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Gustave-Charles-Marie Mutel 한국명 : 민덕효 1854-1933)는 1890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대목구장(주교) 지낸 프랑스 출신 신부이다. 1900년 11월 6일 평창지역과 횡성지역을 관할하는 풍수원 성당으로 들어와 평창지역은 11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순방하였다. 그 기록을 옮겨싣는다.
정원대,『평창의인문지리 증보판』,평창문화원,2020.pp.401-408
뮈텔주교 약력(클릭)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81년 조선으로 파견 와서 선교에 힘쓰다가,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 5년 후인 1890년에 제7대 조선대목구장인 장 블랑(백규삼) 주교가 선종하자 그 뒤를 이어 제8대 조선 대목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발을 디딘다.
천주교의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하며,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1906년 경향신문의 전신인 구 경향신문을 한글로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선교와 계몽에 힘썼고, 독일 성 베네딕토회에 조선 진출을 요청하여, 1909년 베네딕토회 독일인 수도자들이 서울 백동(現 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워 활동하게 했다.
한국어와 한문에 능했고 한국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도 교류가 있었다. 그 외에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뮈텔 본인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해서 “조선 정부가 엄히 처벌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감평을 내놓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사료를 수집·연구해 교황청에 보고함으로서 1925년에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당시의 79위 순교자가 시복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들 모두는 1984년에 시성됐다. 또한 본인 스스로 진솔하고 자세한 일기를 저술하여 일제 치하 서양인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 본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러한 공적으로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친일 논란을 빼고 보면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평가받는다. 1926년 대주교로 승품하였고, 1933년 선종하였다.
1910년 2월 안중근 의사가 사형집형 전에 고해성사를 받기를 원했으나, 뮈텔주교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사실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뮈텔신부는 일기를 저술하였는데, 1900년 11월14일부터 11월22일까지 평창지역을 순방한 기록이 남아있다.
〇 1900년 11월 14일
오늘 아침에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는 우리가 다음 공소인 서내(봉평면 유포2리)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산을 넘어 30리를 갔다. 이 고지대에는 소나무는 없고 떡갈나무만이 있다. 그것은 서서히 자라서 마침내 상당히 큰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정오경에 서내 교우촌에 도달했다. 나는 1882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집은 같은데 증축되었을 뿐이다. 노인인 문회장은 74세의 고령에도 건강했고, 그의 오소리 가죽모자가 특히 돋보이게 하였다. 고해자는 100명, 오늘 저녁부터 성서를 주기 시작해도 내일 하루로는 벅찰 것이다. 교유 들은 가난하고 순박한, 가장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〇 11월16일
다음 공소인 향교터로 떠났다. 서내 계곡을 다시 넘어 얼마안가니 창목동 교우촌이었다. 이곳 교유들은 성사를 받으러 서내로 가기위해, 매우 험한 10리길을 걸었던 것이다. 저녁 때까지 40여 명에게 고해를 주었다. 이곳은 거의 평야지대여서 교우들은 특히 논농사를 짓는다. 이곳에서 맹인이 된 피대울의 옛 공소회장 김베드로를 다시 만났다.
〇 11월 17일
30리길인 공소로 출발 산 하나를 넘고 운교 아래에서 서울-강릉 간의 도로를 지나, 매우 높은 원당이 고개를 넘었다. 다음 세 번째 산을 올라가는데 그 산 반대쪽에 물푸레 공소가 있다. 겨우 48명의 고해자와 7명의 영세자 밤 11시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〇 11월 18일
주일 11시가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하일 공소에 가려면 10리만 내려가면 되었다. 고해자는 겨우 40명 정도, 주실의 많은 남녀들이 150리 길을 걸어 이곳까지 성사를 받으러 왔다.
〇 11월19일
마을 앞 평창강을 건너 10리를 내려가니 강 오른편에 읍내가 있었다. 거기서 한 계곡을 따라 내려갔는데 계곡에는 출 굴이 여러 개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물이 솟고 있었다. 10리를 더 가서 이 계곡이 끝나고 더 좁은 계곡이 시작되었다. 언덕은 가파르고 산은 매우 높았는데 그 맞은 편에 산너미 공소가 있었다. 공소 집은 1882년의 것이었으나 조금 확장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집주인은 바뀌었다. 저녁에 약 40명의 고해를 들었다.
〇 11월 20일
밤에 비나 내렸고 아침에도 가는 비가 계속 내리면서 온종일 우리를 따라다녔다. 새골 옛 공소로 가려면 어제 첫 번째로 지나왔던 계곡을 다시 지나쳐야 하므로 어제 올라갔던 계곡을 내려갔다. 30리에서 산하나를 넘었는데 길이 미끄러워 내려가기가 좀 힘들었다.
새초거리 큰길의 한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서 10리를 더 가서 내가 1882년에 하룻밤을 지낸 바 있는 부정(반정)을 지났다. 태화(대화)에는 교우들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거기서 겨우 10리 길에서 공소 교우들과 헤어졌다. 모두 70리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마지막 공소인 아오스딩 신부의 고인돌 공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모레 나를 수행하기로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영동의 짐꾼들이 여기서 하루를 쉬고자 벌써 저녁에 도착했다. 공소 집주인인 한 이시도로는 꽤 잘 살고 있으나 큰 근심거리가 있다. 그의 아들이 영세를 하고 결혼을 했는데도, 자신의 젊은 아내가 똑똑하지 못하고 일을 할 줄 모른다는 구실로 아내와의 동거를 거부하고 아내를 저버린 채, 2년전부터는 수계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〇11월 22일
아오스팅 신부와 교우들과 작별한 후, 9시경에 고인돌에서 안내자 한명과 영동의 짐꾼 두 명이 우리를 수행했다. 우리는 평창으로 흐르는 고인돌의 강을 30리를 거슬러 올라간 후, 작은 언덕을 넘어 정선 연못에 이르렀다. 20리를 더 가 큰길로 들어서서 진부주막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25리만 걷고 언덕 밑에 있는 높은 다리라고 불리는 한 주막에서 묵었다. 설사는 계속되고 있다. 꽤 따뜻환 방에서 잤다. 하지만 방에다 귀리를 말리려고 널어놓았기에 몹시 눅눅했고 습기가 요와 이불에 스며들어 축축했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꽤 찼다. 말을 타고 얼어붙은 시내를 건너야 했다. 말이 건너가도 얼음은 깨지지 않을 정도 였다. 11시쯤 완만한 경사를 타고 대관령 꼭대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