다. 산은 높고 길은 험하다. 겨울에는 눈이 내려 길이 막히는 걱정이 많으며, 추지령과 대관령이 가장 큰 고개의 요충로이다. 역졸 산백(山白)의 집에서 숙박했다.

1691년 10월 4일(을유).

북쪽으로 어지러이 난 나무숲 사이로 10리를 가서 축치(杻峙)에 이르렀다. 축치 아래로 다시 서쪽으로 5리를 가서 높은 다리를 건넜다. 여기서부터는 눈이 아무리 많이 내려도 길이 막히진 않는다고 한다. 5리를 가니 평평한 들이 있고, 그 들의 북쪽으로 난 길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로 통한다. 겨우 20리를 갔는데 사람은 피로하고 말도 힘이 다하였으니, 마치 센 쇠뇌의 화살도 먼 데에 이르면 힘이 빠지는 것과 같았다. 형편상 더 따라 들어갈 수 없어 머리를 들어 탄식할 뿐이었다. 2리쯤 가서 월정천(月精川)의 큰 다리를 건너니, 시내는 넓고 얕았다. 이곳은 우통수(于筒水)의 하류이고 한강의 근원이다.

오대산 중대 (五臺山 中臺)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1帖 3幅>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88년 30 x 43.7 cm. 개인소장


오대산은 다섯 봉우리가 있고,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동쪽은 만월봉(滿月峯)이고, 남쪽은 기린봉(麒麟峯)이며, 서쪽은 장령봉(長嶺峯)이고, 북쪽은 상왕봉(象王峯)이며, 중앙은 지로봉(智爐峯)인데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하다. 우통수가 서쪽 바위 아래에서 솟아나 흘러 시내가 되어 영월(寧越)의 여량역(餘粮驛) 북쪽을 경유해 죽령강(竹嶺江)과 합류하여 수백 리를 가서 한강이 된다고 한다.

다시 13리를 가서 진부역(珍富驛) 마을에서 말을 먹이고, 또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남쪽으로 벼랑길을 건넜다. 그 왼쪽으로는 월정천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험준한 벼랑이 있었다. 청심대(淸心臺)를 지날 적엔 바위가 위험하여 오르지 않았다. 서쪽으로 5리쯤 가서 모로원촌(毛老院村)에서 묵었다. 마을의 앞산에서는 사슴의 울음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으니, 깊고 궁벽한 곳임을 알겠다.

1691년 10월 5일(병술).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모로현(毛老峴)에 올랐다. 고개의 서쪽으로 난 돌길이 얼어 지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다시 18리를 가서 평지를 가는데 말이 갑자기 미끄러져 땅에 넘어졌다. 고개 길의 난관을 모두 안전하게 지나서 평탄한 길로 나온 후 갑자기 넘어져버린 것이다. 일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이와 같다. 대개 사람의 마음만 걱정스럽고 위급한 곳에선 삼가고 편안한 상황에선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고, 짐승도 그러한 모양이다. 다리의 힘이 위험한 잔교에서 이미 다 빠졌는데 한 번 평지에 들어서자 방심하며 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넘어져버렸던 것이다. 성찰을 잘하는 사람은 경계로 삼을 만하다.

남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시내를 건너 수백 보를 갔다. 바위 아래에는 동굴이 있는데, 입구의 넓이가 두세 칸은 되고, 그 안의 넓이는 8,9칸이나 되었다. 바위 모서리를 올려다보니 물이 온통 방울져 있었다. 서쪽으로 십여 보를 들어가니 텅 빈 동굴이 깜깜해서 사람에게 소름을 돋게 해 끝까지 갈 수 없었다. 그 굴을 들여다보고 북쪽으로 꺾어 한 마장 남짓 가니, 암석이 무논의 도랑과 두둑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돌밭을 지나자 큰 바위가 가로로 펼쳐져 있어 마치 언덕과 같고, 그 너머는 넓고 깊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예로부터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간 자가 없었으며, 어떤 이는 횡성 땅으로 통한다고 말을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2,3리를 가서 고을의 창고를 지나 태화역(太和驛) 마을의 이승길(李承吉) 집에서 말을 먹였다. 또 25리를 가서 방림(芳林)의 큰 시내를 건너 방림역 안대민(安大敏)의 집에서 묵었다. 시내의 남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으니, 이것이 평창현(平昌縣) 뒤에 있는 주산(主山)이다.

시내의 동쪽을 따라 남쪽 길로 들어가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 평창읍내 5리 남짓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주진(注津)까지는 겨우 10리 거리이다. 주진에서 약수천(藥水遷)을 넘어 25리를 가면 약수역이 있다. 다시 거슬치(琚瑟峙)를 넘어 40리를 가면 원주(原州)의 주천현(酒泉縣)에 다다를 수 있다. 주천현에서 원주까지의 거리는 100리라고 한다. 당초 이 길을 경유해 주천의 청허루(淸虛樓)를 구경하고자 했지만, 피로해서 가지 않았다.

1691년 10월 6일(정해).

호현(狐峴)을 넘었다. 호현 아래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운교역 아전 김일립(金日立)의 집에서 말을 먹였다. 운교역은 주천의 사자산(獅子山) 뒤에 있다.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독현(禿峴)을 넘었다. 그 험준함이 모로현보다 조금 덜했다. 다시 10리를 가서 횡성의 안흥역(安興驛)을 지났고, 15리를 가서 큰 시내를 건너 실미촌(實味村) 신경소(申庚素)의 집에서 숙박했다. 이날 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자료문의- 경상대학교 장원철 교수 연구팀

-------------------------------

편집자 역주

* 10월 4일 기사에 "10리를 가서 축치(杻峙)에 이르렀다"는 문장이 있다.

杻자는 싸리나무 축지이고 또한 느릅나무(비슬나무) 유자로도 사용되는바.여기서 축치(杻峙)는 싸리나무 축자가 싸릿골이라고도 하며 그곳을 넘어서 유천이란 동네는 축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곳엔 느릅나무 고목이 있는데 느릅나무(비슬나무) 축자로 읽어야 한다고 엄기종님은 이야기 한다. 그래서 축치를 넘어서서 유천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웃마을에 동일한 축杻자를 가지고 한 마을에서는 싸리나무 축자로 사용하고, 아랫동네에서는 느릅나무 축자로 쓰고있다,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 또한 같은 날 기사에 "서쪽으로 5리쯤 가서 모로원촌(毛老院村)에서 묵었다."는 문장이 있다.

청심대 주변의 모리재에는 조선시대에 역은 아니지만 원(院)이 있었다.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은 강원도의 길 보안도중에 중요한 역들로 30리 거리에 위치한것은 역은 말로만의 길이 아닌 걸어서 다니기에 식사, 취침등을 제공하는 장소로 과거 선비들의 기행문 속에 대화는 밤이면 호랑이 울음소리도,, 율곡 이이 선생도 시에 이러한 호랑이 소리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청심대에는 천천원처럼 모로촌원이 있고 어느 선비는 곡건주막이라는 주막에서 목을 축였다고도 한다.

* 10월 5일 기사에는 "그 굴을 들여다보고 북쪽으로 꺾어 한 마장 남짓 가니, 암석이 무논의 도랑과 두둑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라고 대화 석굴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10월 5일 기사에 "3리를 가서 고을의 창고를 지나 태화역(太和驛) 마을의 이승길(李承吉) 집에서 말을 먹였다. 또 25리를 가서 방림(芳林)의 큰 시내를 건너 방림역 안대민(安大敏)의 집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선비들의 대다수가 태화역(太和驛)의 태화란 지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고지도에선 반 정도만 태화라 쓰고 있는데 여기에 3리, 25리의 치수가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여행자들이 가지고다니는 여행가이드 지도가 있었으며 그 책에 태화라고 기록한 모양이다.

여행 가이드 책자란 어느 선비는 금강산 가는 길에 저녁에 재어보니 하루 말(馬)로 70여리를 갔다, 또 어느 선비는 강릉에서 평창 거슬압산(거슬갑산)을 넘어 서울로 450여리 갔다라고 기록한바 유람선비들은 필수로 대동여지도라든가 차수,지명을 기입된 가이드 책을 가지고 다녔다.

*"또 25리를 가서 방림(芳林)의 큰 시내를 건너 방림역 안대민(安大敏)의 집에서 묵었다."

대화에서 오면서 방림 삼거리 큰 시내를 건너서 방림역 안대민 집에서 묵었다라고 정확한 서술과 또 어떤 선비는 방림역은 상수리나무가 빼곡했다라고 표현한바 역의 안대민 집은 역운이 아닌 사제 여관을 이야기 함이다.

정원대가 평창의 인문지리에서 이야기하는 방림 삼거리 예전 교통 검문소자리와는 상반되는 기록이라 하겠다.

* 선자령의 깃점 대관령 정상부의 제민원이 궁애가 평창까지 쳐들어온 마지막 지점 아닌가 합니다.

*6일(정해)기사에 "호현(狐峴)을 넘었다. 호현 아래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운교역 아전 김일립(金日立)의 집에서 말을 먹였다. 운교역은 주천의 사자산(獅子山) 뒤에 있다.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독현(禿峴)을 넘었다."

여기에 호현과 독현은 지금의 문재, 전재인데 조선 관광 가이드 책엔 호현, 독현으로 기록된 모양입니다.

*10월3일 기사에 "그 위쪽에 있는 것은 예맥국 시대에 쌓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라고 했다.

여기에 예국의 산성이 바로 선자령을 올라서는 정상에서 보이는듯 합니다. 그 흔적이 아직도 좀 남아 있으려나..

평창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의 평창의 고산성 연구에 도움이 되기 위해 원문자료까지 올립니다,

좋은 자료 되십시요.

----------------------------------------------------

<원문>

三日甲申. 主守送其次胤相將. 是行緣路守宰或來見, 而余病眩艱於應接, 皆不得往謝. 彼或以廢疾相恕, 而心甚不安矣.

緣溪西行二十里, 至丘山驛. 驛西南一里許, 有丘山書院. 院有孔子畫像, 又有曾王考白沙先生文集板. 欲尋院, 從者云, “若入書院則到橫溪必昏黑云,” 遂止.

西入大關嶺洞, 山路漸峻, 危石犖确, 步步難進. 行五里餘, 秣馬濟民院. 山崖只有三四家矣. 挾左長川, 西上嶺路, 白石淸流, 亦可玩也. 石角去益險峻, 古木森森, 參天蔽日. 氷雪凌兢, 疲馬屢顚, 間或攀援步上. 行十里, 過禿水酒村, 又行五里, 至半程峴, 蹔歇馬. 自此以後, 石漸少而路皆屈折, 盤繞以上. 所謂九十九曲者, 信不虛矣.

又行五里, 登嶺脊濟民院. 村人辛斗立言, “半程峴南高峯上, 有古王城, 中有宮闕遺址, 往往得釜鼎. 其上相傳爲濊國時所築云.” 及登嶺望之, 果有城址, 環繞山崗矣. 回望滄海, 一抹靑暈接天. 比近觀時甚高. 從者指示寒松亭在鏡浦之南, 令人遲遲, 便有惜別之懷矣.

西下十五里, 至橫溪驛. 路益平易, 驛村頗開野. 而居人言, “六月霜始止, 七月又下霜, 不得種五糓, 唯種鬼麥, 生理甚艱云.” 盖其地正在山脊故也.

大關嶺之北爲貴農嶺, 東則襄陽. 西則江陵之鐵溪. 貴農之北爲曹砧嶺, 曹砧之北爲五色嶺. 其東則襄陽, 西則獜蹄. 五色之北爲彌時坡嶺. 嶺在下雪岳之北麓, 下雪岳之南卽中雪岳. 中雪岳之南卽上雪岳也. 彌時坡之北爲所坡嶺, 其東則扞城, 西則麟蹄. 所坡之北爲炭屯嶺, 東則高城, 西則麟蹄. 炭屯之北爲楓嶽, 又其北爲溫井嶺. 東則高城, 西則淮陽. 溫井之北爲瑣嶺, 瑣嶺之北爲楸池嶺. 其東則通川, 西則淮陽也. 大關嶺之南爲百福嶺, 東則三陟, 西則㫌善. 又其南爲太白山, 天所以限東西也. 山高路險. 冬多雪塞之患, 而楸池大關, 最爲巨嶺要路矣. 宿驛卒山白家.

四日乙酉. 北行亂樹間十里至杻峙. 峙底又西行五里, 過高橋. 自此以後則雪雖多, 路不塞云. 行五里有平郊, 郊北路可抵五臺山月精寺. 纔二十里, 而人疲馬極, 有同強弩之末. 勢不得迤入, 矯首悵然而已. 行二里許, 涉月精川大橋, 川廣而淺. 是于筒水下流而漢水之源也.

五臺山有五峰, 大小相敵. 東滿月·南麒麟·西長嶺·北象王·中智爐, 似中國五臺. 于筒水湧出西臺之下, 流而爲川, 經寧越餘粮驛之北, 合竹嶺江, 流數百里爲漢江云.

又行十三里, 秣馬珍富驛村, 又西行十五里, 南涉遷道. 左挾月精川右有峻崖. 歷淸心臺, 巖危不上. 西行五里許, 宿毛老院村. 村前山鹿鳴達曉, 可知其深僻也.

五日丙戌. 西行十里上毛老峴. 峴西石路氷凍行甚艱. 又行十八里, 行平地, 馬忽顚蹶仆地. 嶺路艱關, 皆得安過而旣出坦道, 遽見顚沛. 事之出於不虞者類如此. 盖非但人情謹於憂危而忽於安平, 畜物亦然. 脚力旣盡於危棧, 而一入平地, 放心而行, 自不覺其顚踣也. 善觀者可以爲戒也.

南轉右渡小溪, 行數百步. 巖下有窟穴, 其口廣數三間, 中廣八九間. 仰見巖角, 水皆點滴. 西入十數步, 空洞黑暗, 令人悄懔, 不可以窮. 問其穴北折行一馬塲許, 巖石成水田溝壠之形. 過石田則有大石橫亘, 如垠齶, 其外曠蕩深絶, 不可測其涯涘. 自古無敢入其中者, 或云通於橫城地, 而不可詳也.

行二三里, 過縣倉, 秣馬於太和驛村李承吉家. 又行二十五里, 渡芳林大川, 宿芳林驛安大敏家. 川南有高嶂, 是平昌縣後主山.

緣川東取南路, 踰小峴至平昌邑內可五里餘. 至注津纔十里. 自注津踰藥水遷, 行二十五里有藥水驛. 又踰琚瑟峙行四十里, 可抵原州酒泉縣. 縣距州百里云. 初欲由此路更觀酒泉淸虛樓, 疲憊不果往.

六日丁亥. 踰狐峴. 峴低西行三十里, 秣馬雲交驛吏金日立家. 驛在酒泉獅子山背後. 西行十里踰禿峴. 其險峻稍减於毛老峴矣. 又行十里過橫城之安興驛, 行十五里渡大川, 宿實味村申庚素家. 夜風雪.

七日戊子晴. 前有檜嶺. 馬虺難度, 借主人牛騎行雪中, 行色亦堪畫也. 溪南有細路通獅子山西桃川村, 山溪盤回四十里, 纔容步行云. 盖是溪合安興驛洞, 及於洞, 兩水流數里, 南注山谷間, 至獅子山西, 爲桃川, 流過淸虛樓前, 合注津下流矣.

西行十里, 踰檜嶺. 北距橫城縣三十餘里云. 又行十里, 過敖原驛前, 還其牛. 行十里秣馬於原州土洞, 行三十里宿巨里大村.

八日己丑. 西行六七里, 南望原州邑里. 從留原驛前路, 行四十里到安昌江. 江淸沙白, 前開小野, 可耕可釣矣. 秣馬翠屛村, 步到亭前臺, 玩翠屛蒼壁. 涉前灘行二十里, 踰石峙分峙兩峴, 馬隤僕痛. 又行十餘里至驪州新村, 日已昏黑, 月色如素. 又行十里, 渡驪江歸家, 總計往返凡行一千六百七十七里.

自斷髮嶺至京庫皆山也. 自通川至江陵, 大抵皆海岸. 去路砥平以北, 歸路江陵以西, 多山峽而少原野矣.

余每欲一遊楓嶽, 世故牽掣, 荏苒半世. 今年始獲着鞭, 適當深秋, 寒事將迫, 加以脚力已衰, 藍輿之所未到, 不敢往. 未得窮探極搜, 而草木黃落, 雲霏斂收, 奇峰絶壑, 頭面盡露, 遂得以縱目快覩.

總會處在正陽一面, 可以盡攬玆山之奇秀. 大抵穴望以西則彷彿迎接皇華時設戱山臺. 衆香以北則玉峰銀壁, 畫亦難就, 但稍欠寬展氣象. 萬瀑洞信奇矣, 亦不能平遠, 是知造化無全功也. 然甞見楊蓬萊洞天八字印本於障簇間. 一字一壁, 龍拏虎攫, 實爲奇壯, 而臨石摩挲, 細小凋殘. 盖非其字之細小也, 盤石之平廣, 洞府之宏濶, 難乎其爲奇壯也. 以此反隅則萬瀑洞本非狹窄, 而左右長壁束立千仞, 故人之所見, 自不得不爾.

至於正陽, 眼界亦非不寬濶. 而面前峰巒簇簇還列, 如障陳屛擁, 數十里之地, 攢蹙於咫尺之中, 其勢自不得有寬濶底氣像耳. 且若非群峰簇擁屯聚, 呈奇獻巧於眞歇臺前, 則亦何能盡得其眞面目於一擧眼之間耶. 大抵如恥齋遊山錄所稱道, 似涉太過, 而然歷覽有詳略, 興到有淺深, 誠難一槩論斷也.

要之, 我東山水, 名於天下而環東土數千里, 更無如此境界, 求之天下, 亦難得其儔匹. 前輩稱建爲丹山碧水, 天台鴈蕩, 素號奇絶, 未知與此果何如也.

論之者曰, 聖人出類拔萃. 設令一拜孔子於凾丈之間, 未必能飫人心目, 欽仰歎服, 如觀傳記味典訓之爲眞的也. 人之遊此山者, 亦猶是焉. 惟具眼者, 可以盡其奇也.

西南之海, 皆色白水渾. 唯東海色靑而氷凈淸見其底. 湖水亦然, 故嶺東湖海, 信多絶境. 叢石之奇恠, 仙遊·三日·花津·飛來之泓澄幽靜, 淸澗之平曠, 洛山之蘊籍, 香浦之淸凈, 鏡浦之平正宏濶, 可謂各極其趣, 而然淸絶蕭灑, 不似塵世境界, 則唯永郞湖爲第一, 而鏡浦以下, 爲之次矣. 山水仁智之樂, 固不敢言, 而病懷頗覺蘇暢, 是可幸也.

古人以關東爲神仙窟宅. 世本無仙, 此言過矣. 然今行所歷, 皆山水淵藪. 意或有隱居君子世外逸人, 往來棲遲, 庶幾一遇, 竟無所見, 或是吾行多從坦道, 故有之而未遇其人耶. 或遇之而不識耶.

甚至山中經僧, 如正陽之楓悅已移香山, 虛谷之淸眼·大器〮·重來, 院之緇俊輩, 皆行乞未還, 無與評論山水, 剖擊同異, 亦一欠事也.

其氓俗則嶺西燒菑畬, 糓多黍粟兩豆木麥瞿麥, 用力小而所獲夥. 其産視牛畜多寡, 養鷹喜獵, 又善養蜜蜂. 嶺外海曲資漁塩. 其釣也, 一緡之長幾數百把, 各懸五六十鉤. 亦或以網獲, 或以人刺. 然其傳業子孫者以釣緡, 猶陸民之分土田. 燈用魚油, 皆土産麻布, 而嶺底嶺東則無木綿. 江陵則可種而種之者絶少. 故皆艱衣而善耐寒. 嶺西則食惡, 嶺東則食美. 丘山以西珍富以東則衣食皆艱.

-------------------- 終----

저작권자 ⓒ 평창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