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金遷)은〉 충렬왕이 입조(入朝)하게 되자 다시 〈원에 어머니를 구하러〉 가기를 요청했지만, 조정이 논의는 처음과 같았다. 〈김천이〉 오랫동안 개경에 머무르느라 옷은 해어지고 양식이 떨어져 울적하고 무료하게 지내다가 우연히 길에서 같은 고향의 승려 효연(孝緣)을 만났다. 그에게 울면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효연이 말하기를, “자기 형인 천호(千戶) 효지(孝至)가 마침 동경(東京)에 가니 너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라며, 곧 부탁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김천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모친의 편지를 받은 것이 6년 전인데 어찌 아직 살아 계신지 어찌 알겠소? 또 불행히 도중에 도적이라도 만나면 공연히 목숨과 재물만 잃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김천은 말하기를, “가서 만나보지 못할지언정, 어찌 목숨을 아끼겠소?”라고 하였다.
마침내 효지를 따라 동경으로 가서는 고려 역어별장(譯語別將)인 공명(孔明)과 함께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로 찾아가 모친 있는 곳을 수소문하였다. 군졸 요좌(要左)의 집에 당도하니 한 노파가 나와 절하는데 다 떨어진 옷에 쑥대머리를 하고 얼굴에는 때가 끼어 김천이 보고도 자기 모친임을 알지 못하였다. 공명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그 노파가 대답하기를, “저는 본래 명주 호장(戶長) 김자릉(金子陵)의 딸입니다. 오빠인 진사(進士) 김용문(金龍聞)은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저는 호장 김종연(金宗衍)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은 김해장·김덕린이라고 합니다. 김덕린은 저를 따라 여기에 온지가 19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서쪽 이웃에 사는 백호(百戶) 천로(天老) 집의 종으로 있습니다. 오늘 다시 고려 사람을 만날 것이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천이 그 말을 듣자 엎드려 절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니, 모친도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네가 정말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벌써 죽은 줄로만 생각했구나.”라고 하였다. 요좌가 마침 집에 없어 김천이 모친을 구해내지 못하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별장 수룡(守龍)의 집에 한 달을 머물다 수룡과 함께 다시 요좌의 집에 가서 속량하길 요청하였는데, 요좌가 듣지 않았다. 김천이 애걸한 끝에 은 55냥(兩)을 주고 속량한 후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따라갔다. 김덕린이 전송하러 동경에 와서는, “편안히 돌아가세요. 지금은 비록 따라가지 못하지만 만일 하늘의 복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만나는 것을 기약할 것입니다.”라고 흐느끼니 모자가 서로 안고 울면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 마침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고려로 돌아가는 길에 동경에 당도했는데, 김천 모자를 불러 보고 칭찬을 그치지 않았으며, 총관부(摠管府)에 부탁해 〈여로에〉 음식과 숙박 시설을 제공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여 보냈다. 명주에 당도할 즈음에 김종연이 그 소식을 듣고 진부역(珍富驛)에서 맞이하니 부부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김천이 부모에게 술을 따라 올리고 물러나 통곡하니,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자릉은 그 때 79세였는데 딸을 보고 기뻐하다가 기절하였다. 그 후 6년 뒤에 천로(天老)의 아들이 김덕린을 데리고 오자 김천이 은 86냥(兩)을 주고 속량시켰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모친과 동생을 속량하기 위해〉 빌린 백금을 모두 갚고 동생과 함께 평생 효도를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