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기(東征記) (금강산유람록 평창부분 발췌)

高 柱 浩 승인 2021.10.11 12:03 | 최종 수정 2021.10.11 13:14 의견 0

동정기(東征記) (금강산유람록 평창부분 발췌)

채지홍의 봉암집 중 동정기


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 1683~1741)

▪일시 : 1740년 4월 1일~5월 10일

▪동행 : 윤봉구(尹鳳九), 한원진(韓元震), 권정성(權定性)

▪일정 :

4월 1일~3일 : 청풍 황가

6일 : 주천-평창 약수역(藥水驛)-이현(梨峴)-방림(芳林)

7일 : 방림-대화-신촌(新村)-모노령(毛老嶺)-곡건(曲建) 주점

8일 : 곡건-청심대(淸心臺)-진보역(眞保驛)-월정사-상원사(上院寺)

9일 :상원사-사자암-금몽암-적멸암-상원사-월정사-유령(杻嶺)-횡계역(橫溪驛)

10일 : 횡계령-대관령-오봉서원

▷1740년 4월 6일

초6일(병자). 주천을 출발하여 평창(平昌)의 약수역(藥水驛)에서 점심을 먹었다. 감자정 형제도 따라왔다. 웅진(雄津)에 수십 보 못 미친 곳에서 김자정과 작별하고 이어 이현(梨峴)을 넘어가 방림(芳林)에서 잤다. 이곳은 강릉(江陵) 경계이고, 강릉부와 100여 리나 떨어진 먼 곳이다.

▷1740년 4월 7일

초7일(정축). 대화(大化)를 지나 신촌(新村) 주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연히 한림(翰林) 이익보(李益輔)를 만났는데, 사고(史庫)를 수리하러 가는 길이었다. 윤서응이 그를 맞이해 함께 서로 환담을 나누었다. 모노령(毛老嶺)에 도착하니 비가 내려,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 아래 곡건(曲建)주점에서 잤다.

▷1740년 4월 8일

초8일(무인). 맑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청심대(淸心臺)에 올랐다. 이곳은 오대산 바깥이자 골짜기 안에 해당한다. 백 척의 깎아지른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있고, 바위 꼭대기로 난 한 가닥 길은 겨우 발을 디딜 만하였다. 그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허공에 치솟아 있어,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가 절벽을 굽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을 송연하게 하여 문득 신선처럼 훨훨 멀리 날아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윤서응과 서로 말하기를 “이곳은 관동지방에서 굳이 기이하다고 일컬어지지도 않는데, 만약 옥병(玉屛)과 봉암(鳳巖) 사이에 옮겨놓고 한가한 날 거닌다면 어찌 쾌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서성이다가 한참 후 떠났다.

진보역(眞保驛) 마을에서 조반을 먹고 이에 월정사(月精寺)로 들어갔다. 절은 오대산 동쪽 가에 있는데, 골짜기 입구에서 15리 남짓 되는 곳이다. 나무가 울창하고 절문에서 몇 리 거리인데, 아름드리 늙은 회나무가 길 가에 줄지어 서 있었다. 시험 삼아 어린 종에게 세어 보게 하였더니 200그루가 넘는다고 했다.

절집은 매우 정밀하고 화려했으며, 단청은 휘황찬란했다. 뜰에는 9층 석탑이 있는데 네 모퉁이에 각각 구리 방울이 매달려 있고, 모두 36개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임진왜란 때 매우 영험이 있었습니다.”라고 했으나,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시내와 바위는 그다지 볼 만한 것이 없고, 오직 금강대(金剛臺) 하나만 최고로 뛰어났다. 물이 금강대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사군(四郡)을 지나 충주의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해지고, 양근(楊根)의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해져 한강이 된다.

점심을 마치자 말을 두고 남여를 타고 북쪽으로 15리를 가니 선원각(璿源閣)과 실록(實錄)을 보관하는 두 각(閣)이 있었다. 각각 세 개의 기둥으로 된 이층인데, 위에는 책을 두고 아래는 잡동사니를 쌓아 놓았으며, 담장을 두르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곁에는 두 채의 작은 암자가 있는데 참봉과 승려들이 감시하고 지키는데 매우 부지런하였다. 영동과 영서 지역 여러 절의 승려들이 번을 나눠 번갈아 지킨다고 했다.

온갖 나무가 울창하고 고목이 서로 이어져 있는데, 겨우 한 길로 통과하여 동북쪽으로 험한 고개를 넘어 15리를 가서 상원사(上院寺)에 도착했다. 전하는 말로는 ‘세조대왕이 창건한 사찰로 비빈(妃嬪)들을 거느리고 와서 머문 곳이다’라고 했는데, 전각·요사채·계단·담장은 공사가 정밀하고 아름다워 비빈들이 거처하는 궁중의 모습과 비슷했다. 거주하는 승려는 자못 말을 잘하고 지혜로워 주문 암송하는 것을 일로 삼고 있는데, 다소나마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했다. 밤에 그들에게 등불을 켜고 불경을 설명하게 했더니 피로를 잊기에 충분했다.

▷1740년 4월 9일

초9일(기묘). 일찍 일어나 북쪽으로 10여 리를 가서 사자암(獅子菴)을 지나고 금몽암(金夢菴)에 이르렀다. 암자는 중대(中臺) 아래 열 걸음 정도에 있고, 그 옆에 조그마한 우물이 있는데 세조대왕이 꿈속에서 얻은 우물이라고 일컬어진다. 암자에서 잠시 쉬고 앞쪽 서까래 끝에 이름을 나열하여 적었다. 마침내 우물 동쪽에서 걸어가 중대에 올랐다. 일찍이 들으니, 이곳은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격조가 있다는데, 사방의 산은 그다지 기이한 봉우리가 없어 무엇을 이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개 큰 산의 정맥(正脈)은 북쪽에서 와서 구획을 열고, 한 줄기가 그 가운데서 나와 작은 산등성이를 만든다. 우뚝 솟아 핵심이 되는 곳은 흙을 모으고 돌을 쌓아 석가여래의 두골이 묻힌 곳이라고 일컬었다. 그 아래에 또 적멸암(寂滅菴)이 있는데, 흙으로 만든 불상을 세우지 않고 향을 피우는 탁자만 설치해 놓았다. 금몽암의 승려가 한밤중에 왕래하며 불공을 드린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지봉(芝峰)의 설을 보았는데, “석가모니의 신장은 6장이이고, 영남 통도사(通道寺)에 석가여래의 두골이 있는데 크기가 화분만 하고 치아는 길이가 2촌(寸)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지장법사(智藏法師) 도선(道詵)이 서역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산에 두골이 있다는 설은 더욱 의심할 만하다. 아마도 이지봉이 들은 바는 혹 잘못 전해져 그렇게 된 것이 있으리라. 대개 황당한 말을 어찌 다 분별할 수 있겠는가.

상원사로 돌아와 조반을 먹고 다시 월정사에서 유령(杻嶺)을 넘어 횡계역(橫溪驛)의 촌사에서 잤다. 모두 나무판자로 외면을 장식했고, 마루·방·마구간·창고는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여기서부터 민가의 모습은 대체로 동일한데, 대개 호랑이를 대비하고 도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백성들의 풍습은 삼남지방에 비해 자못 순박하고 후덕했으며, 먹을거리는 기장뿐이었다. 보리는 쌀처럼 여기면서도 익혀 먹을 줄 몰라 문득 걱정스럽기도 하였으나, 진정 예맥(穢貊)의 땅이었다.

▷1740년 4월 10일

10일(경진). 대관령에 도착했다. 대관령 서쪽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고갯마루에 올라 동쪽 바다를 굽어보니 아득히 온통 푸르렀다. 일찍이 듣기로는, 옛 사람들이 ‘동해의 물은 푸르다. 이른바 ‘푸른 바다’는 동해를 가리켜 한 말이다.’라고 했다는데, 참으로 그러했다.

돌길은 허공에 매달려 아래로 나 있는데 마치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했고, 구불구불한 것은 마치 양의 창자와 같았는데, 전하는 말로는 아흔아홉 굽이라고 한다. 어린 노복이 그것을 세어보더니 대략 그렇다고 했다. 듣기로는, 임진년에 왜놈이 영동지역을 노략질하려고 이곳에 이르렀다가 그 험준함을 보곤 온 것을 후회하여 자살했는데, 지금도 그 왜놈의 무덤이 남아있다고 한다.

고개의 중턱 위로는 얼음과 눈이 얼어 있어서 찬 기운이 살을 에듯 추웠고, 꽃잎은 시들어 생기가 없었다. 산중턱에 도착하니 두견화가 활짝 피었고 나뭇잎은 새순이 돋았다. 곧장 산 밑으로 내려오니 철쭉은 이미 시들었고, 날씨는 온화하고 따뜻하여 비로소 초여름임을 알았다. 두릅나무가 한창 싹이 나는 것을 보고 일행이 함께 따서 몇 움큼이나 얻어 갔다. 10여 리를 가니 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일찍이 들으니, 회천(懷川)에서 병주(屛州)까지 수백여 리 길에서 세 차례나 구황(韭黃)을 먹는다는데, 이곳은 수십 리 거리에 불과한데 기후가 이처럼 다르니, 더욱 이상했다. 아마도 땅 속에 잠겨 있는 양기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낮은 곳을 먼저하고 높은 곳을 뒤에 하는 것인가. 한창 봄날에 만물을 생장시키는 기운은 왼쪽을 경유해 오른쪽으로 가기 때문에 동쪽을 먼저하고 서쪽을 뒤로 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높은 산은 이 고개보다 열 배나 되고, 서쪽 지역은 동쪽 지역에서 아주 먼 곳인데 또 어느 때에 봄이 되겠는가. 대개 정 숙자(程叔子)의 ‘옥음옥양(屋陰屋陽)’ 설로 유추해 보면, “영동지역은 양(陽)을 향하고 영서지역은 음(陰)을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물의 생장이 저절로 선후의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장차 조물주에게 물어보리라.

대개 대관령에서 내려오니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물이 맑고 깨끗하며, 빙빙 돌며 소용돌이치다가 폭포로 흘러가니 곳곳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바위 생김새나 돌 색깔은 아주 볼만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곳은 대개 화양동(華陽洞)과 비슷하여 기뻤다. 말에서 내려 끝까지 찾아보면 반드시 경치가 빼어난 곳이 있을 것인데, 대충대충 보며 지나가야 해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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