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에는 판관대(判官垈)가 있다. 이 곳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를 잉태한 곳으로 알려졌으며 신사임당이 살던 때에는 강릉대도호부에 속하고, 봉평(蓬坪)으로 불렸다.
신사임당은 1504년 강릉에서 태어나 1522년 남편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으며, 1524년 한성에 왔으며, 그 후 임영(臨瀛:강릉)의 친정집에 가기도 하고 봉평(蓬坪 : 현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 판관대)에 살기도 하였다. 신사임당은 1541년 한성 수진방으로 이사하였으며, 1550년 남편 이원수가 수운판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인 1551년 삼청동으로 이사한 후 4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사임당의 생애는 율곡 이이가 지은 “선비행장”(先妣行狀:율곡선생 전서 18권 행장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1524년부터 1541년 사이에 봉평에 주로 살면서 친정 어머니가 계신 외가 강릉엘 다녔던 것으로 확인된다.
원문은 “기후혹귀임영 혹거봉평 其後惑歸臨瀛 惑居蓬坪”으로, 한글로 번역하면 “그 후 (1524년 이후) 친정인 임영(강릉)에 들르거나, 봉평에 살았다.”인데, 이이가 직접 적은 글에서 사임당이 봉평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 기간은 1524년에서 1541년까지 만17년이 되며 이 사이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낳았으며(4남 3녀중), 율곡 이이는 그 중 셋째 아들로 1536년에 태어났다.
봉평(판관대: 현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와 임영(강릉 오죽헌) 두 지역 중 어느 곳이 신사임당의 거주지인지는 율곡이 윗글 선비행장에 기록한‘봉평에 살고(居蓬坪)’라는 문구에 분명히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강릉은 친정에 들르거나(惑歸臨瀛)‘라는 문구로 주 거주지가 판관대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혹귀임영 혹거봉평 惑歸臨瀛 惑居蓬坪’여덟 글자는 율곡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居(거)’란 글자는 거처한다는 뜻으로 집을 말한다. 그렇다면‘歸(귀)’는 어떤 뜻일까? 귀 한자로는‘돌아가다, 돌아오다’는 뜻이다. 그러나 율곡이이가 직접 쓴 위의 글 ‘선비행장’에서 ‘자당귀녕우임영 慈堂歸寧于臨瀛’라는 문구가 발견된다. 귀녕은 『시경 詩經』주남(周南)편 갈담(葛覃)에 나오는 말로“시집 간 딸이 친정에 돌아가서 어버이가 편안히 계신지를 살펴보는 것”(「한국고전 용어사전」,세종대왕 기념사업회)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어머니(신사임당)께서는 친정인 강릉에 가서 어버이가 편안하신지 살펴보았다.”가 된다. 위의 여덟 글자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어머니께서는 강릉에 친정어머니를 뵈러가거나, 봉평의 집에 계셨다.”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통설은 강릉 오죽헌이‘율곡이 태어난 곳’이며, 판관대는‘율곡이 잉태된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평창 지역과 강릉 지역에 이이의 잉태(배태)와 탄생 등에 관한 설화들이 있을 뿐이다.
1,800년대 후반의 유학자 신범(辛汎)의 문집인 봉서유고(蓬西遺稿)에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옛 노인이 서로 전하던 말 중에‘선생(율곡 이이)은 봉평에서 임신하고, 죽헌에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죽헌의 사람은 말하길, ‘그렇지 않다. 선생 가족은 죽헌에서 살았고 선생은 죽헌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까닭에 이 곳에 몽룡실(夢龍室)이 있다.’고 한다. 대개 그러한가 그렇지 아니함이 상세하지 않다.
고 지적하고 있다.
같은 글에서
“갑신년(1524) 이후에 간혹 임영으로 뵈러 갔다가 간혹 봉평에 거처했고, 신축년(1541)에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고 했으니 갑신년 이후와 신축년 이전은 죽헌에서 살지 않은 것 같다.”
고 임영과 봉평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고 임영과 봉평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선비행장”의 기록은 당대에 율곡의 출생과 거주지에 대한 유일하다시피하고, 율곡이 직접 적은 역사적 기록으로 봉평에 신사임당이 결혼 후 17~8년간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바, 태어난 곳과 잉태된 곳의 근거는 다만 분명하지 않은 구전과 전설뿐이며 혹시 율곡이 태어난 곳이 오죽헌이라도 외갓집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태어난 곳이다. 판관대는 신사임당의 신혼살림 집터이며 율곡의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평창문화원에서는 2016년에는“율곡 선생 잉태지 판관대 재조명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2019년에는“판관대 문화콘텐츠로 스케치하다”라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심포지엄의 자료집 곳곳에서는 봉평(판관대)에 거주한 기간에 대해서 혼돈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강릉원주대 장정룡 교수는 자신의 발표문 안에서 “신사임당이 33세를 전후하여 현재의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 이곳 판관대에서 4년여를 살았다고 전한다.”(2019년심포지엄 자료집) 고 주장하다가 “사임당이 봉평에 거주한 시기는 1526년부터 약 10년간으로 1536년 2월 하순에 이곳 판관대에서 율곡을 잉태하고, 강릉 오죽헌으로 가서 12월 26일 동방의 성현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10년설을 주장하더니 다시 바로 뒷 문장에서 “사임당이 봉평에 거주한 시기는 약 4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기간에 강릉과 파주를 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는 등 가장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해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파주는 신사임당의 시댁이라 하고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가이며 친정이라 할 때 백옥포리는 당연히 신사임당의 신혼집이며 율곡의 고향이란 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창에서 판관대에 대한 두 차례의 심포지엄은 잉태지라는 설화적 내용에 치중하여 판관대가 율곡의 고향이란 점의 의미를 찾아가지 못하였던바 아직도 역사에서는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어 있다.
또한 판관대의 위치에 대해서 많은 연구자들이‘서울서 강릉을 다니기에 쉬어가기 위해 집을 마련하였다.’또는‘과거를 보러 다니기에 힘들어 그 절반쯤에 살았다.’는 등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현재로 보면 판관대는 고속도로 바로 옆에 위치하여 서울-강릉을 오가는 도로의 한 지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특히 조선시대의 길은 지금과 다르다. 해동지도에서는 대관령은 중로(中路)로 표기되며, 한양에서 강릉으로 가는 관동대로는 문재, 전재를 넘어돌아 대화신리에서 모리재를 넘어 수항천의 청심대를 돌아 진부 송정으로 나가는 길로서 현재도 잘 포장되어 있다. 따라서 김홍도가 관동팔경을 유람할 때 관동팔경 유람기 화첩에 첫 번째로 청심대를 그리고 두번째로는 월정사와 오대산 사고를 화폭에 담으며 대관령을 넘었다. 판관대는 이 길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 마을이다. 판관대를 한성과 강릉의 중간 의 한 지점으로 만나기 편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도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는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다.
율곡 이이의 생애에 관련된 유적지는 단 세 곳뿐이다. 율곡이 태어났다고 주장되고 있는 강릉의 오죽헌, 율곡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평창의 판관대, 그리고 율곡 선영의 묘소인 파주의 자운서원이 그곳인데, 오직 평창 판관대만이 제 이름값을 찾지 못하고 씁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시 율곡의 고향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