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고향에 대한 바른 이해

- 평창역사연구자 고주호
- 평창율곡마을가꾸기 역사정립세미나 제1발표

고주호 승인 2020.12.28 11:37 | 최종 수정 2021.01.11 15:16 의견 0

1. 머리말

판관대(判官垈)는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에 위치하며,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선생을 잉태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판관대라는 명칭은 율곡 이이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를 따서“판관대(判官垈)”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평창군지에 의하면 판관대는 율곡을 잉태한 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현종 3년 임인 (1662)에 사방 5리 (산판이 170정보, 논이 120마지기, 밭이 30일갈이)의 토지를 하사하여. 제향케 하였다고 한다.1) 이후 1895년 봉평의 유학자 홍재홍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1906년 고을 유생들의 성금으로 봉산서재를 중건하여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임을 기념하고 있다.2)

2016년과 2019년 평창에서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로서 문화 아이콘 계발이란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3) 이러한 세미나를 통하여 판관대와 율곡의 관계를 연구한 바 있으나 이 세미나들의 촛점은 잉태지란 설화적 내용을 기조로 하여서 판관대에 옛날식 고풍스런 호텔을 짓자는 등으로 문화 아이콘이란 미명하에 놀이문화의 여러 이야기들을 조명하였다.

판관대의 여러 모습을 고찰하여 문화론을 가꾸자는 연구는 좋은 모습이지만, 판관대가 율곡 이이 선생의 잉태지로만 자리 잡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아, 새로운 연구의 조명이 필요하다. 율곡선생과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조선시대에는 봉평)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백 년 전의 일이라 지금으로서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판관대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강릉, 파주에서 이곳으로 10년간 옮겨 다니고, 또는 4년 살았다고 하는 등 거주기간도 불명확하고, 이곳에 거주하게 된 사유에 대해서도 신사임당이 서울서 강릉을 오갈 때 쉬어가는 집 정도로 그려지고 있다.4)

이러한 이야기들은 원천적인 출처도 없는 석연치 못한 이야기들로 바르지 못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판관대는 학자들의 논지에도 맞지않게 설명되고 있으며 일부의 책에는 판관대에서 몇 년 살았다 하는데 그 증거는 무엇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통용되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사실적 이야기들을 찾아가며 역사에 의한 정확하고 의미있는 이야기로 다시금 조명한다.

2. 신사임당의 평창 거주에 관한 주장들

율곡이이가 16세인 1551년 어머니인 사임당이 별세하자 어머니의 행장(선비행장 先妣行狀)5)을 지었다. 율곡 이이는 이 글에서‘혹거봉평 (惑居蓬坪. 혹은 봉평에 살거나)’라는 네 글자로 사임당과 자신이 봉평에 거주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네 글자를 둘러싸고 특히 현대에 와서 여러가지 주장이 존재하여 몇 가지 기록에 나타나는 바 그 주장들을 정리한다.

(1) 거주기간에 대한 불명확한 기록들

평창문화원에서는 2016년에는“율곡 선생 잉태지 판관대 재조명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신사임당이 평창에 거주한 기간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들을 기록하여 놓았다. 박도식 교수는 “신사임당은 33세를 전후하여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 판관대에서 4년여를 살았다고 한다.”고 기록하였으나, 이 주장에 대한 출처는 밝히고 있지 않다.6)

이밖에 봉산서재의 관광안내 표지판이나 또한 평창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도 4년 거주설을 명기하고 있다.

율곡 이이선생의 부친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으로 벼슬하던 조선 중종 1530년대에 이 고장 판관대에서 사임당 신씨와 4년간 거주하는 동안에 율곡을 잉태하였는데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해 1906년 창건한 사당이다.7)

봉산서재는 율곡 선생의 부친인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벼슬하던 1530년경 이곳 에서 4년간 거주하는 동안 율곡선생을 잉태한 것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당이다.8)

봉산서재 창건유래문에는 다음과 같이 이원수 공이 10년을 판관대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식으로 봉평거주 10년설이 아래에서는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선생의 부친 이원수 공이 중종 21년(1526)경부터 약 10년간 봉평면 월포동(현 백옥포리 판관대)에서 거주 하시는 동안 선생을 잉태하시고 중종 30년(1535) 태임 후 9월이 되는 가을에 강릉부 북면 오죽동으로 이거하시어”9)

율곡연구원의 사임당 연보에는“파주, 혹은 강릉, 봉평으로 옮아 다니다.”라고 봉평 이외에 파주와 강릉을 함께 넣어 “옮아 다니다”라고 표현하여 봉평거주설을 흐리게 하고 있다.10)

21세

중종(中宗) 19년 (서기 1524년) 한성에서 시어머니 홍(洪)씨 부인께 신혼례를 드리다. 9월에 한성에서 맏아들 선(璿)을 낳다. 다시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혹은 파주(坡州) 혹은 강릉, 혹은 봉평(蓬坪;지금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으로 옮아 다니다.

이 기간 동안 봉평 뿐 아니라 파주 혹은 강릉으로 옮겨 다니며 10여년을 지냈으며 그것도 판관대에서는 기간을 특정하지 않고 얼마 동안 살았다고 하며 봉평에서 생활한 기간을 축소하여 기록한 최초의 기록은 이은상의 기록에서 나타난다.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서울로 돌아와 시어머니 홍씨에게 신혼례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인은 서울에서 생활한 것도 아니요. 그리고 도로 또 물러나 혹은 파주, 혹은 강릉으로 옮겨 다니며 10여년을 지냈는데 그렇게 생활하던 동안에 어느 한 때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 (본시는 강릉 소속이던 것이 평창으로 이속됨) 속칭 판관대라 부르는 곳에서 얼마동안 살았던 것이다. 11)

이러한 설의 영향을 받아 박도식 교수는 앞의 세미나 발표문의 다른 부분에서는 “판관대에 머무른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으나 율곡을 낳기 바로 전까지 10년 동안 파주 강릉 봉평으로 옮겨 다녔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사이에 여러 해 동안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였다. 12)

박도식교수는 이 발표문에서 사임당이 오히려 강릉을 거처로 하였다고 출처는 밝히지 않고 또 다른 주장을 하였다.

사임당은 혼인한 후에도 근 20여년 동안 강릉을 거처로 하면서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와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 등을 오가며 지냈다고 한다.13)

이러한 여러 주장의 기록들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 신사임당 생애에 대한 여러 견해들의 차이표>

이은상

율곡연구원

봉산서재

창건문

봉산서재

관광안내판

박도식교수

평창군홈페이지

1524

1524년부터 10여년을 파주 강릉 봉평으로 옮겨다니다. 판관대에서도 얼마동안 살았다.

1524년부터 10여년간 파주 강릉 봉평을 옮아다니다

근 20여년동안 강릉을 거처로 하면서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와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 등을 오가며 지냈다고 한다.

1525

1526

1526년부터 봉평에 이거하여 약 10년간 거주설

1527

1528

1529

1530

1530년대에 4년 거주설

1531

1532

1533

1534

1535

1536

1537

1538

1539

1540

이 표로 보면 봉평거주 10년설이 처음 주장된 것은 봉산서재 창건문으로, 이 창건문에는 1526년 봉평으로 이사와서 약 10여년간 거주하였다는 것인데, 소설가 이은상이 처음으로 파주 강릉 봉평으로 옮겨 다녔다고 봉평거주의 의미를 축소시켜 기록하였으며, 더욱이 박도식 교수는 사임당이 결혼 후 20여년을 강릉을 거쳐로 하면서 파주와 봉평을 오가며 지냈다고 주장하나 그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또한 4년설은 최근의 기록으로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모든 기록들은 신사임당 사후 최소 500여년이 지난 후 이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사임당이 봉평에 거주한 기간에 대한 신빙성 있는 주장이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뒷 부분에서 거주기간에 대한 기록을 다시 살펴본다.

(2) 봉평거주에 대한 기록

박도식 교수는 봉평은 거주지가 아니고 오가며 지낸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을 좀 더 살펴본다.

사임당은 혼인한 후에도 근 20여년 동안 강릉을 거처로 하면서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와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 등을 오가며 지냈다고 한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오랫동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딸만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당시의 혼인 풍습인

‘남귀여가혼’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남귀여가가혼이란 남자가 혼인 후에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남귀여가혼에서는 혼인 초에 일정 기간을 처가에서 지낸 후 시가쪽 지역에서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처가 쪽 지역에서 사는 경우도 있었다. 사임당이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아 기른 것도 당시의 혼인 풍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14)

박도식 교수는 사임당이 결혼 후 일정기간을 강릉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아예 강릉에서 20여년을 거처하면서 율곡도 오죽헌에서 낳아 길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자료는 없이 다만 남귀여가혼의 풍습으로 그러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있다.

박도식교수는 판관대에 관해“결혼 후에 이원수는 파주 율곡에 살았고, 신사임당은 강릉 오죽헌에 살았다 한다. 그리하여 중간지점인 이곳 용평 판관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5)고 하여 판관대를 강릉과 파주를 오가는 중간의 임시거처라고 성격지었다. 이 기간에 이원수가 파주 율곡에 살았다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신사임당이 계속 강릉 오죽헌에 살았다고 단정하며 중간의 임시거처라고 하였는데, 무슨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지는 알 수 없다.

판관대를 별장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정옥자 교수는 판관대를 별서라는 호칭으로 설정했다.

백옥포리 별서야말로 친정에서도 시집에서도 벗어나 호젓하게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라는 글과 같은 곳만도 아닌 듯 하다16)

구한말 유학자 신범 선생도 판관대를 별장이라 칭하였다.

대(岱)는 옛날 별장의 명칭이다. 선생의 연보를 살펴보면 ‘옛날 별장이 진부 깊은 계곡에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17)

별장은 자신의 집을 제외한 별도의 집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친정도 아니고 시집도 아니라면 그집은 자기집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신범선생이 표현한 별장은 율곡이 성장하여 봉평을 떠났을 때, 판관대를 별장이라고 하여 적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사임당이 아이를 키우며 거처하던 집을 별서라고 하는 것이나 옛날의 별장이라 함은 현대적 별장의 개념과는 다른것이며, 별서라는 점에 이해는 곤란하다.

소설가 이은상은 봉평에서 살게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 판관대라는 곳이 서울서는 188킬로나 되지마는 동으로 강릉 쪽에서는 70킬로요 또 대관령을 넘어서는 48킬로밖에 안되는 곳이다. 율곡의 부모가 그 당시 무슨 인연으로 그곳에서 살았던지는 전연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산수풍경이 아름다운 곳인 것만은 사실이다.18)

장정룡 교수는 앞에서 밝힌 2016년 세미나 발표문의 맺음말에서 봉평은 거주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곳은 명당지로서 이원수공과 신사임당이 봉평에 거주했음은 율곡 선생의 선비행장 기록에서도 ‘거봉평(居蓬坪)’으로 나타난다.‘귀임영(歸臨瀛)’과‘거봉평’의 확연히 다른 표현에서도 구별되듯이 사임당의 친정 임영(강릉)에 갔던 일과 사실적으로 봉평에 거주했음이 이 기록에서도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임당의 봉평 거주설은 문헌 뿐 아니라 구술역사로 확인되고 판관대 회임설화도 구술역사를 통해서 지역전승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겠다.”19)

3. 백옥포리는 율곡의 고향이다.

지금까지는 1900년대 이후의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율곡전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봉평과 신사임당과 율곡에 관한 기록을 살펴본다.

1) 율곡전서에 나타난 율곡의 고향, 봉평

율곡전서 목판본. 권 18의 선비행장 부분

율곡 이이는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사임당의 일대기를 지어 “선비행장 (先妣行狀)”을 남겼다. 여기서 선비란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님을 남에게 이르는 말이고 행장이란 일대기이다. 율곡은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 신 사임당의 일대기를 바르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율곡전서20) 권 18, 35∼36쪽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글은 『국역 율곡전서(Ⅳ)』에 수록되어 번역 발간되었다.21)

선비행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부분에서는 사임당의 성품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주로 조선시대 여성으로서의 품성과 효성에 대해서 많은점을 할애하여 비중있게 서술하였다. 뒷부분은 사임당의 생애를 태어난 해부터 년도별로 서술하였다.

평창과 관련된 서술은 이 뒷부분의 연보부분에 나타난다. 이 연보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2.선비행장의 서술 요약)

연도

사임당의 행적

1504

갑자년 10월29일에 임영에서 태어났다.

1522

임오년에 가군(이원수공)에게 시집을 오셨다

1524

갑신년에 한성으로 오셨다.

그 뒤 임영으로 근친을 가 계시기도 했고 봉평에서 살기도 했다

1541

신축년에 다시 한성으로 돌아오셨다

1550

경술년 여름에 가군(이원수공)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었다

1551

신해년 봄에는 삼청동 우사(셋집)로 이사를 했다

5월 17일(갑진일) 새벽에 갑자기 작고하시니 향년이 48세 였다.

연보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생애의 큰 흐름을 반드시 먼저 연도를 적고 그 다음에 행적을 적었다. 따라서“임영으로 근친을 가 계시기도 했고, 봉평에서 살기도 했다.”는 시기는 1524년부터 1541년까지 18년 동안으로 봉평에서 살았던 기간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이 18년의 기간을 별 다른 고증이나 근거도 없이 4년 혹은 10년으로 줄여 적는 기록은 사실에 어긋난다 할 수 밖에 없다.

평창군이 발간한 『2004. 평창 판관대 정비 기본계획』22)에는 선비행장의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17년간을 사임당과 이원수 공이 강릉에 머물지 않고 봉평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기록에 의존한다면 갑신년 이후‘강릉으로 돌아가고’(歸臨瀛)‘봉평에 살았다’(居蓬坪)고 달리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즉 갑신년(1524)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간 신축년(1541) 사이 17년 간 사임당과 이원수 공은 강릉에 머물지 않고 봉평에서 살았으며 율곡 선생은 그 사이 병신년(1536)에 출생하였으니 봉평에서 잉태하고 친정집인 강릉 오죽헌에 가서 해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귀임영 거봉평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본다.

“혹귀임영 혹거봉평 (惑歸臨瀛 惑居蓬坪)”

선비행장의 기록중에 이 말은 여덟 글자에 불과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기록에서 율곡 이이는 분명히 임영과 봉평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 기록에 대하여 어떤 이는“혹은 강릉에 돌아가기도 하고, 혹은 봉평에 거하기도 하였다.”고 강릉에 방점을 찍어 주로 강릉에서 살았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강릉이 본래의 장소이며‘본래의 장소로 돌아갔다’는 뉘앙스로 강릉의 중요성을 은근히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뒷 문장에‘돌아오(가)셨다’라고 표현하고 있다.‘신축환한성 辛丑還漢城’ 이 문장은‘신축년에 다시 한성으로 돌아오셨다.’가 공식번역으로 그러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라고 하려면 강릉으로 돌아갈때도 혹귀임영(惑歸臨瀛)의 돌아갈 귀(歸)자가 아니라 혹환임영의 한자로‘還’자로 적었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귀(歸)는 무엇이고 거(居)는 무엇인가. 선비행장의 앞부분에는 귀 임영과 관련한 글귀가 있다.

“그 뒤에 자당(어머니)께서 임영에 근친가셨다(後慈堂歸寧于臨瀛)

윗 글귀에서는 귀녕(歸寧), 즉 친정 강릉에 부모님을 뵈으러 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귀녕(歸寧)이라함은 『시경(詩經)』주남(周南)편 갈담(葛覃)에 나오는 말로“시집 간 딸이 친정에 돌아가서 어버이가 편안히 계신지를 살펴보는 것.”이다라고ㅜ설명한다.23) 반면 ‘居(거)’란 글자는‘가거(家居)’의 ‘居’즉 거처한다는 뜻이다. 즉 임영은 율곡의 외가이며, 봉평은 어머니의 집, 즉 자신이 자라난 고향집이라고 신사임당의 행장에 직접 적은 것이다.

더욱이 임영은 강릉대도호부의 별호이다.24) 1500년대에 봉평은 강릉대도호부에 속하였다. 따라서 굳이 임영과 봉평을 구별하여 기록한 것은 자신이 태어난 후 여섯 살까지 자라난 봉평의 집을 외갓집과 구별한 것이다. 율곡의 연보에는 율곡이 태어난 곳은 “선생은 강릉부(江陵府)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줄에 바로‘여기는 바로 선생의 외가였다.’고 주를 붙여놓았다. 즉 율곡의 집은 강릉 오죽헌이 아니라는 뜻이다.25)

이러한 점은 1,800년대 후반의 유학자 신범(辛汎)선생도 지적하고 있다.

“갑신년(1524) 이후에 간혹 임영으로 뵈러 갔다가 간혹 봉평에 거처했고, 신축년(1541)에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고 했으니 갑신년 이후와 신축년 이전은 죽헌에서 살지 않은 것 같다.”고 임영과 봉평의 차이를 지적하였다.26)

또한, 율곡은 자라서도 오죽헌을 외가집 이상의 의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강릉에 갔을 때에도 오죽헌에서 잠을 자지 않고 잠잘 곳을 따로 마련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율곡이 지은 이모부 즉 사임당의 동생의 남편인 권화의 묘지명에 나타난다.

군은 권씨로 관향은 안동이며 집은 강릉에 있고, 휘는 화(和 ) 자는 희혜(希惠)인데 정덕 무인년(1518)에 태어나서 가정 계해년(1539) 같은 고을에 사는 신씨(申氏)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신씨는 평산의 명망 높은 집안이다. 권화의 아내는 바로 나의 외조부인 진사 명화(命和 )의 따님이다. 내 나이 네 살이었건만 그 당시의 일이 기억난다.

신축년(1541)에 내가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들어갔고, 무신년(1548)에 외조모 이씨를 가서 뵈었더니, 군은 그때 이미 집안 일을 도맡고 있고 내외가 원만하게 아름다웠다. 빈객을 반겨 맞아 주식(酒食)을 대접하기를 거르는 날이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외가를 끊임없이 오갔다. 군이 크고 화려하게 지은 집이 광활한 들판을 임하고 있어 가히 번민을 해소시킬만하기 때문에 밤에는 내가 기거하는 곳에서 자고 낮에는 반드시 군의 집에 갔다.27)

이 글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원수공을 남귀여가혼이니 하여 소위 데릴사위로 보는 듯한 측면이 있는데, 데릴사위는 이원수 공이 아니라‘권화’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오죽헌은‘외가’이며 강릉에 가서도 잠은 따로 기거하는 곳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율곡 이이의 생애에 관련된 유적지는 단 세 곳뿐이다. 율곡이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 율곡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평창의 판관대, 그리고 율곡 선영의 묘소인 파주의 자운서원이 그곳인데, 오직 평창 판관대만이 제 이름값을 찾지 못하고 씁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율곡 이이와 백옥포리를 연결하는 원자료로 율곡전서의 율곡연보에 나타나는 귀한 자료가 있다. 이율곡이 다섯 살 때의 일화이다. 28)

“하루는 큰 비가 내려 앞 시내가 불어 넘치자, 어떤 이가 건너오다 미끄러져 거의 위태롭게 되었었다. 남들은 모두 손뼉을 치면서 웃었으나 선생은 혼자 기둥을 꿇어 앉고 걱정하다가 그 사람이 빠져 죽음을 면하게 되고서야 그만두었다.”

이 글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홍수가 나면 흥정천이 범람하던 백옥포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백옥포리에 흐르는 시내는 500년 전 율곡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섶다리로 건너던 봉평의 관문, 백옥포리 판관대 앞의 흥전천)

4, 판관대의 실체성의 고찰

1) 토지등기부상의 기록

평창군민신문은 평창군청에 백옥포리 212번지를 비롯하여 모두 123개 번지에 대한 1916년 일제 식민지시대의 토지조사부에 대하여 정보공개청구를 신청하여 이를 정리하였다. 이 토지조사부에는 당시의 소유자가 표기되어 있는데, 강릉군 정동면 죽헌리(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 소재지)의 권영달씨가 소유자 인 것으로 확인된다.오죽헌의 상속자는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의 넷째 사위인 권화가 율곡이 세 살 때 데릴사위로 들어와 결국 그 아들 즉 율곡의 이종사촌동생인 권처균이 상속하였다.29) 오죽헌이라는 당호(집이름)도 권처균이 지은 것으로 이후 오죽헌은 안동권씨의 소유가 되었다.

(소유자가 표기된 1916년의 토지조사부)

당시, 판관대 일대의 토지소유권에 대한 분분한 이론들이 있었는데, 이번 자료의 발굴에 의하여 안동권씨가 강릉의 토지를 율곡의 외할머니로부터 상속받을 때 판관대 일대의 토지를 함께 상속받았을 가능성의 빈도가 높아졌다.

평창군민신문은 토지대장의 기초가 되는 백옥포리일대 123개 번지수에 대한 토지조사부를 교부받아 분석한 결과 총50,830평의 토지가 당시 안동권씨의 소유지로 밝혀져 이곳이 전해져오는현종이 하사한 사패지는 이곳 판관대에 실제하는 이야기란 점이 밝혀진 것이다.

이 토지를 지도상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로 보는 판관대 터)
(구글어스로 보는 판관대 터)

봉평은 지리적으로 장평에서 흥정천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며 들어가는 길과 그와 반대쪽으로는 사리평을 지나 무이리쪽으로 빠져 둔내로 나가는 길의 두 개의 길로 외부로 통하게 된다. 여기에 흥정천을 따라 장평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판관대의 땅은 길게 뻗고있다. 아마도 사패지가 내려진 당시에는 판관대 터를 밟지 않고서는 봉평을 들어갈 수 없슬 정도로 수 많은 땅이 사패지로서 1916년 처음으로 토지실측의 기록에서 확인되는바 이곳이 판관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5만여 평의 땅은 개인의 땅으로 보기엔 한계가 있는듯 하며 이 땅은 현종으로부터 사방 5리를 하사받은 사패지인 것으로 추정되기에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과제가 되는 것이다.

2) 문헌상의 판관대 실체 규명

오늘날, 판관대는‘율곡이 잉태된 터로 수운판관 이원수 공의 벼슬이름을 따서 판관대라 불리웠다.’고 한다. 사임당과 이원수공이 살던 집은 유실되고, 그 터나 그 부근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1906년까지는 판관대는 실존하는 건물이었다.

봉산서재의 건립중에 배향에 관한 문제로 유림사이에 각기 다른 의견으로 율곡 이이 선생과 이항로, 유중교, 김평묵의 위패를 모시자는 의견을 서로 주고 받을 때,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은 1906년 추성구(秋性求)에게 쓴 편지에서 판관대가 빈 채로 있으며,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곳에 율곡의 사당을 짓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있다.

판관대에 대해서 의암 유인석이 1906년 추성구 선생에게 쓴 편지중에서 30)

제 생각을 그만 말하라 하지 않으신다면, 율곡이 수태된 그곳의 판관대가 빈 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곳에 특별히 율옹(주; 栗翁, 율곡 이이를 지칭함)의 사당을 짓고 지금 짓고 있는 사당 건물에는 (주; 봉산서재) 화옹 이하의 유상을 받든다면 31) 일이 적절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한 마을에 사당이 둘인것도 영 마땅치 않으니 그저 율옹만 모시고 마는 것 도 못합니다. 만약 지금 정하신것처럼 한다면 제 생각만 뜻도 없고 말할것도 없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율옹의 후손인 이학사(李學士)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그 뜻을 어떻게 어길 수 있겠습니까??32)

위 인용글은 봉산서재를 창건중에 배향의 문제가 논의되며 의암 유인석이 태은 추성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봉산서재의 위배 배향에는 율곡 이이와 화서 이항로로 결정되며 또 한의 문제가 대두되었는 바 율곡 이이선생과 이항로 두 분의 위패를 나란히 모신다면 이이의 후손인 이학사도 싫어할 것이라는 점에 1,900년 초 지방민들의 성금으로 창건된 6평의 조그마한 봉산서재에는 율곡과 이항로 두 분의 존영의 위패는 나란히 모시지 못하고 곡각을 이루며 모셔져 있다.

여기서 본 논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판관대의 기록이다.

의암 유인석의 편지 가운데에는“판관대가 빈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하는 문장에서 1905년쯤 까지에도 판관대가 사람이 살지않고 비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사임당이 결혼한 시점인 1522년을 깃점으로 본다면 당시까지는 약 380년 존속되어 왔다가 이후 언젠가 정리된듯 하다.

당시의 건물이 380년 존속된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령 오죽헌을 예로 본다면 율곡이 출생했다는 몽룡실이 있는 건물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듯 판관대는 구한말까지는 존재하였으나 일제시대에 철거되었다면 아래의 등기부상의 소유건 이전후에 발생된 문제는 아닐까 추론해 봅니다.

그러기에 이 부분은 본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신사임당의 신혼집인 판관대의 실체가 최소한 1906년의 구한말까지 존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5. 맺음말

“역사를 잊으면 미래를 잃는다.”

조선시대까지는 봉평도 강릉대도호부의 일부였기 때문에 율곡의 고향은‘강릉’이었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변천의 따라 신사임당의 신혼 살림집은 봉평이었다. 비록 율곡이 외가집인 오죽헌에서 태어났지만, 백옥포리는 막내를 제외한 여섯 형제가 자라난 곳으로서 율곡의 고향이다.

이곳의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반 평생인 18년간을 살았던 정든 살림집으로 율곡 이이도 여섯 살까지 뛰놀던 맑고 순결한 대자연이 숨쉬는 곳으로서, 이곳 백옥포리가 고향임을 조명합니다.

비록 오백년 전이지만 이 고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위인이 고향이다. 이제 이러한 판관대의 역사적 사실을 알았으면 우리는 내 고장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땅의 선현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사명감속에 문화역사를 가꾸어 나가야 함이다.

이것이 이 고장의 밝은 미래를 위한 도전인 것이다.

이상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1)이은상. 증보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성문각. 1980, 244쪽 : 다만 이 기록은 왕조실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2)『평창군지』평창군. 1979. 454쪽

3) 평창문화원, “율곡선생잉태지 판관대 재조명을 위한 학술심포지엄”, 2016. 평창문화원, “판관대 문화콘텐츠로 스케치하다”, 2019.

4)박도식, 「율곡 이이의 잉태지 판관대 연구」,평창문화원,『평창의 뿌리 2019 제2집』, 평창문화원,2019, 63-67쪽 : 다만 이러한 내용은 박도식 교수가 직접 주장하였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주장들을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 이이,「선비행장」, 이종술 외 역주, 『국역 율곡전서(Ⅳ) : 잡저- 신도비명, 묘갈명, 행장, 습유』(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6), 300∼302쪽

6) 박도식, 「율곡의 잉태지 판관대 재조명」, 평창문화원, 앞의 책(2019), 63

7) 봉산서재 안내판

8) http://tour.pc.go.kr/?r=home&m=bbsv3&bid=at02&uid=689&c=2/14 : 평창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평창 4년 거주설도 불분명한 사실이지만, 1530년대에 이원수공이 수운판관으로 벼슬하였다는 기록은 오류란 점이다.

9) 평창군,『2004,평창 판관대 정비 기본계획』,평창군, 2004,71쪽

10) http://www.yulgok.or.kr/bbs/board.php?bo_table=ssid&wr_id=4

11) 이은상,『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1982년.6판보유수정판,243쪽

12) 박도식, 위의 글,67쪽

13) 박도식, 위의 글 49쪽.

14) 박도식, 위의 글, 49쪽

15) 박도식, 위의 글, 67쪽

16) 정옥자,『사임당전』,민음사, 2016. 43쪽. 111쪽

17)신범,「판관대기」,이규대 역, 『국역봉서유고』,평창군, 2006, 218쪽 ; 그러나 율곡전서의 율곡연보에는 이러한 구절이 없다.

18) 이은상 『증보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성문각, 1970, 증보3판, 242-245쪽.

19) 장정룡, 앞의 글, 103쪽

20) 율곡전서는 율곡 이이의 시문집으로, 1611년 시집1권과 문집 9권의 목각본으로 율곡집을 간행되었고, 1682년 다시 속집 4권, 별집 4권 외집 2권으로 간행되었고, 1749년 다시 빠진 기록등을 취합해 총 23권 38책으로 이루어진 율곡전서로 간행되었고, 1814년 44권38책에 이르는 오늘날의 율곡전서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7년 『국역율곡전서』로 발간하였다.

21) 이이,앞의 글, 300∼302쪽.

22) 평창군, 앞의 책, 2004, 65쪽

23) 사단법인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 1』(사단법인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1)

24) 『세종실록지리지』

25) 김동주 외 역주, 『국역 율곡전서(Ⅶ) : 년보 행장 제가기술잡록』(한국정신문화연구원,2002), 102쪽

26) 신범,“판관대기”,『국역봉서유고』(평창군청. 2006), 218쪽

27) 이이, 「습독관 권공 묘지명 習讀官權公墓誌銘」,이종술 외 역주, 앞의 책(1996), 296쪽

28) 김동주 외 역주, 위의 책, 11쪽

29) 이씨분재기

30) 평창의 뿌리」. 박도식. “율곡 이이의 잉태지 판관대의 연구” 65쪽.

31) 화옹은 화서 이항로를 지칭함이며, 유상은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를 말함.

32) 無已則聞栗翁受胎當地判官垈.虛而不用.特建栗翁祠於其地.今所營祠屋.奉華翁以下遺像.粗合事宜.然一里, 兩祠.終是未穩.不如單奉栗翁而止也

저작권자 ⓒ 평창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