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효석의 유해가 고향 평창으로 돌아온다/ 봉평제언

평창의 의병에 대한 본인의 생각

高 柱 浩 승인 2021.11.28 11:18 의견 0

작가 이효석의 유해가 고향 평창으로 돌아온다/ 봉평제언

평창생각

2021. 11. 17. 후세백작

평창이 배출한 근대 한국문학의 작가 이효석의 유해는 다시금 고향 평창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간 한때 힘들었던 시간은 뒤로하고, 유족분 이우현님과 봉평 가산 이효석 선양회 사이에 같은 노력에 의해서 서로 교감되어 오는 19일 봉평 메밀꽃 축제공원 묘역으로 이장한다는 전언에 평창인으로서 환영합니다.

평창이 배출한 작가, 가산 이효석 선생님은 한국문학의 지성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으며, 봉평을 무대로한 단편 메밀꽃필무렵은 순수문학으로서 한국문학사에 영원히 빛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산선생의 묘는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시 고향을 등지고 먼 이억만리 파주땅으로 이장되어 찬바람맞으며 홀로 계셨지만 이제 이러한 어려움을 풀고 고향 평창으로 돌아오셔서 메밀꽃 축제장 공원 한 가운데로 돌아오시어 님을 추모하고 향수를 찾는 많은 독자들의 꽃다발 속으로 귀향하셔서 길이 영면하소서.

허드러지게 피어 산 허리를 온통 메밀꽃으로 물들인 봉평의 메밀꽃 축제장은 독자들로 하여금 효석의 단편 "메밀 꽃 필 무렵"을 통하여 순수한 자연으로 빠져들게하는 화원으로서, 이제는 이곳에서 가산 선생님과 독자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자연스럽고, 진정 아름답다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통하여 메밀꽃 화원으로 조명되는 봉평, 이 아름다움을 다른 예를 들어 봄으로서 이해해 봅니다,

구한말 조선을 찾은 선교사 헐버트는 우리에겐 헐버트의 아리랑 기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의 배경으로 부친은 대학 교수이고, 모친은 대학 설립자로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봉사정신으로 조선을 찾아와서 육영사업에 힘쓰며, 구한말 어려운 시기에 민비 살해의 을묘왜변 이후 고종도 일본 부랑배들이 독살하려는 정황속에 헐버트는 외국인이기에 고종의 침실에 불침번을 자초하였으며, 헤이그 밀사 사건에도 가담하여 헤이그까지 따라 갔던바 일본은 당시 을사 보호조약 아래 형제의 국가라 자처하며 일본 통감부는 헐버트를 추방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이 해방되며 이승만대통령의 재가에 의해서 헐버트는 다시금 한국땅을 밟습니다. 그는 연로하여 이제 살날이 몇 일 않남은것도 잘 알고서 헐버트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기보다가 한국에 묻히겠다며 한국땅을 다시 밟았으며, 환영식엔 부축으로 입장하였으며, 그후 일주일내로 타계하여 현재 절두산 공원묘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헐버트는 이렇게 생전에 노력한 현장에 영광을 새기며, 죽어서도 고향 미국보다는 자신이 봉사하고 노력한 땀으로 얼룩진 한국에 묻히는것을 마지막 영광으로 믿고 타계하신것이다.

이렇게 작가 이효석의 유해가 이제라도 고향, 평창으로의 귀향은 당사자에겐 몽매에도 사뭏히는 기쁜 일일테지만 그보다 자신의 단편 " 메밀꽃필 무렵"이 한국문학에 우뚝서는 영광속의 무대인 봉평 메밀꽃 축제장으로 돌아와 먼 후일까지 꽃다발 속에서 독자들을 반기며, 작가로 하여금 그간 독자들에게 단절된 한의 매듭을 풀고 독자들의 가슴속으로 이어지는 대화, 이러한 독자와의 만남이 작가의 마지막 유언이었슬듯 싶다면 이제 그 소원은 풀고, 또한 작가로서 독자들을 반겨히 맞이하는 것이 봉평메밀꽃 축제장의 최고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봉평의 메밀꽃필무렵의 축제장은 앞으로 먼 후일까지도 가산 문학의 테마를 가지고 스토리텔링화 하는 평창 문화의 한 산실로 영원히 발전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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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평을 위한 제언>

필자는 일전 판관대에 대한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의 세미나에서 봉평을 문향(文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봉평은 한 세기 전부터 유림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유림의 명분론과 단발령 이후 화서학파는 앉아서 학문만 중히 여기는 이론적이아닌 위정척사 운동으로 심한 탄압을 받게되었던 역사를 가지고있다.

주리론의 이항로 문하의 화서학파 학문들이 각지에서 봉평으로 대거 이거해 옴으로(약 2~30가구) 이러한 유림분들이 봉평의 문화를 구축하는바 실생활면에서도 삼강오륜등의 바른 예절의 깃풍이 깃들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쉬운말로는 양반의 마을이었다.

1) 봉평의 의병 역사문화론

◆ 평창의 동학운동 ( 평창의병 1)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봉평의 역사는 의병의 고장이란 점이다.

동학운동이 고부에서 일어나서 서울로 향하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운동은 끝을 맺습니다.

이때 2대교주 최시형은 강원도 영월로 잠복해서 포교활동중 다음해 강원도에서 2차 동학운동이 일어나며 홍천 물걸리에서 동학군 700여명이 민보군에 의해서 사살되고 강릉을 급습하려 평창으로 몰려드는 동학군 천여명, 또한 만여명은 후평리에서 일본군에 제압을 받으며 100여명이 사살되었고 봉평의 사리평 전투(원길리)에서는 40여명이 사살되었다는 증언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홍천과 평창에서의 동학운동이 마지막으로 동학난의 대 단원은 막을 내린다.

◆ 을미의병의 평창 (평창의병 2)

을미의병은 화서 이항로의 유림학파로서 동학과는 상반되는 유림들의 위정척사운동이지만 동학과 을미의병은 모두가 긍국적으로는 국가를 위하는 하나의 뜻으로 동학군도 을미의병에 가담하게되며 전기 을미의병은 수안보, 제천 전투를 거치며 혁혁한 승리를 하였으며 이후 중기의병은 원주권에서 평창, 영월, 정선등으로 전개되며 여러 의진아래 의병장들의 활약합니다.

그 중 원용팔 의진은 원주에서 100여명으로 창의하여 영월 정선을 거처 봉평에 들어올때 200여명이었지만 부대가 봉평을 거쳐 원주로 이동시에는 300여명으로 봉평면에서 100명 이상의 의병이 가담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당시 인구비례에 상당한 비율로 가령 조선시대의 인구를 참고하면 이성개가 조선을 개국할때 팔도의 인구는 일백만 조금 넘었고 조선말기엔 대략 900만 인구로 추산합니다.

물론 개개인에 주민등록증인 호구단자가 발부되었는데, 1870년 전후 해동지도에 나타난 평창군(당시 5개면)인구는 4천여명이며 강원도는 30만 인구에 강릉 대도호부는 3만8천명, 원주 목은 3만2천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틀리는 의외로작은 인구수를 가집니다

그러기에 봉평에서 원용팔 의진에 가당한 의병이 일백명이라하면 동학의병에서부터 을미의병은 여러 의진이 활동하던 당시로 이 지역은 민용호, 이강년의진등 모든 의진이 활동처였기에 인구 비례수에 원용팔 의진에 가담한 봉평의병들의 숫자는 상당히 많은 숫자이며, 이중 원용팔 의진의 참모종사로 봉평의병중 9명이 가담하였던바 봉평유림들은 화서학파의 을미의병의 저반적 기조 세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봉평의 유림들 대부분이 화서학파의 유중교, 김평묵, 유인석의 문인들입니다.

이 중에 특히 조명되어야 할 부분은 봉평유림 추성구 선생의 子 추병정선생이 함께 참모종사로 가담하였던바 이는 화서학파의 기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부자가 의병에 가담한 사례로는 임진 호남의병인 고경명을 들 수 있는바 그는 의병장으로 전투에서 첫째 아들을 잃자 또 다른 전투에서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나갔던 이야기를 들 수 있으나 추성구 선생은 부자가 같은 참모종사로 가담하였던 점은 시민사상의 발로로 추대되어야 한다.

◆ 정미의병 (평창의병 3)

고종의 폐위사실에 전국적으로 항거하였던바 그 기록중 대화기록만 남아있는데 정미의병당시 일본 순사들은 대화 남산으로 도주하는 의병 40여명은 사살하였다는 기록만 존재한다

◆ 3,1 독립운동 (평창의병 4)

평창의 3,1운동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충분히 조사되고 고찰되었기에 생략하며. 이승노 옹의 경우는 10여년전 보훈처는 묘역까지도 정비, 단장하여 주었다 한다.

이 부분에서 도암면은 당시 정선군에 편입되었다가 1930년대 평창군으로 이관되어 정선군 3,1운동 기록에 나타나는바 이러한 면에 이해로 당시 일제초기는 행정단위를 변경하여 도암이 정선군에 편입되었으며 운교리는 운교면으로도 등재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착오없으시길 바랍니다.

◆ 평창의병의 이해

이러한 의병 모두, 즉 동학운동에서부터 3,1운동까지 모두를 정부는 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여섯명의 학자들이 조명한 독립운동사 책은 비매품으로 공공도서관에서 열람해 볼 수있다.

위에 논고는 간략하고 점검도 없이 한줄로 우선 쓰는바 여기에 문제는 평창으로서는 아직 의병 조명이 안되고 있는 점이다. 물론 봉평에서도 13명의 의병이 훈장이 추서되었지만 지방의 문화로는 아직도 수용이 안되는 점을 지니고 있다.

비근한 예로 옆의 타 군인 횡성군만 보더라도 의병탑, 의병비등 약 30여개의 의병 현충시설이 조명되어 있다. 그러나 평창에는 단 한점도 없으며 강원도 역사책에서도 의병 현충시설에 유일하게 평창군만 한 점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평창과 특히 봉평은 구한말, 일제강점시에도 의(義)를 중요시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고장이다. 평창의 군수 엄문환은 동학난시 평창인 20여명을 죽게 하였다고 을미 전기의병시 평창군수를 탑관오리로 체포하여 처형하였으며, 앞으로 이러한 여러 이야기들을 조명 하겠습니다.

이를 토대로 하여 평창에서도 현충시설이 세워져야 한다.

후평리는 동학 최후의 항전지로서 동학의 종미(終尾)탑과 봉평에서는 화서학파 유림의 추모공원, 그리고 대화에서는 정미운동시 남산으로 도망가며 왜놈 순사들의 총에 사살된 40여 의병을 위한 충혼탑은 최소한 건립하여 먼 후일까지도 순국한 의병들의 충혼의 넋을 기리고 또한 우리의 기상을 표출하여야 한다.

하나의 보기 예로 인터넷에 이강년 의병장을 검색하면 문경에 있는 그의 사당이 나옵니다. 그 사당의 사진을 보면 빈 공간의 마뜨까지 잘 조화된 점으로 위엄을 느끼는 사당의 전경을 볼수있는데 얼머나 늠름한 기상이 흐르는지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화조명은 국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지방민들이 노력한 결실입니다

이강년은 대화쯤에서 전투에 부상을 당하고 주천으로 퇴각한 바 부상으로 활동력이 늦어져 체포되어 학살당하였습니다. 그는 동학때도 또한 을사의병에서도 제천전투등에 가담한 화서학파 유인석의 문인입니다.

또한, 의암 유인석은 춘성군 남면 출신으로 현재 의암댐은 그의 호에서 연유되었던바 단발령이 내려지고 그의 부대는 방림에 주둔하다가 제천쯤으로 이동해가는데 영월쯤에서 유중교의 사망소식을 전해듣고 바로 즉시 의병장으로 의암 유인석을 추대합니다. 이것이 영월에서 을미의병을 창의했다고 하는 것으로 영월군청앞에 5m 높이의 을미의병의 창의비도 세우고 영월의 기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평창은 무엇했습니까??

그저 섶다리가 아니라 징검다리를 건넜다는 쾌쾌한 고찰하나 하면서 자칭 향토사가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지난해에 출간된 책에서 평창의 역사는 오류를 넘어 왜곡까지 자행하며 망나니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정원대는 지난해 평창군 예산으로 출간한 "평창에 인문지리"란 책에 목차에 단원의 하나로 "동비토론"이란 단원을 가지고 있다.

이 단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평창의 인문지리책 인용>+++++

동비토론(東匪討論)

* 주- 동학농민전쟁 자료총서 12

*문헌자료

1894년 11월 3일 평창 후평에 모인 비도(匪徒)1,000명은 기세가 대단하여 관아를 공격하려고 첩보를 입수하였다.

출전-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의 역사", 2019, 증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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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동비토론이란 단어의 뜻을 확인해 본다.

東匪討論에 한문 뜻은 匪(비)는 아닐비 또는 도적비, 무장공비라 할때 쓰는 비자 입니다. 그리고 討 (토)는 칠토, 즉, 쳐서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즉 東匪討論 동쪽 도적무리들을 쳐죽이길 논하는 뜻이 됩니다.

책에서 내용으로는 본문 문헌자료란에서 匪徒 1,000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고 서술하였다.

匪徒란 공비같은 적들의 무리들이 천명 죽었다하는 서술에 그럼 동쪽 도적떼 무리 천명의 목숨을 았아갔다라는 문장이 됩니다. 여기서 도적떼대신 동학의병이라고 서술해야 단어적 이핼ㄹ 극복하는 것입니다.

동비토론이나 비도란 문장은 동학농민전쟁 자료총서 12권에 실린 당시의 전쟁 사료입니다. 그것에 대한 동학학회의 주장은 아니란 사실이다.

이것은 동학농민 전쟁 자료로서 모아진 책이지 농학학회에서 동학농민을 비도로 규정하자는 이야기는 아닌바 평창 역사서에서 이 자료에 전사를 인용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마치 평창역사 단원으로 채택한다면 그것은 평창의 역사를 그르치는 것으로 동 책의 저자는 평창의 적이 됩니다.

일전 필자는 평창의 임란사에 하도 오류가 심해서 호구록을 이해하기 위해 호구록과 연려실기술, 선조실록을 한달간 뒤졌고 일본 임진란사 여섯권의 책도 비중있게 보았습니다. 물론 앞으로 1년내로 전수 소명기록하겠습니다만 여기서 일본측 임진란사 자료도 평창역사서가 됩니까?? 일본은 조선을 비하하는 책으로 서술하였건만 이를 그대로 인용해서 평창을 저해해도 괜찮습니까??

단재 신채호 선생의 논에 따르면 역사는 我 와 非我의 대립이라 하는데, 평창에서의 동학군을 娥로 본다면 동 책 동비토론은 非我쪽에서 서술한 전사 기록이므로 그들이 평창의병을 폭도라 하고 비도라 하여도 평창의 我쪽에서는 영웅이고 의병입니다.

가령 안중근 의사를 의사라고 기록하는 것입니까?? 이등박문을 저격한 폭도로 서술한 점은 매우 우감이다.

그러기에 " 평창의 인문지리" 책은 아나 비아 양쪽의 전사기록 모두를 가지는 자료총서가 아니고 평창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기에 이는 소명자료를 준용해서 我의 사관적 견지에서 재해석하여 기록할 문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 필자는 정원대가 평창 동학농민을 비도라고 한 점을 오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동 책의 저자 정원대의 입장표명이 있어야 합니다.

비도라고 한점은 역사 소명의식이 부족하여 오류를 했다거나 아니면 동학 농민은 비도라고 주장을 하던 둘중의 하나에 입장 표명이 없다면 그냥 비도로 헤석하기에, 정원대는 평창역사를 저격하는 일본군 똘마니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면 동학에 민보군이 척결한 것이 아니라 후평리에서는 일본군이 동학 1,000여명을 사살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어떤식으로든 입장 표명을 하여야 하고 그냥 지나간다면 정원대는 평창동학을 무장공비같은 비도로 매도하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 봉평을 위한 제언의 소결

평창 동학 조명 이야기에서 다시 돌아와 봉평을 위한 제언중 일부인 봉평 화서 유림학파와 을미의병의 구심점으로서의 봉평을 대강 이야기하였습니다.

여기에 평창으로서는 여러 평창의병의 충혼탑이든 현충 시설을 갖추기에느 평창 스스로의 논지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정부측, 차원에 여러 논증의 고증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유독 평창으로서는 이러한 현충시설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겨울을 지나며 필자는 모자라는 힘이라도 동학사든 독립운동사에 준용하여 여러 이야기를 하나의 평창이야기로 구성해 편저할 것입니다.

이런 이후에 평창인들의 중지를 모아 평창의병 현충시설이 가능해질 것이기에 이때는 평창인 모두의 중지를 모아야 할 듯 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일전에 필자는 수항리 탑이 지금은 2층 옥개석으로 남아 있는데 3층탑이라하니 의심스러워서 과거 평창예총에서 11인 이상의 학자들이 모여서 수항리사지가 수다사였다는 취지의 세미나를 하였는데 필자는 고고연구원에서 동 세미나 리포트를 꺼내서 읽어보니 동 탑의 리포트는 너무나 오류가 심하였습니다.

현장에 가서 자로 재어보니 두번 답사하였다는 리포트의 일부는 오류로 판명되고 규명할 점이 많아 논문을 쓰기로 결심하였는데 문제는 탑의 책이 별반 없어서 필자는 탑의 박사 또는 석사논문등 30여편을 구하여 독파하고 새로운 탑의 개념으로 조형적 원리를 창출하며 논문을 써서 역사편창위원장 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점에 자랑보다 이후 필자는 수다사라는 기록의 문헌도 찾고 고지도 4편에서 청심대아래 수다란 지명도 찾았습니다. 아마도 후일 수항리 사지를 수다사지로 조명하기엔 이러한 본인의 연구를 밟지않고는 할 수 없슬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선례처럼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봉평 유림을 새로 조명하여 봉평유림문화의 가치관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봉평 제안의 소결이라고 한 점은 봉평 문화사에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무렵을 스토리텔링화 하는 봉평 메밀꽃 축제장이 그간 봉평민들의 노력에 의하여 전국적 테마의 문학공원으로 높이 올라섰습니다.

이러한 문화에서 앞으로는 종적인 높이로 상승에서 수평적 전환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봉평엘 가니 너무나 단편적이더라 하는 이야기도 있건만 봉평은 위에 논고한 유림들의 문향이었고 또한 신사임당이 18년 살아온 바 율곡에겐 고향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지난해 용평에서 판관대,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길란 주제로 세미나를 하였습니다. 백옥포 3리는 현 용평면 구역이지만 신사임당은 당시 봉평 창에서 만날수있는 봉평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세미나 자료집은 탈고중으로 곧 책으로 출간됩니다만 여기에서 필자는 판관대는 잉태지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파악을 하였습니다.

필자의 논문에서는 여러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판관대는 학자들의 그간 세미나에서 잉태지로서 놀이문화를 창출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그것은 외람된 이야기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위인으로 자리매김 해야 합니다.

지금껏 위인으로 성웅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하고 모든 사람들이 줄줄이 외우는데 이러한 현상의 출발점도 기록하였지만 이러한 무인으로 한 나라의 문화의 꽃을 피우기에 총, 칼 싸움만 하자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율곡 이이 선생은 문무반반이라야 밝은 사회로의 지향이라 하셨고. 본 논문에서 오죽헌은 국가적 사업으로 조명되는데 판관대는 당시 시인 이은상이 봉산서재는 갖지도 않은것 왜 받드냐고 그의 여러 책에서 저격하였던 점등도 기록하였는바 논문집이 출간되고서 논문 해제에서 판관대에 대하여 더욱 평창적인 이해를 게시하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에서 봉평의 팔석적은 왜 정자가 없습니까??

팔석정은 양사언의 필체도 아니고, 원래의 팔석도 아니며 양사언의 기록은 전무합니다. 그러나 봉평 유학자 신범선생의 봉서유고 판관대기 편에서는 팔석정은 율곡의 맏형 죽곡 이선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기 위해서 정자를 짓고 불을 피워 글을읽고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팔석정의 정자는 유락이 아닌 공부를 위한 정자로 다시금 조성함은 어떠하십니까??

행여 판관대가 뭐냐고 하신다면, 필자는 논문집에 글 한편을 소개합니다.

일전 영월은 황금연휴철엔 대박났다고 그들이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동광과 김삿갓 문학관만 의존된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에 영월엔 기자 박물관, 곤충박물관, 심지어 아프리카 룰루랄라 박물관까지 작은 박물과 30여개가 있어서 초, 중생들에겐 학습의 장이되기에 전국의 모든 학부모들의 선망의 대상이있던 점입니다.

봉평의 역사에서도 으뜸가는 여러 소재를 가지고 있는바 지금이라도 이러한 점들이 소명되고 정비되어 메밀꽃 축제장의 봉평문화에 수평적 문화사로 어울러져서 전국 최고의 레져, 문화의 장으로 조명하심은 어떠하십니까??

봉평 제언 2부에서 판관대를 조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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