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일기(東遊日記) <금강산유람록/ 평창부분 발췌>

평창무우는 명품브렌드로 자라나야 한다.

高 柱 浩 승인 2021.10.03 13:45 의견 1

동유일기(東遊日記) <금강산유람록/ 평창부분 발췌>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다.

1779년 음보(蔭補)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며, 이후 예조판서・공조판서・이조판서・의정부 우찬성 등을 지냈다.

성리학계의 심성(心性) 논쟁에서는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을 겸비하여 존경을 받았다. 저술로 󰡔성담집󰡕이 있다.

▪유람일시 : 1781년 7월 29일~9월 29일

▪동행 : 송환질(宋煥質), 황세영(黃世英)

▪일정

7월 29일 : 문산 出

13일 : 운교역-방림

14일 : 대화-모노현-오대산

15일 : 유현-횡계-대관령-오봉사

9월 29일 : 마포-집 도착.

동유일기(東遊日記) ( 평창부분 발췌)

13일. 잠깐 흐림. 아침 일찍 출발하여 몇 십리를 갔다. 견여(肩輿)를 타고 문재(門岾)를 넘어 운교역(雲交驛) 마을-강릉(江陵) 땅으로 관아와 195리 떨어져 있다.-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하루 종일 좁은 골짜기 속을 지나갔는데, 벼랑의 돌이 안장에 걸리고 숲의 넝쿨이 모자를 건드려 답답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에 방림(芳林)-강릉 땅으로 관아와 170리 떨어져 있다.-에 이르렀는데, 시냇물이 깊고 넓어 마을 사람들이 남여를 들고 부축하며 보호하여 건넜다.

여관에 머물며 묵었는데 듣자하니 관찰사가 오전에 지나갔다고 한다. 나는 이번 유람에서 나의 여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산길에 여관이 드물어 부득이 역원의 마을로 들어갔다. 데리고 간 감영의 노비들은 행색이 저절로 드러나 마을 백성들로 하여금 견여를 메고 맞들며 바삐 걷는 수고를 면하지 못하게 하여 특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원(烏原)을 지난 뒤로는 방림 한 구역에서 비로소 시내와 들판이 조금 트인 것이 보였다. 인가의 연기가 서로 이어져 있어 사람의 시야를 탁 트이게 했다. 평평한 밭과 기름진 땅에서 순무가 새로 났는데 연한 잎과 부드러운 싹이 싹을 틔우며 자라고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그것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순무가 잎이 무성하고 뿌리가 두텁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늦게 심어놓고서 어찌 서리와 이슬이 내리기 전에 빨리 크기를 바라는가?”라고 하니, 종자가 대답하기를 “이 순무는 비록 서리나 눈 속에 있더라도 파릇파릇 저절로 싹이 틉니다. 뿌리는 가늘고 줄기는 굵어 김치로 잘 담그면 맛이 아주 좋으며, 다른 곳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영과 고을의 요리사들이 다투어 먼저 사갑니다.”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집은 삼 줄기로 덮고 널판자로 막아 놓았으니, 산골짜기 풍속이 부지런히 길쌈하고 맹수를 엄격히 방어함을 알 수 있었다. 널판자로 막는 것은 영동과 영서 지역이 모두 그렇게 한다고 하였다.

14일. 구름이 끼고 추움. 새벽에 출발하여 대화(大和)-강릉 땅으로 관아와 150리 떨어져 있다.-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모노현(毛老峴)-강릉 땅으로 관아와 125리 떨어져 있다.-을 넘어 5리 쯤 가자 끊어진 산등성이에 기이한 바위가 말머리처럼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기쁨이 솟구쳤다. 그래서 말고삐를 당기고 말에서 내려 돌 비탈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갔는데, 오솔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신을 벗고 옷깃을 풀어헤치고 간신히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바위로 된 대가 평평하고 널찍하여 앉아서 쉴 수 있었고, 바위 모서리가 나란하고 뾰족하여 서서 기댈 수 있었다. 열 길의 푸른 절벽과 한 줄기 맑은 시내는 굽어보니 매우 사랑할 만했다. 한스러운 것은 거처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한갓 여행자들이 잠시 쉬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군술은 앞서 떠나 이미 멀어졌고, 자유는 뒤에 쳐져서 쫓아오기에 나는 홀로 한참을 서성였다. 어떤 사람을 만나 물어보니 청심대(淸心臺)라고 했다. 대가 이 이름을 얻은 것이 마땅했다. 오대산의 여러 봉우리가 우뚝 솟아 시야에 들어왔으니, 이 청심대는 바로 오대산의 한문(捍門)이었다. 기이하고 기이했다.

저물녘에 오대산 자락 기슭 아래 마을의 민가에 투숙하였다. 관찰사가 사실(史室)을 봉심(奉審)하기 위해 바야흐로 월정사(月精寺)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다. 여기에서 월정사까지는 1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 군술은 이미 월정사로 향해 떠났다. 주인은 무지한 백성이었는데 메조로 만든 떡을 내어 놓았다. 세시에 먹는 쌀로 만든 떡 모양과 같았는데, 옆에 한 그릇의 맑은 꿀을 곁들이니 참으로 산중의 별미였다. 산을 두른 소나무는 하늘로 솟아 해를 가렸다. 지나오는 길에 보니 이런 솔숲이 몇 십리에 늘어서 있었는데, 모두 황장목(黃腸木)으로서 금양(禁養)하고 있었다. 관동지역의 오대산-동쪽의 포월봉(蒲月峯)・남쪽의 기린봉(麒麟峯)・서쪽의 장령봉(長嶺峯)・북쪽의 상왕봉(象王峯)・중앙의 지로봉(知爐峯) 등 다섯 봉우리가 빙 두르고 있다.-은 평소 금강산과 설악산(雪岳山)의 절경에 버금간다고 일컬어진다. 지금 오대산 아래를 슬쩍 지나면서도 일에 얽매어 월정사에 들어가 금강연(金剛淵)을 구경하고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며 여러 절경을 감상하지 못하니 나로 하여금 매우 슬프고 실망스럽게 하였다. 등불 밑에서 봉암의 󰡔해산록󰡕을 펼쳐 보니, 오대산의 장관을 매우 훌륭하게 일컫고 있었는데, 선배의 성대한 발자취를 이을 수가 없어서 더욱 한스러웠다.

15일. 새벽에 비가 내려 먼지를 적심. 아침 일찍 출발하여 유현(杻峴)을 넘었다. 북쪽으로 향한 후 몇 십리는 들판이 황량하고 산기슭이 민둥민둥했는데, 바다가 가깝고 지대가 높으며 모진 바람이 항상 불고 된서리가 일찍 내려서 그러한 것이었다. 영서 지역이 해마다 흉작이 드는 것은 오로지 바람과 서리의 재해 때문이다. 올해 가을 추수도 이미 서리를 맞아 절반 이상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여, 보고 있으니 매우 근심스럽고 참담했다.

횡계(橫溪)-강릉 땅으로 관아와 60리 떨어져 있다.-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관사 안에서는 순찰사의 행차를 맞이하느라 매우 분주하고 시끄러웠다. 잠시 앉아 있는 것도 괴롭게 느껴졌다. 남여를 타고 대관령(大關嶺)을 넘었는데 고개의 양쪽으로 드리운 길이 멀게는 20여 리 정도이며 매우 험준하였다. 일찍이 󰡔지리지󰡕를 살펴보고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직접 보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지리지󰡕에 “대관령은 관아 서쪽 45리 지점에 있는데 곧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여진(女眞)의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종횡으로 구불구불 길게 뻗어내려 남쪽에 서려 동해 바닷가에 웅거하고 있는 것이 몇 개인지 모르지만 이 고개가 가장 높다. 산허리를 두르고 있는 오솔길은 모두 아흔 아홉 굽이이다. 서쪽으로는 한양과 통하는 큰 길이다.”라고 하였다. 또 “원읍현(員泣峴)이 대관령 중턱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어떤 한 관원이 강릉으로 부임하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원읍현에 이르러 돌아보며 슬프게 울었기 때문에 이 고개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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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방림을 지나며 방림순무가 맛이 좋아 감영(원주)나 외지 요리사들이 먼저 사간다는 재미있는 글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방림 읍면사에 재미있게 조명되길 부탁하며 올립니다.

역사란 과거의 기록이지만 오늘 우리가 필요로 하기에 역사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에서 아이덴티티(동일성)을 찾아 오늘의 정체성을 살리는 점, 즉 방림을 지나며 매일 보던 양배추밭, 그곳엔 맛좋은 순무가 생산되던 이야기는 앞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엄기종님의 말씀엔 요즘 청옥산 육백마지기에 잡풀과 함께 자란 무우가 금값으로 서울로 수출되엇다 합니다. 그리고 짜투리 무우들을 주워다가 어느 시험장에서 무우 밥 요리 연구를 하려다가 깍두기를 담구었더니 무수(평창사투리로 무우)가 배맛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여 하시는 말씀이 육백마지기 개간 초에 무우는 청년 허벅지보다 더 굵고 크게 자랐는데 서울로 팔러갔더니 좀 이상하게 보였는지 팔리질 않아서 다시 가져와 깍두기를 담궜더니 배맛이더라 하는 글이 있다 합니다.

평창은 태백산맥 산간오지로 농산물로는 그저 한여름 이곳을 지나는 여행객에 간식거리인 강냉이(옥수수)와 감자 한 박스가 지금까지는 평창의 농산물로는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서술된 방림 순무맛의 예찬이나 예전에 하루 수십차 반출되던 대관령 엇갈이 무우나 청옥산의 중갈무, 평창의 기후와 토질은 무우에 적합한 환경을 가지는바 앞으로 郡을 위시하여 평창무우가 명품 브렌드로 조명되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잇는듯 합니다. 이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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