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를 사랑한 유정 사명당 이야기

편집부 승인 2020.07.06 10:56 의견 0

 

조선 중기에 청허 휴정(서산대사 1520∼1604)은 오대산에 주석(駐錫)하였으며,  그 문도들이 대거 월정사 및 오대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휴정의 제자 사명당은 왜구들을 이기는 많은 설화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국 각지의 사찰이 사명당의 업적을 기리고 있지만 정작 사명당이 임란 후 국서를 가지고 일본을 건너가 강화조약을 맺고 돌아와서 국가의 위상인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오대산 영감사에 오대산 사고를 지은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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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사명당은  1544(중종 39)에 태어나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610년(광해군 2년)에 입적했다.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도 부른다. 사명 유정(泗溟 惟政. 사명당)은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진리를 깨닫고 1587년 금강산 보덕사에서 수도 중 돌연 월정사 중건을 위해 오대산 영감암(영감난야, 靈鑑蘭若)로 내려옵니다.
오대산을 자주 찾았던 유정은 당시의 억불정책으로 불교신앙의 민족적 성지인 월정사 본전이 붕괴되어 많이 퇴락해 있었던 월정사를 중건하기 위해 발원을 하여 1587년부터 3년 동안 각지를 유력하면서 권선( 승려가 시주 주머니를 만들어 집집마다 시주를 위해 돌림)하였다. 5년간 중건 끝에 1589년 늦봄 법당을 중창하고, 그 이듬해 1590년 단오절에 낙성식을 올렸다.「월정사 법당 개연소문(月精寺法堂開椽疏文)」은 그 자세한 사정을 알려준다.  

제자 아무개(某)가 아룁니다
본래 이 법계 가운데 하나의 물거품으로서 4생(四生) 속에서 났다 죽었다 하다가, 마침 조그만 선(善)을 지음으로써 호서(湖西)에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머리 깎고 늙어서 돌아다닐 때 이곳을 지나다가 옛일을 살펴봄에 지금의 광경이 너무나 처참하여 8백 년 동안의 유적을 수습하여 드디어 중창할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정해년(1587) 여름에 권선문(勸善文)을 소매속에 넣어 돌아다녔고, 기축년(1589) 봄에는 법당을 고치고 서까래와 마루를 올렸으며, 그해 여름에 잇달아 범종루의 서까래와 마루를 만들었습니다. 
 월정사는 천지가 개벽한 뒤로 지금까지 신선이 사는 곳이요, 망한 당나라와 흥한 송나라에서도 모두 참선하는 절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대들보와 마루가 꺾여 바라보는 승도가 우러러 보는 속인들은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으며, 비가 들이치고 바람이 때리니, 부처님 얼굴에는 이끼가 푸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제자 아무개는 말을 내었으나 길이 없음을 깨달았고 공을 세우려면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 끝에 5년 동안 권선문을 가지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연기 낀 마을과 비오는 읍내에서는 알아주는 이가 적어 한탄하였고, 가을밤 달과 봄바람 앞에서는 세월의 빠름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집집마다 다니면서 한 치의 베와 세 움큼의 곡식을 거두어 모아 기축년 늦봄에 법당을 고쳐 새로 수리하고, 경인년(1590) 단오를 맞아 낙성회를 열었습니다. 그 일에 있어서는 풀을 맺는 간단한 일에 지나지 않으나, 그 공에 있어서는 하늘에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시냇가에서 나는 차나 궁궁이풀은 비록 보잘 것 없는 음식이지만 정성을 들이고 목욕재계한 것은 부처님께 올릴만한 것입니다
『사명대사집』 권6. 동국역경원, 1970

  이와 같이 16세기말의 월정사는 법당이 퇴락하여 비가 들이치고 부처님의 얼굴에 이끼가 맺힐 정도였다. 왕실의 적극 지원을 받았던 대찰조차도 불교 탄압의 흐름을 마냥 비켜갈 수 없었던 것이다. 실상 월정사와 오대산 불교는 조선 왕실과의 인연 때문에 조선 전기에 가장 많은 중창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찰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쇠락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억불숭유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는 비통한 심정으로 중창의 발원을 세우고 1587년부터 3년 동안 각지를 유력하면서 권선을 시작하였다. 한 치의 베와 세 움큼의 곡식이라도 정성껏 모아 마침내 1589년 늦봄 법당을 새로 꾸미고 이듬해 단오절에 낙성식을 올렸다.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리는 힘든 불사였지만, 대사는 3km 떨어진 영감사에 머물며 1589년 늦봄에 법당이 완성되었지만 낙성식은 1년이 지난 1590년 단오날에 열렸다
  그 이유는 어이없는 역모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1589년 정여립(鄭汝立)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있었는데, 누군가의 거짓 진술로 대사는 스승 서산대사와 함께 강릉부에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무고로 밝혀져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월정사 법당의  낙성식이 일년 뒤에 열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월정사는 사명대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5년간의 험난한 역경을 딛고 다시 여법하게 법등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대사는 중수를 마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렇듯 휴정의 제자인 사명유정이 월정사를 중건하는 등, 조선중기의 오대산 불교는 청허계 문도들의 주요한 활동 근거지로 등장하고 있다. 월장사 중창 후 곧바로 임진란이 닥치자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창의하여 선조 25년 (1592) 평양성을 탈환하며 한성 등의 왜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다. 이렇게 임란의 7년 세월을 사명당은 스님으로서 참선보다는 국가 존폐의 위기에 전란 터에서 국가를 수호하였으며 전후에는 전쟁이 끝나자 선조 37년(1604)에 선조의 국서를 받고 평화교섭차 일본과 일본에 건너가 3차 협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고 이듬해 포로 3천5백 여명을 데리고 귀국한다.
  사명당의 여러 설화 중에는 왜인은 사명당을 가마 솥에 앉히고 뚜껑을 닫고 불을 피워 가마솥을 벌겋게 달구고 뚜껑을 열자 사명단은 눈썹과 수염에 휜 고드름이 얼었는데 천장에 얼음 빙(氷)자를 써 붙이고 도술을 부렸다 하는 이야기나 지봉유설, 청야만집에 수록된 가등청장의 목을 탐내는 등 왜구를 이기는 수많은 이야기는 임란으로 말미암아 왜적 에대한 민족적 적개심과 민족적 긍지를 반영하고 있다.
  사명유정은 월정사에 대한 인연이 많았던 듯, 평화교섭 차 일본에 건너갔을 때에 오대산을 그리는 시를 짓고 있다.

나그네 노릇 해가 지나 시 더욱 읊조리니,
오대산 동림(東林)에 문 닫고 누웠던 일 자주 생각난다.
푸른 솔 방장실로 돌아갈 마음 있는데
푸른 하늘 저문 구름 먼 생각나누나.
혜초[蕙] 장막에 향을 피울 때 산이 어두워지고
학소리에 꿈 놀라니 달은 처음 젖었네.
다시 성수(聖壽)의 천추를 빌던 일 생각하니,
완하(浣河)에 비 지나매 봄물이 깊었도다

  이 시는 평화 교섭의 막중한 임무로 일본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고국을 생각하면서 오대산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 사명 유정이 다시 오대산으로 돌아온 것은 1605년 6월 이었다.
  선조는 실록의 보관의 사고(史庫)가 성내(城內)에 있으면 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 선조는 사고를 비밀리에 보관하기 위해 먼 산중에 보관할 것을  염원한바 오대산에 택한 왜란의 극복과정에 공로가 큰 사명당이 영향과 당시로서는 가장 기강을 이루는 명찰, 월정사와 오대산의 정기가 흐르는 영감사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를 건립하였다.
  건립공사는 강원감사가 맡았으나 사명대사가 일찍이 이곳에 머물며 월정사를 중건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당시 선조는 대사에게 제반공사를 맡겼다. 사고가 완성되자 월정사의 주지는 사고의 수호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곧 오대산 사고 실록을 수호하는 총섭은 월정사의 주지였으며, 설치 당시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수직(守直)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 1,893권 888책으로 만든 방대한 역사서로 현재 한국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기록유산이다.
  그래서 오대산사고는 조선 후기 오대 사고의 하나인 외사고로 오대산 사고가 설치된 것은 1606년(선조 39년) 이었다. 오대산 사고 실록을 수호하는 총섭은 월정사의 주지였다.  조선 태조부터 『철종실록(哲宗實錄)』까지와 이후의 선조 39년 이후 1910년 일제강점 시까지의 기록이 계속 오대산사고에 봉안되어 왔다. 1909년 조선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오대산사고에는 철종까지의 실록 761책, 의궤 380책, 기타 서책 2,469책 모두3,610책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강점 이후에 오대산 사고의 서책은 이왕직(李王職) 도서관에서 관리하였으나, 1914년 조선총독 테라우찌(寺內)에 의하여, 오대산 사고본 일체가 일본 도쿄대학으로 불법으로 반출되었다.
 당시 일제강점 시 월정사는 사찰령이라는 악법에 예속되어 조선총독부의 위세를 가탁한 일본인들에게 산림이 점유되어 계림 등의 목재회사를 차리고 아름드리 박달나무를 마구잡이 도벌하여 목기 가공으로 사용하는 등 오대산은 수난을 겪었다.
  오대산사고가 설치되면서 월정사는 그 수호사찰로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을 받아 법등을 지속되었지만, 오대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이 총독부에 의해 강탈되면서 절은 수호사찰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실록은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대학에 소장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당시 학자들에게 대출되었던 책들이 화를 면하였고, 그 중 27책을 1932년 5월 당시 경성제국대학(현서울대학교)으로 돌려주어 현재까지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圖書)에 보존되고 있었고, 나머지 수습된 서적은 최근까지 도쿄대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 계속 남아있었다.  2006년 3월 3일, 일본이 강탈해간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환수하기 위해 이후 3차에 걸친 회담 끝에, 5월 31일 도쿄대 도서관장은 도쿄대학이 소장한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대로 기증하기로 결정했다’2006년 마침내 현존하는 47책을 모두 돌려받았다.
  현재 환수한 실록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나, 오대산의 사고가 복원되어 있으므로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억불의 어려웠던 시대에서도 실록 수호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녔던 월정사가 이를 통해 다시 한번 사격을 정립할 때이다. 이것이 평창인들과 나아가 강원도인과 모든 불자들의 숙제인 것이다.
  오대산 실록 환수위원회는 일단 도쿄대를 문화재 약탈자에서 선의의 기증자로 탈바꿈 시켜준 서울대학교를 비판했고, 약탈자가 소장처를 결정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취지에서 서울대 규장각 소장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 독립기념관, 오대산사고 중 역사적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는 곳에 국민적 합의를 거쳐 소장처를 결정하기 바란다는 입장을 문화재청에 통보했다.  오대산 월정사는 실록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사이 유흥준 문화재청장은 오대산사고에 내려와 강원도지사를 만난자리에서 “저의 처가도 주진(평창읍내)입니다. 이곳 오대산에 박물관을 짓는다면 일본서 환수한 실록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당시 평창 사학자 엄기종님이 관심을 가지고 이곳에 찾아가 바로 옆에서 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때 그럼 시일이 걸려도 평창에 박물관을 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일 중으로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문화재청으로 보내 드리겠으니 결재를 부탁합니다.’ 하고 말 한마디만 했었으면,, 허나 관리들은 자리뜨면 그만이지..
   지난해에 오대산엔 오대산 사고 박물관이 생겼다. 그리고 실록이 아니라 대신 영인본(복사본)이 비치되었다. 글쎄요, 이미테이션의 영인본을 보존도 아닌 비치하느라 70억 소요의 박물관을 짓다니.
  지금 일본서 반환하여 규장각에 쳐박혀 보존되고 먼지만 쌓이고 있는 것보다 원래의 제자리인 오대산 사고 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와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재로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시민으로 하여금 국력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게 하는 점과 오대산 사고는 사명대사의 말년의 국가와 국민을 위한 노력을 후손들은 배움의 자리로 돌려 기려야 할 듯 하다.
  이는 물론 우선 오대산사고지에는 전설같은 스님 사명대사의 이야기가 사명대사의 탑과 함께 있으면 좋을 듯하다. 사명대사는 물론 오대산에도 월정사에도 모셔져 있지만 전국의 약 15개 사찰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명대사는 전국을 다니며 불교의 참선의 수행하였지만 승병을 전개하는 과정과 연관되는 사찰들이다. 사명당은 국가의 환란의 위기에 참선의 정진을 멈추고 구국의 길에서 목숨을 담보로 나가 싸웠던 것이다. 이토록 활발한 사명대사는 평창에서는 월정사 중건과 선조의 명에 의해 오대산사고를 짓는 기간까지 모두 8~9년을 머물렀었다. 아마도 그의 생애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평창에서 보낸 듯 하다.
  사명대사의 구도의 길에서 인간적인 모습은 위의 예문 <월정사 권선 중창문>에 잘 드러나 있다. 필자는 가끔 월정사 여행에 월정사 입구 시오리 길을 들어갈 때면 이 길에는 오백년 전 사명대사께서 보시를 받아 짊어지고 월정사로 걸음을 재촉하던 사명대사가 그려진다. 좋은날에는 보시를 많이 받아 지면 걷기도 힘들텐데, 무거울수록 불사중창을 더 빨리 한다는 마음은 더 즐거웠으리라.
[평창역사연구가 고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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