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굴과 노성산, 평창의 임진왜란 이야기

전형민 승인 2020.03.28 00:01 의견 3

절개산을 병풍처럼 둘러싼 평창군 평창읍 응암리에는 ‘매화마을’이란 곳이 있다. 평창읍 남부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지형이 ‘매화낙지형’이라 하여 매화마을로 불린다. 이 매화마을에는 응암굴이 있다. 거꾸로 생기는 고드름으로도 유명한 이 응암굴은 평창군수 권두문이 왜적을 피해 평창군민과 함께 숨어 있다가 일본군을 맞아 이틀간 저항한 임진왜란의 전전지이다. 두 개의 천연동굴로 아래쪽에는 민간인들이 피난하였다고 하여 민굴, 위쪽 굴은 관인이 피난하였다고 하여 관굴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굴을 합쳐 응암굴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굴의 아래 쪽에 강돌로 진지를 구축한 ‘왜담’도 있었다고 하나, 1980년대에 공사로 인해 형태가 사라졌다고 한다. 평창군에는 이 응암굴과 노산성의 두 곳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지로 확인된다. 노산성에는 ‘임진노성전적비 壬辰魯城戰蹟碑’가 세워져 있어, 이 곳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지임을 알리고 있으나, 응암굴에는 별다른 표석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
 이 두 곳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의 전투현장을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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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발발하였다. 왜군은 모두 9번대의 육군과 해군 등 20여만명이 침입을 한 것이다. 이 중 평창군에 침입한 왜군은 주장 모리(毛利吉成)와  시마즈(島津義弘)의 연합부대로 4번대로 모두 1만4000명 가량이다. 4번대는 부산진에 상륙하여 김해에서 창년을 점령한 다음 성주 개령을 거쳐 추풍령을 거쳐 옥천 청주 용인 수원 한성에 도달하였고, 한성에서 철원, 평강, 김화, 회양을 점령한 후 철령을 넘어 함경남도 안변으로 들어가서 다시 강원도 영동지역으로 남하하여 강원도 지역을 유린하였다. 왜군은 안변에서 통천 간성을 거쳐 일부는 양구 인제로 들어가고 주력부대는 7월경 삼척으로 내려가 두타산성을 함락시키고, 일부는 남하하여 울진, 평해를 점령하고 주력부대는 삼척의 서쪽 백복령을 넘어 정선 영월을 유린한 후 평창지역으로 들어왔다.
 한편 조선군 중 강원도의 지방군은 원주의 주둔둔이 주력이었는데, 임진왜란 초기에 충주전투에 파견되어 4월 27일 크게 패하여 괘멸되었다 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충주 패전 후 강원도의 각처에 있던 지방군은 한성으로 징발되어 경사에 편입되었으니, 강원도에는 정규군이 거의 없게 되었다.
  평창에 권두문 군수가 부임한 것은 1592년 3월이었다. 임진왜란은 그해 4월 13일 발발하였고, 한성이 함락된 것은 5월 1일, 강원군수를 약속받은 모리가 이끄는 왜군 제4진이 삼척에 도착한 것은 7월경으로, 권두문 군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노산성을 보수하고 군병을 정비하는 등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군이 평창에 침입한 것은 8월 7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평창 노성산을 둘러싼 왜군과 권두문 군수 등 조선군의 대응에 관해서는 기록이 달라진다.
  2003년 발간된 『평창군지』에는 “ 삼척 두타산성 싸움을 치른 왜병들은 임진 음력 8월 7일 백복령을 넘어 정선군 지역을 약탈하면서 평창 동북쪽 44리에 있는 성마령과 그 북쪽에 있는 별패재를 통과하여 평창군 지역으로 쳐들어 왔다.  임진년 3월(1592)에 부임한 평창군수 권두문은 기존의 노성산성을 중수하고 민관군 수백명을 거느린 채 노성산성에 웅거하면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여만리 쪽에서 들어온 왜군의 군세가 강하여 성이 파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평창읍 노산성안의 「임진노성전적비」에는 “군수 권두문은 선조 초 김광복이 축성하였다는 길이 1364척 높이 4척의 이 노성을 진지로 왜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나라에 대한 걱정과 의로운 분노에 가득차 일어난 백의 의병이 구름같이 모여 이 노성을 하얗게 덮었으며 여기 의병을 지휘통솔한 장수는 지사함 우응민 이인서였다. 왜군과 일전을 마다하지 않은 백의 의병은 그대로 격렬한 싸움을 치루어 왜병의 목을 수없이 베었으나 따라서 의병의 피해 또한 적지 아니하여 성 주변은 피의 골짜기를 이루었다. 급기야 왜군은 여만리 쪽으로 야습하여 강을 건너 침입불가하다고 믿었던 천길 절벽을 기어올라 조총 등으로 성을 치니 세 불리로 성을 지킬 수가 없게 되어”라고 기록하여 노산성에서 의병까지 가세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남천선생문집 제2권』 「호구일록 虎口日錄」에는 노산성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 호구일록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평창 군수를 지내던 권두문이 8월 7일 응암굴로 피신하여 왜군의 칼을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로 포로가 된 후,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그해 9월 2일 벽에 구멍을 뚫고 지붕을 통해 탈출에 성공하여 안전한 지역으로 빠져나가 9월 17일 가족과 다시 상봉하기까지 약 40여일간의 고통스런 행적을 기록한 난중일기이다. 평창군수 권두문이 쓴 호구록 중 응암굴로 피신하여 왜군의 공격을 받고 군수 일행이 체포되어 투옥되는 며칠간의 부분을 간추려 보도록 한다.
  왜군이 도착하기 전부터 권군수는 얼마 되지 않는 군사로 왜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왜군을 피할 장소를 가족이나 참모들과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평창읍에서 6km 정도 떨어진 응암굴로 피난할 것을 작정하였다.
  응암굴의 모습과 왜군에 대한 대비를 권두문 군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당시 응암굴은 아랫굴에 피난민을 수용하고 윗굴에는 관청 사람들의 가족을 수용했다. 전봉사 지사함을 대장으로 정하고 심복부하 100여명으로 삼아 굴 바깥 대(외대)에 울타리를 만들어 방패를 하고 군기와 석차를 나열해서 적을 방비토록 준비하였다. 외대 좁은 계곡 양편에도 역시 장비를 갖추었다. 그 계곡의 양쪽 언덕은 마치 돌로 세운 문처럼 되어 있고 그 안에서 마실 물이 솟아나고, 또 굴 안에 먹을 양식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기갈을 면하는 데는 조금도 걱정할 게 없었다. 또 산의 사방 어느 쪽도 적이 통행할 수 없고 오직 이곳으로 들어 올라하면 그 돌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으니 비록 적이 이곳으로 온다 해도 배를 감추고 사다리를 떼어버리면 올라오지 못할 것이고 한꺼번에 화살을 쏘고 석차로 대항한다면 한 사람으로 능히 여러 사람을 당할 수 있을 것이나 천연의 요새지이다.”
 왜군이 평창에 들어오면서부터 권두문 군수가 왜군에게 잡히기까지의 기록을 살펴본다.
▶ 8월 7일 (맑음)
  영동의 왜적이 모두 큰재(大嶺)을 넘어 무기와 장비를 정비하고 형세를 정찰한다. 이날 밤을 타고 적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군에 쳐들어 왔다. 급기야 배를 불러 강녀, 주 및 고언영외 노비 4-5명을 굴에 들게 하고 지사함과 품관 지성 우응민, 지대용, 지대명, 이인서, 이대충 충주에서 피란 온 최업, 우윤선 및 관속 백성 수백명 집안 권솔들과 함께 굴에 들어갔다.
▶8월 8일 (아침비, 오후 맑음)
상호장 이응수, 병방 이난수가 군으로부터 와서 왜적이 군내에 깔려 있다고 하기에 밤에 지사함과 대성 우응민, 윤선, 고인영 등을 왜군 진지에 보내 잠복하고 있다가 활을 쏘라고 하였으나 겁을 먹고 돌아왔다.
▶ 8월 9일 (맑음)
아침에 조파 복병군집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국에 붙은 한사람을 잡아오기에 물은즉 왜서(倭 書)를 가지고 온자로 즉시 명하여 목을 끊었다. 밤에 지사함 지대성, 우윤선, 최엄, 지대명, 관노 흑수 등을 보내 잠복하고 사격하라 하였으나 역시 크게 놀라기만 하고 헛되이 돌아왔다.
▶ 8월 10일 (맑음)
적은 열나흘 밤낮으로 거의 집결된 모양이다. 낮에 약수(평창읍 약수리), 정동(평창읍 천동리) 등지에도 역시 진을 쳤다. 민가가 희소하므로 많은 수의 군막을 친다. 바라보니 놀랄 만큼 어마어마하다. 밤에 미쳐 배와 사다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것을 거두려는 즈음 홀연히 왜병 2명이 길을 찾아 바로 굴 앞에서 손을 이마에 얹고 좌우를 돌아보며 한 놈은 숲속에 감추어 둔 반기를 발견하고 돌로 때려 부순 후 물로 뛰어 오르려 한다. 그 때 지대성이 술에 취해 활을 잡고 쏘려고 하기에 나는 이를 만류하여 “경솔히 화살을 당기지 말고 적이 절반쯤에 오르거든 그 때 가서 돌을 굴려라” 하였으나 대성은 활을 강하게 당겨 쏘았다. 그러나 바로 맞지 않고 놈의 옷만 스치고 지나쳤다. 적은 처음 굴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가 화살을 보고서는 크게 놀라 쫓기어 달아났다. 조금 후 30여명의 적의 무리가 물을 사이에 두고 삼엄하게 서서 크게 아우성을 치니 굴속의 사람들은 모두 혼 빠진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지대성이 일찍이 매를 한 마리 길렀다. 굴벽위에 매를 들고 않으니 왜구들이 매를 달라고 한다. 나는 명령하여 매를 주라고 하였다. 매를 놓으니 훨훨 푸른 하늘 구름 속으로 날아갔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천월대에서 두 군데 갈라서 지키던 군사가 크게 겁을 먹고 쫓겨 오는 것을 외대에서 바라보니 군세는 또 다시 믿을 수가 없었다.
▶ 8월 11일 (맑음)
  미명을 기해서 왜장이 맞은편에 포진하니 왜병이 산의 위아래로 가득차고 적의 선봉은 이미 산곡을 지나 외대에 오르려 한다. 산마루에서 큰 돌을 굴리고 작은 돌과 모래를 퍼부었으나 왜는 대에 오르려고 총을 쏘니 탄환은 비오는 듯하며 양군이 함성을 외치니 천지가 캄캄하고 천약이 진동을 한다. 지사함, 우응민, 이인서, 지대충 모두 총알을 맞아 쓰러지고 고언영의 활은 탄환을 맞아 부러졌다. 다른 활을 잡아 쏘려고 할 때 또 탄환을 맞아 부러졌다. 겨우 몸만 피했다. 나머지 병사는 대오를 잃고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채 굴 안으로 쫓겨 들어왔다. 적도는 이미 외대에 오르고 선봉은 나무로 잔도를 만들어 아랫 굴로 들어갔다. 굴 안의 남녀들은 손을 묶어 구금하였다. 작은 상굴 입구에서 칼을 뽑아들고 나를 나오라고 독촉했다. 아랫굴 에서 윗 굴까지는 세척이나 된다. 아래와 위의 사다리로 적이 오르려 한다. 나는 언영에게 활을 쏘라고 명령하였다. 언영이 활을 당기니 적들은 자빠지며 엎어지며 언덕 밖으로 물러갔다. 이렇게 하기를 8-9차례 반복하였다. 상하굴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심히 높아서 나란히 기어오를 수는 없다. 굴의 입구에서 1~2명의 왜병이 보이고 나머지는 언덕 아래에 있다. 언영이 굴 입구에서 보이는 대로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자빠지며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마치 조개와 황새들 싸움같이 서로 대치하는 동안 벌써 한나절을 넘겼다. 상·하굴 사람들은 거의 포로가 되었고 남은 것은 나와 강녀 아들 주 그리고 언영과 관노 언이 등 몇 명뿐이다.
왜 한명이 몸을 던져 돌입하여 언영이의 옷소매를 잡아 묶으매 나는 두 손에 창을 들어오는 왜를 찌르러 할 찰나 적의 칼은 먼저 나에게 내려온다. 순간에 강녀가 나의 등에 엎드려 ‘나를 죽일지언정 나의 남편은 아니 된다.’하니 주는 나를 껴안고 통곡한다. 굴 안이 좁아서 칼이 벽에 부딪치고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내가 몸을 일으켜 서려할 때에 칼이 내 팔에 맞아 피가 물같이 흐른다. 적은 나를 먼저 묶고 강녀를 잡으니 평상시의 안색과 말투로 “내가 어디 가리오” 하며 나를 따라 굴을 내려오다가 왜병이 손을 잡으려 하니 장차 왜병에게 욕볼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사다리에서 천인절벽에 떨어지니 왜장도 탄식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관노 언이, 임손과 지대성은 오는 중에 도망쳤다. 군청으로 이동 후 심문을 하고 양팔과 몸을 결박하여 굽혔다 펼 수도 없고 근처에서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 기록을 보면 8월7일 왜군이 평창에 진입하고, 권군수는 배를 타고 응암굴로 피신하였다. 8월 10일 왜군이 응암굴에 숨어있는 권군수 일행을 발견하고 8월11일 전투 끝에 권군수는 포로가 되었다. 이후 권군수는 영월 제천 원주까지 끌려 다니다가 원주에서 탈출하여 돌아왔다.
 평창을 유린한 왜병은 둘로 나누어 그 선봉이 영월 주천으로 향하고 16일에는 본대가 이동했으며, 19일에는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로 들어갔다. 이로써 영월지역은 임진년 8월 15일부터 20일 전후 약 6-7일간 왜병의 분탕질을 당한다.
  권두문 군수가 직접 저술한 호구일록은 강원지역의 임진왜란 전투의 희귀한 기록이며, 특히 왜군에게 잡혀있는 동안의 일을 세세히 기록한 가치있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노산성 전투는 없었던 전투이다.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화 되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완전히 사실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도 아닌 이야기로 각색이 되어 전해지기도 한다. 우리시대에 만든 허상의 역사가 아닌 정확하고 왜곡 없는 사실의 역사가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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