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은 율곡 이이의 탄생지 이다. 오죽헌의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평창군에 율곡 이이가 여섯 살까지 살았으며 사임당이 18년간을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에 살았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 공의 벼술 이슬을 딴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 라는 사실만 전할 뿐이었다.
그런데, 율곡이 여섯 살까지 살았던 생각가 1906년까지 평창군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이 본보가 주관하는 평창율곡고향마을 역사정립세미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이 자료는 평창의 추성구 옹 등 유학자들이 봉산서재를 건립하고 여기에 율곡 이이와 화서 이항로 등을 함께 배향할 것에 대하여 의암 유인석이 1906년 추성구에게 쓴 편지 내용에 율곡의 잉태지로 알려진 판관대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편지의 일부를 살펴본다.
“ 율곡이 수태된 그 곳의 판관대기가 빈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곳에 특별히 율옹(栗翁;율곡이이를 지칭함)의 사당을 짓고 지금 짓고 있는 사당 건물(주:봉산서재)에는 화옹 이하의 유상을 받든다면 일이 적절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한 마을에 사당이 둘인 것도 영 마땅치 않으니 그저 율옹만 모시고 마는 것도 못합니다.”
이 편지에는 1906년 ‘판관대가 빈 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 바, 이 당시까지 판관대는 단지 터가 아닌 건물로 사임당이 기거한지 400여년을 견뎌왔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평창군민들은 ‘이 곳이 단순히 율곡의 잉태지가 아니라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결혼 후,18년간 살았던 살림집이 있엇으며, 이곳에서 율곡이 여섯 살까지 자랐던 고향’이라며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율곡고향마을역사정립세미나’(코로나 19 거리단계2단계 시행으로 무기연기)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