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학자료] 평창일기 번역

권두문 군수 아들 권주의 임진왜란 일기
[번역 강병수 전형민]

전형민 승인 2021.07.12 17:05 | 최종 수정 2021.07.13 20:24 의견 0

권주 權(黑+主), 춘수당일고 堂逸稿, 권1, 雜著, 평창일기

번역: 강병수(하빈연구소장) 전형민(평창군민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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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3월 아버지(권두문 權斗文 역자주)가 평창군수로 부임한 뒤,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군의 남쪽 정동(井洞) 위와 아래에 두 개의 굴이 있는데, 깎아 지른 듯한 천길 절벽 위에 수 백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아버지는 평창군 사람인 봉사(奉事, 종8품 문관) 지사함(智士涵)과 함께 100여 명의 병사를 모아서 외대에 방책(防柵)을 설치하였다. 많은 병기를 쌓아두고, 굴속에 식량도 많이 저장해 둠으로써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1592년 6월 25일

6월 25일 나는 영천 사문천에서 부터 서모(庶母:姜召史)의 피난길을 도왔다. 피난을 떠나온 뒤에 군의 동촌(東村)에 있는 덕천(德川)에 체류하는 동안 갑산·석련 등의 집에서 임시로 유숙하였다.

1592년 7월 23일

7월23일, 임시 거처로 군의 남쪽 정동(井洞)에 있는 파초를 엮어서 만든 스님 혜정의 막사로 옮겼다.

1592년 8월 7일

8월7일 왜적 선봉이 정선군에서 평창군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아버지와 서모는 중방(中房: 수령을 따라다니며 모시는 사람) 언영, 남자 종 언이·희수·천수, 여자 종 언진· 이대언·진부·임손 등과 다른 고을에서 온 아전(衙前) 손수천 등과 함께 정동의 석굴 안으로 모두 들어갔다.

1592년 8월 10일

초 10일에 적군이 평창군 약수·정동 등에 들어온다는 연락이었는데, 이곳 역시 적군들로 가득찼다. 저녁에는 석굴 아래까지 적군이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1592년 8월 11일

11일 새벽에 많은 적이 평창군 내에 들어왔다. 평창군의 무사(武士) 지사함·지대성·우응민·지대명·지대용·이인서·이대충 등과 충주에서 피난 온 최업·우윤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동굴 밖에서 출동하도록 대비시켰다. (그러나) 지사함·유응민·이인서·이대충 등은 조총 탄환을 맞고 전사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동굴 속으로 달아났다. 왜적 10여 명이 동굴 입구까지 올라와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자 서모가 그 칼을 앞에서 가로막았다. (결국) 동굴 안의 남녀 모두는 적의 포로가 되었다. 서모는 자신의 몸이 더렵혀질 것을 예견하고 절벽으로 뛰어내려 순결을 지켜냈다. 많은 왜군들이 이 광경을 보고 오히려 멈칫하며 얼마 동안 멍하니 탄복해 마지않았다.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오후에는 이미 군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동쪽 상방(上房: 관리의 직무장소)이 있는 뜰 가운데에 먼저 목책을 둘러쳐 놓았는데, 포로들을 모두 그 목책 안에 가두었다.

1592년 8월 12일

12일 상방(上房)이 있는 변두리에 비어있는 곁채 방 주위로 목책을 설치하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버지의 사령(使令)인 언영이를 그곳에 가두었다.

1592년 8월 15일

15일 왜적의 선봉이 주천·영월 등지를 향해 나누어서 행군하였다.

1592년 8월 16일

16일에 적의 대군이 모두 영월로 향했다. 그런데, 적군이 말을 끌고 와서 아버지와 나를 겁박하여 말에 태우고는 우리들 몸을 새끼로 묶어서 말 채찍질로 말을 모는 것처럼 하는 짓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한 고통은 거의 견뎌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녁에 영월에 도착하여 우리 세 사람을 봉서루 아래에 가두고, 본 군민들도 포로로 들어온 이들이 많았다. 이날 오는 도중에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쳤다. 다친 발은 누워서 일어날 수 가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나는 다친 곳에 고약을 발라드렸으나,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 중에서 무 뿌리를 얻어다가 아버지께 식사로 올렸다.

1592년 8월 17일

17일 감역(監役, 종9품) 이사악도 포로로 잡혀 들어왔는데, 이사악은 이름 있는 선비다. 그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워 영춘현감으로 오인되어 그도 함께 가두었다. 그는 아버지와 나를 보자 한참 지나도록 눈물을 흘렸다.

1592년 8월 18일

18일 영월군 서리(胥吏)로 포로자가 된 엄수일이 나에게 콩 몇 되를 주었다. 왜군이 그를 관청에 출입하도록 할 때 가져온 콩이다. 충주 북촌에 사는 여인 덕비는 무를 가져다 주었고, 철두구(철두구 : 콩과류 등을 으깨는 머리가 철로된 도구)로 삶은 누런 콩을 으깨어 음식으로 바쳤다. 이들 엄수일과 덕비가 모든 일을 돌보아주는 뜻은 지극히 감탄스럽다.

1592년 8월 19일

19일 영월 선비 고종원·고종길 형제가 포로가 되어 잡혀 들어왔다. 대개 고군(高君)의 집안은 횡성 세족(世族)이다. 그들은 새로 영월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 왜변을 듣고 그의 동생 고종경과 함께 병사를 모집하여 병란에 나섰다. 동생 고종경은 끝내 비명으로 전사하고 지금 살아남은 형제마저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고종원은 아버지를 보자 눈물을 흘리면서 “공(권주의 아버지)이 어찌 여기까지 이르셨소, 공은 내가 처한 처지와 이리도 혹독하게 서로 비슷하단 말이요.” 하고, 인하여 서로가 위로할 뿐이었다. 저녁에 왜군 복장을 한 사람이 오자 한참 동안 주시하며 물어보니, 우리 군(郡) 사람으로 엄인진의 아들이었다.

1592년 8월 20일

20일 평창 어시사의 스님이 전에 포로로 잡혀와 있다가 풀려나서 돌아간다고 고하자 아버지는 엄수일에게 지필묵을 얻어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스님에게 전했다. 그때 아버지는 팔에서 피가 흘러내려 종이를 가득 적셨다. 아버지는 이내 붓을 던지고 탄식하기를 “이 모습을 보면 응당 집안 식구들이 상심이 클 것이다.” 이윽고 아버지는 혼미하여 쓰러지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를 옆에서 부축하는 자식 된 이 마음속에 아버지에 대한 은혜가 끝이 없음을 느꼈다.

1592년 8월 22일

22일 석개라는 여인이 장유 옷, 홑 속옷, 버선을 아버지에게 바쳤다. 혹독한 추위에 옷을 얻게 되자 그녀의 정성 담긴 마음에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석개는 전라도 영광 사람인데, 수 년 전에 떠돌이 신세로 이곳에 왔고, 남편은 언복이라 하였다. 이어서 평창의 서리(胥吏) 이응수가 풀려나 돌아간다고 하자 그 사유를 적어서 가족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여 그렇게 인정받게 된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였다.

1592년 8월 23일

23일 우리들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와 말에 태워 오후에 제천에 도착하였다. 우리 세 사람(아버지, 나, 사령)과 이사악은 옛날 관아로 끌고 들어가 어두워진 무렵에 동쪽 상방(上房)에 딸려 있는 빈 행랑에 목책을 설치하고 거기에 가두었다.

1592년 8월 24일

24일 날이 밝자 우리를 이끌어 말에 태우고 신림을 지나자 말을 바꾸었다. 오후에 원주에 도착, 그곳에서 왜병에 이끌려 민가로 들어갔다. 먹을 것을 준 뒤, 어두워진 뒤에 동쪽 상방의 문서루 위의 창고에 우리를 가두었다. 문서루 위의 창고는 네 칸으로, 각 관아의 장부와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고, 가운데 비어 있는 한 칸만이 우리 네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하였다.

1592년 8월 26일

26일 왜적 수장 풍신길성의 지휘 아래 영원성이 함락되었다. 목사 김갑제와 그의 아들 김시진이 모두 적의 공격에 전사하였다. 두 사람의 머리를 우리들에게 가져와서 “이 머리의 주인는 누구인가”라고 겁박하였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어 서로 주시하며 탄식만 할 분이었다.

1592년 8월 27일

27일 가죽을 다루는 장인 천우도 포로로 잡혀 들어왔는데, 우리를 보고 스스로 현감 황시의 종이라고 알려하였다. 이어 오가면서 그와 서로 대화를 하니 위로가 되었다.

1592년 8월28일

28일 수직(守直, 감시하는 사람)이 점차 처음과 같지 않았다. 결박을 느슨하게 하기도 하고, 간혹 얼마동안 자리를 비우고 오지 않기도 하였다. 지금부터야말로 탈출을 꾀할 만도 하였다. 이날 처음으로 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는데, 이 사실을 적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장부와 서적으로 가렸다.

1592년 8월 29일

29일 원주 사람 이덕수가 와서 수박 등을 나누어 먹으면서 “공(公)의 이러한 신세는 송나라 문천상(文天祥, 호가 文山, 그가 원나라와 싸우다가 잡혀 연경(燕京)에 있는 감옥에서 절의를 지킨 고사)이 감옥에서 먹을 때 그 음식 맛이니, 우리들 만남은 하늘이 맺어준 천재일우와 같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이덕수는 참판 이기의 종이다. 충주판관 이윤성의 사촌이지만, 그의 태생은 얼(孽, 첩의 자식)이다.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사할만하다. 이날 고언영의 목에 씌워진 족쇄가 저절로 끊어졌다. 살아날 방도가 시작되는 징조다. 아버지가 원점수에게 소호사 이기, 순찰사 강신, 조방장 000에게 기별을 전하라는 서신을 써 주었다.〔이하 결락됨〕세 곳은 대체로 적의 정세를 비밀리에 파악하고 있는 지역이다.

1592년 9월 1일

9월 1일 원주에 살고 있는 장동이 포로로 잡혀와 있었는데, 그가 와서 생밤 몇 되, 수박 1통을 주었다. 장동은 처음 이름은 장관(張寬)이었는데, 뒤에 바꾼 이름이다. 본래 삼척 사람이다. 원점수도 수박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우리 네 사람과 함께하며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동은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길을 한글로 써서 보이면서 “은행나무 아래에서부터 이아[貳衙: 강원도 감영(監營)이 있는 지역 내에 있는 군수나 현령이 직무를 보는 군아(郡衙) 또는 현아(縣衙)] 뒤쪽을 좇아가면 바로 남산 밖으로 연결되는데, (그곳은) 왜적들이 없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들의 간절하고 정성스런 마음에 더욱 감탄할 뿐이었다.

1592년 9월 2일

9월 2일 저녁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지키는 왜군은 불을 끄고 문을 닫아 놓고 누(樓)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밤 이경이 못된 쯤에 나는 아버지를 부축하여 사령 고언영, 그리고 이경진과 함께 지난 번 뚫어놓았던 벽의 구멍으로 탈출하였다. 이경진은 떠나가고, 우리 부자와 고언영은 가리현까지 함께 갔다. 적의 추적이 거의 미치자 우리는 결국 길 아래로 몸을 피해 여러 산이 모여 있는 것 같은 산에 올랐다. 비가 그치기 시작하면서 날이 밝아왔다.

1592년 9월 3일

9월 3일 산중에서 날이 저물자 세 사람은 모두 바위와 나무에 기대어 잤다. 밤에 잠깐씩 비가 오다 갰다 반복하였는데, 심한 허기가 밀려왔다. 산의 열매를 찾아 헤맸으나 하나도 찾지를 못했다. 이어 기어올라 소나무 잎을 따서 볶은 콩과 섞어서 그것을 씹어 먹었다.

1592년 9월 4일

9월 4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하루 종일 고개 하나를 넘을 뿐이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차츰 마을이 모여 있는 것 같은 곳이 나왔다. 왜적이 두려워 인가에의 숙박은 감히 엄두도 내지를 못했다. 조를 심은 밭을 지날 때마다 조 몇 삭 씩 따서 그것을 씹었다. 작은 웅덩이에 흙탕물을 한 표주박의 음료로 마셨다. 소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고, 밤 시간 때의 반은 비가 집중적으로 내려 옷을 적시니 (허기를 진데다가) 추위가 더 심했다.

1592년 9월 5일

9월 5일 이른 아침에 산을 내려와 이윽고 작은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작은 길을 따라가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피난민이 모여 있는 초막이 나타났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성명을 물으니, 신림역 역관의 아들 이흔손, 박충거지, 이일산이라고 하였다. 이들 세 사람이 각자 그 역할을 나눠 맡아 아침을 대접해 주었다. 또한, 김주질동·박금손이 다른 곳에서 마침 왔는데, 패랭이를 아버지에게 주고, 쌀 한 되박도 주었으며,. 고언영에게는 짚신을 주었다. 박금손은 나에게 패랭이를 주고, 이흔손은 쌀 한 되박을 주었다.

(서로 만나) 오가는 엇갈리는 가운데 몇 걸음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역관의 자식 복지가 주먹밥을 차고 왔는데, 사령(使令) 고언영이 그것을 얻어 가지고 길을 나섰다. 고개를 하나 넘으니 초가집 4,5채가 있는 구리파(求利坡)에 도착했는데, 임원(林元)이 사는 곳이다. 임원을 자리를 정돈하고 들어오라고 청하였다. 고기반찬으로 대접해주며 그 마음 씀이 정성스러웠는데, 그의 나이는 65세라고 한다. 그의 아들은 수원(守元)·수정(守丁), 은희신동(銀希五十同)이고, 그의 사위는 장쉰금(張五十金)이다. 그들은 서로 교대로 우리에게 와서 더욱 지극 정성을 다해주는 원씨(元氏) 집에 유숙하였다.

1592년 9월 7일

9월 7일에 이른 아침에 임원의 사위 장쉰금이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반찬과 고기로 정성스럽게 대접해주었다. 이 지역은 최근 적들이 다닌 곳이므로 밤을 틈타 출발하고자 하자 정원과 그의 아들들이 서로 우리를 보내는 방법을 논의하였다. 마침 신림역 역관의 아들 박연이 이속으로 말을 끌고왔는데, 임원 등이 말을 (우리에게) 빌려줄 것을 강력히 권하자, 박연은 그것을 허락해 주었다.

임수원(林守元)도 우리와 함께 떠나겠다고 하고, 임원(林元)도 도시락을 가지고 따라오니, 한 가정 여기에 동시에 참여한 것이다. 해질 무렵에 홍현(紅峴)을 넘어 신림(新林)을 지나 석남(石南)에 들어가니 밤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유현(杻峴) 고개를 넘고 신흥(新興)에 들어면서 박연이 길가에 있는 한 집을 두들기니 스님이 먼저 나왔다. 주인이 나와 불을 밝혀 맞아주었고, 우리 부자에게 죽을 쑤어 대접해 주었다. 주인의 이름은 김언(金彦)이고, 스님은 서진(西珍)으로 본래 이대진(李大震) 재사(齋舍)에 살았다고 한다. 이경진(李景鎭)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소문을 듣고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밤은 깊어졌는데, 바로 떠난다고 하니 서진이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였는데, 그 뜻이 고마웠다. 샛길로 경유하여 주천 중방리에 이르러 서진이 아는 안백령(安白靈)의 집으로 갔다. 환영을 받으며 빈 대청(大廳)에 들어가 죽을 대접받은 뒤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새벽에 주천현의 교생 이몽길(李夢吉)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일찍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한 사람이다. 서로 공손하게 깊은 위로를 하였다.

1592년 9월 8일

9월 8일 날이 새기 전에 갈현 고개를 넘어 이천복(李千福) 집에 이르자, 그 집에서 아침밥을 지어 대접해 주었다. 현(縣) 사람 생원 원철(元澈)이 원백령의 부탁을 전해 듣고, 해어진 검푸른 도포와 쌀 몇 되와 포(脯) 다섯줄을 주었다. 이천복도 마늘 두 단을 주었다. 우론리(于論里)를 지나 주천현 호장(戶長) 윤희경(尹希慶) 집에 들어서자 이미 오후가 되었다. 아버지는 스님 서진(西珍)에게 평창의 사정을 알아보라고 하여 그는 바로 떠나고, 우리 부자는 이어서 유숙하였다.

1592년 9월 9일

9일 아침식사 후에 사오질현(沙五叱峴) 고개를 넘는데, 고개 위에서 임시관리 손수천(孫壽千)을 만났고, 손수천이 이끌고 온 관노 만천(萬千)·학지(鶴只) 등을 만나자 환영해 주었다. 서진이 돌아가고, 좌수(座首) 나수천(羅壽千), 별감(別監) 나사언(羅士彦) 등도 군 내에 들어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팔음탄리(八音吞里) 김막석 집에서 손수천이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밥상에 민물고기는 별감 이경조(李敬祖)가 보낸 것이다. 즉시 학지(鶴只)를 영천으로 보내 탈출하여 돌아왔음을 고하도록 하였는데, 막석(莫石)의 동생 막대(莫大)가 단술을 가져와 주었다. 저녁에 남종년(南從年)의 아내도 단술과 떡 등을 가져왔다. 관아의 소속 관리들이 모두 와서 알현하였다.

1592년 9월 10일

10일 막석이가 국수를 만들어 주었다. 사현(沙峴) 고개를 넘고 약수동을 지나 조파(朝坡)를 통과하면서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여림(李汝霖)이 밖으로 나와 말을 탄 아버지의 말머리를 향해 절을 했다. 마침내 미둔현(味屯峴)에 이르러 박옥손(朴玉孫) 집에 서 짐을 내렸다. 훈도 이상무(李商霖)가 술을 가지고 와서 알현하였다. 김성경·나사언·나수천·이경조·이시무·지대성·지대명 등 모두가 왔다. 이때 이시림은 자신의 형이 영월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대체로 이들 모두는 우리들이 탈출하여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임수원과 박연이 돌아가려 하자 이들에게 각각 포 1필씩을 주어 보냈다. 좌수 나수천과 훈도 이상무는 우리와 함께 잤다.

1592년 9월 11일

11일 아침식사 후 우론리(于論里) 김석진(金石陳)의 집으로 갔다. 점심때에 김방복(金方福)이 소고기를, 신말정(申唜丁)이 싱싱한 배를, 김옥경(金玉京)이 마늘을 증정하였다. 가노(家奴) 원정(元丁)·임손(林孫)·석문(石文)·개석(介石) 등이 영천에서 왔다. 왜적이 8월 18일 사문(沙文)·단천(丹川)을 침범하여 일가(一家) 모두가 달아나 숨어 있다가 들어왔다고 하는 소식을 비로소 들었다. 임손과 석개를 정동에 보내 서모(庶母)의 무덤을 두텁고 견고하게 흙을 돋우는 조처를 취하도록 하였다. 오후에 칠족현 고개를 넘어 엄근신(嚴謹臣)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1592년 9월 12일

12일 아침식사 후 화을곡현(火乙谷峴) 고개를 넘고 석항(石項)을 지나 점심을 영월(寧越) 상동면(上東面) 이향(李香)의 집에서 먹었다. 직실(直實)을 거쳐, 십을현(十乙峴) 고개를 지나 미사리(瀰沙里)에 이르자 날은 이미 저물었다. 김세후(金世厚)의 집에서 유숙했다.

1592년 9월 13일

13일 아침식사를 마친 뒤 마해천(馬孩川)을 지나면서 신관(信寬) 스님을 만나 그의 인도로 길 가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 식사를 대접받았다. 마아령(馬兒嶺) 고개를 넘고 있는데 고개 위에서 김덕란(金德鸞)을 만나 우동(愚洞)에 있는 친척 류치운(柳致雲) 집에 들어갔다. 얼마 있다가 영춘(永春)에서 온 형이 도착하였는데, 아버지를 어찌나 찾아다녔던지 길이 서로 어긋나 만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권회인(權懷仁)·민조숙(閔肇叔)·박경승(朴景承) 등이 술을 가져와 위로해 주었다. 저녁을 먹은 뒤 출발하여 초저녁에 광현(廣峴)에서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선조묘에 절을 하였다. 조와동(助臥洞)에 이르러 권경섭(權景涉)·이여흡(李汝翕) 등과 집안 여러 친족, 그리고 직솔 노비들이 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바로 원당(圓塘: 둥그런 연못 혹은 고유건물이나 지명)의 별장(임시거소)에 다다르니 밤은 이미 깊었다.

부록

돌아가신 아버지 남천선생은 『호구록』에서 말씀하기를

‘왜적이 검을 휘둘러 나를 향해 내리쳤다. 강녀(康女)가 재빨리 몸으로 나의 등을 덮치며 막았다. 나를 죽이고 지아비를 살려달라면서 또한 껴안고 통곡하였다. 마침 동굴이 좁아서 왜적의 검 끝이 동굴의 벽에 부딪치고 몸에는 닿지 않았으나 내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나의 어깨에 상처를 냈다. 피가 물처럼 흘렀다. 왜적은 먼저 나를 묶어 굴 밖으로 끌어내려 놓고서 또한 강녀을 잡았다. 강녀는 (자신의 몸이 더렵혀질 것을 알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내가 먼저 묶이어 나가니 입은 옷이 피로 얼룩졌다. 끌려가는 곳을 물었지만 역시 나를 주의하여 살피려 하지 않았다. 가래를 뱉으니 빨간 피가 나왔다.

왜적이 물었다. “너는 글씨를 아느냐?”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모른다”고 했다

왜적 여럿이 내손을 잡고 한참 뚫어지게 보고 말하였다. “굴 속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누구냐?”

울면서 대답하였다. “나의 서모다.”

왜장은 “바다를 건너온 이래 너의 어미 같은 이는 처음 본다.”고 탄식했다.

통역하는 왜인이 적의 두목 앞에서 .

“너의 이름은 뭐냐”고 물었다.

자그마한 소리로 “내 이름은 한신이다.”라고 답했다

다시 “너는 글자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모른다.”고 답했다.

왜장이 내게 “너는 바로 조선의 높은 관리의 아들임에 틀림없다. 용모도 영민하고 비범한데 어찌 배우지 못했다고 둘러 대는가. 네가 만일 글자를 안다면, 우리는 너를 죽이지 않고 비단옷으로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여주며, 좋은 칼을 주고 좋은 말도 타게 해 너를 정성스럽게 대우해 줄 것이다. 만약 네가 우리를 따라 일본에 가면 높은 벼슬을 주고 부귀를 누리게 할 텐데 그 역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달래었다.

나는 “부자(父子) 사이는 인륜의 지극함이 있다. 이제 죽음 직전에 다다른 형세로 우리 부자를 온전하게 함께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황당한 상황에서 나의 아버님을 살려 보내준다면 비록 내가 여기 남아도 마음이 편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들인 나만 살아남게 된다면 그것은 어찌 되리가 될 수가 있겠는가”

왜장이 “너의 아버지가 지금 죽음을 면한 이 지경에 이른 것도 오직 너 때문이다. 당연히 너희 부자가 사면을 받아 함께 일본으로 가면 너는 좋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나는 “나의 아버님께서 노부모님을 모셔야하는데, 그 노부모를 봉양할 형제도 없다. 그러니 멀리 떠나는 것은 불가하다. 아버님 몸도 이미 병이 들어 돌아가실 지경이 되셨다.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면 아버님을 풀어주시는 것 보다 더한 일은 없다. 물론 다른 의심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대답했다.

왜장은 “그렇다면 너의 아버지의 부모에게 서신을 보내 이곳에 불러 모셔와서 다함께 일본으로 가면 더 좋지 않는가.”라고 회유하였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머리를 숙여 서럽게 울었다.

왜장은 “울음을 그치라. 네가 말한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고 위무하였다.

왜적은 나에게 종이와 붓을 주고 글로 쓰리고 명하였다.

나는 몇 행의 글자로 “나의 아버지는 본래 질병이 많다. 또한 부상까지 당하셔서 비록 칼을 더 맞지 않더라도 반드시 쓰러지실 터이니 빨리 아버님을 풀어주고 아들인 나는 여기에 남고 싶다“고 썼다.

왜적은 또한 “경성에 대장이 있는데, 대장에게 너의 뜻을 당연히 올릴 것이니, 너는 의심하지 말라.”고 위로의 답변을 해주었다.

왜적은 글을 본 뒤에 포박을 풀어주지는 않았으나 친밀한 뜻이 있음을 그럴듯하게 보여주었다.

심신이 상심되고 혼란하여 종일토록 혼수상태로 지냈다.

야밤 3,4 경에 이르러 목을 매고 자결하려 힘이 부칠 때가지 울부짖어 거의 절명에 이르렀으나 목숨이 다시 살아났다. 나는 부뚜막에 걸 터 앉아 마음을 다잡고 일어났다. 목에 새끼줄을 감고 들보에 매어 여러 번의 시도를 거듭했다. 목을 맨 것이 자진(自盡)을 기약하고 알지도 모를 정도로 나의 목소리가 말려들어가는 것이 들리었는데 새끼줄이 느슨해졌다. 두 눈 알이 빠지는 것 같았고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새벽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고 소리조차 감히 내지 못하였다.

나를 위로하시기를 “너는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나이로, 앞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세상이 알아주는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거늘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하셨다.

이에 나는 “행운과 불운은 운명에 맡겨져 있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자식 때문에 마음을 상하려 하십니까. 다만, 하늘과 땅, 해와 별, 산천의 귀신이 아버님을 호구(虎口: 전쟁 포로가 된 위험한 신세를 호랑이 입에 물린 것처럼 비유)에서 벗어나게만 해 즌다면 비록 왜적의 칼에 찔려 죽는다고 해도 무슨 한이 남아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며, 우리 부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통역하는 왜인이 관리가 업무를 보던 관아 서쪽 상방(上房)에 우리를 부장(副將) 원개녹지(源介綠之) 앞에 끌고 가서 “너는 지금부터 부장을 모시는 일에 소속되어 지금부터 부장을 좌우에서 잘 모시고 여기서 자고 지내도록 할 것이니, 딴 마음은 먹지 말아라”라고 당부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처리가 아버님을 해칠 것이라는 낌새를 느낀 나는) 아비를 죽이고 아들은 살릴 것을 우려하여 곧 바로 “늙으신 아버님의 병환이 위중하여 잠시도 떨어질 수가 없다. 병가(兵家)에서는 효제(孝悌,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와 형제 사이의 우애)를 우선으로 하거늘, 그 아비를 죽이고 그 자식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가?. 만약 아버님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당연히 죽음을 각오할 뿐이다.”라고 응대했다.

왜장은 자신 부하와 얼마동안 서로 돌아보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잠시 동안 너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니 아버지에게 돌아가라. 가금 이곳으로 와도 좋다“라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감역 이사악(李士岳)이 포로로 잡혀 와서.

“왜적들이 우리를 당장 죽이지 않는 것은 우리를 포로로 하여 자기 나라에 데려가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려고 하는 짓이다. 그대 아들을 귀중히 여겨 어르신을 베지 않은 것 같다. 불의로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는 의로써 죽는 게 나으니 형세를 보아가며 죽을 시기를 선택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머리를 박아 피가 돌계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늙으신 아버님이 오랫동안 병세가 나날이 심해지고 목숨이 오늘 내일 달렸으니 빨리 풀어주길 바란다.”고 하면서 눈물을 쏟으니 왜적의 우두머리가 그 하급병사를 급히 불러 나를 일으켜 세우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한 뒤 결박을 잠시 풀어주었다.

왜적의 괴수가 우리 임금의 휘(諱)가 찍힌 왜서(倭書)를 나에게 보여주고 해석하여 읽기를 명하면서 “이것은 누구의 이름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적의 괴수는 다시 나에게 “과연 모르는가?”라고 되물었다.

“아들은 아버지 함자를 부르기를 피하고 신하는 임금의 함자 부르기를 피하는데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왜적 괴수는 “너의 왕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라고 비판하는 말로 비꼬자

나는 답하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나라를 버린 왕의 움직임은 형세가 불리하여 난을 면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라고 왕을 비호하고자 하였다.

다시 김성일(金誠一)의 이름을 쓰고선 나에게 물었다. “이 인물도 아는가?”라고 물었다.

“내 아버지의 친구시다.”라고 답변하였다.

“지금 어떤 벼슬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다녀와서 지금은 왜적 정벌이란 명받고 영남으로 가 계신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다시 “이덕형(李德馨)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여러 차례의 서찰 보고에 의하면 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있다고들 하더라.“는 답변으로 응했다.

왜적 괴수는 “김성일과 이덕형은 너희 나라의 현명한 재상이다. 너희 나라에는 두 사람만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가?”라고 물었다.

“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지만 여러 재상과 장군이 될 현명한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답변하였다.

왜적의 괴수는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왜적의 괴수가 다시 나에게 “너희 나라는 중국 명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여. 우리 일본 병사 무리들을 죽이려 하지만 중국의 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

“중국 명나라 조정과 우리 조선은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 병란(兵亂)이 생기면 걱정을 같이 한다. 중국 황제는 천하의 병사를 움직여 동쪽을 직접 정벌하려고 한다.”고 답하자 왜적의 무리들은 서로 크게 비웃었다.

원주에 도착하여 문서루(文書樓) 위의 창고에서 지냈다. 날씨는 점차 추워지는데, 홑옷 바지저고리 한 벌 뿐 다른 입을 것이라곤 없었다. 관청 서류장부와 서책을 싸놓은 겉 포장지를 벗겨서 그 종이로 노끈을 만들어 버선모양으로 꿰매어 양 다리에 덮개로 삼았다. 우리 네 사람이 모두 그렇게 착용하고 있었으니, 그 괴로움을 헤아릴 수가 있다. 몰래 벽을 뚫으라고 명하고 왜적이 없는지 살피려 나가게 했다. 손으로 욋가지를 엮어 그 위에 흙을 발라 놓은 벽을 바깥의 흙을 파내서 욋가지에 구멍을 내었는데, 밖에서 들어다 볼 때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욋가지에 입힌 바깥 흙이 그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손은 작으므로 욋가지 구멍으로 손이 들락날락 할 수 있으니 어찌 신통하다 않을 수가 있겠는가.

흙을 모두 파낸 뒤에 욋가지를 (마지막으로) 빼내야 한다. 그 욋가지 중에서 가로지른 큰 기둥은 나무로 만들어서 시간이 지나면서 튼튼해져서 쪼갤 수가 없었다. 땀이 비가 오듯 흘려 내렸으나 부러뜨릴 방법이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

“갑자기 우리들이 살아날 묘책이 떠올랐다. 우리가 욋가지를 불로 태우기로 결정했다. 발[足]의 상처를 지지기 위하여 기왓장을 달구고 있었는데, (그것을 불로 이용하여 불을 피웠다). 우리가 문서루 아래에서 불을 피워도 왜적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 욋가지에 열을 가하니 불에 타 떨어지기 시작, 벽의 구멍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경진이가 “우리가 살아 돌아가 하늘의 해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모두 군(君)의 힘 덕택이다.”라고 감복하였다.

감시 왜적 5명이 횃불을 들고 들어와 교대로 들어다 보며 확인하고서도 의심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는 “오늘 밤에는 우리가 일을 성취하지는 못한다.”라고 말했다.

밤이 다하도록 빌며 축원(祝願, 빌며 원하다)하기를 “하늘이 나의 아버님을 살리시려면 천둥번개를 동반한 큰 비를 쏟아 부을 것인즉, (그렇게 되면) 왜적이 의심하지 않고 속박을 느슨하게 할 것이다. 모두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그 같은 큰 비를, 그 같은 큰 비를“하고 정성을 다해 마음속으로 그러한 비를 ‘내려주십시오’라고 묵묵히 빌고 있었다.

왜적 통역이 와서 물었다. “요즈음 너의 포박을 느슨하게 하여 너의 뜻대로 하도록 맡겼다. 너의 뜻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또한 너는 우리 상관 앞에서 좀 더 가까워질 생각은 조금도 없는가?”라고 달래는 질문을 했다.

나는 “아버님의 발의 통증이 아직도 심해서 내가 돌보아드리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하겠는가?.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도와드리지 못할 뿐이다. 만약 아버님을 풀어주면 아버님의 병환을 치료케 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나는 비록 이곳에 포로로 잡혀 있더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왜적 통역은 “상관이 너를 결박하라고 명하였다.”고 말하고 나를 기둥에 묶었다.

우리는 밤 2경을 기다렸다. 큰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천둥소리가 두려워서 떨 정도였고, 천지는 어두컴컴한 세상으로 막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경진이가 “오늘 내리는 이 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간절히 빌어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속언(俗諺)이 헛된 말이 아니구나!” 라고 감복해 마지않았다.

우리들은 기뻐하며 “오늘 밤이야말로 하늘의 뜻임을 알 수 있으니, 어찌 탈출하지 않고 기다리겠는가!.”라고 하면서 각자 포박의 끈을 풀고 탈출하였다.

위의 『호구록』의 모든 기록은 공이 효도로써 하늘을 감동시키고, 기민(機敏)한 꾀를 낸 사실로서 근거할 만한 것을 갖추고 있다. 삼가 그 『호구록』의 대강(大綱)을 여기에 함께 부기(附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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