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학자료]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창군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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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민 승인 2021.08.10 22:05 의견 0

동쪽은 정선군(旌善郡) 경계까지 45리, 남쪽은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28리, 서쪽은 원주(原州) 경계까지 24리, 북쪽은 강릉부(江陵府) 경계까지 1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이다 우오(于烏)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백오(白烏)로 고쳐서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원주(原州)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25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신우(辛禑) 때에 총애하는 환자(宦者) 이신(李信)의 고향이라고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으나 뒤에 도로 현령으로 하였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조(太祖) 원년에 목조효비(穆祖孝妃)의 고향이라고 하여 다시 높여 군(郡)으로 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욱오(郁烏)ㆍ백오(白烏)ㆍ노산(魯山).

【성씨】 본군(本郡) 이(李)ㆍ윤(尹)ㆍ김(金)ㆍ추(秋)ㆍ별(別). 김(金) 개경(開京).

【산천】 노산(魯山)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수정산(水精山)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가물면 여기에서 비를 빈다. 거슬갑산(琚瑟岬山) 군의 서남쪽 20리, 원주(原州)의 주천현(酒泉縣) 경계에 있다. 성마령(星磨嶺) 군의 동쪽 44리에 있다. 미탄현(味呑峴) 군의 동쪽 17리에 있다. 평안천(平安泉) 평안역(平安驛)의 남쪽 1리에 있다. 군과의 거리는 30리이다. 산기슭의 절벽 밑에 창문 같은 구멍이 있어 장마철마다 물이 구멍으로부터 솟아 나온다. 또 그 남쪽에 샘이 있으니 솟아오르고 내뿜어서 드디어 큰 냇물을 이루었다. 용연진(龍淵津) 군의 북쪽 9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영서(嶺西) 와공산(瓦孔山)에서 나온다. 남진(南津) 군의 남쪽 1리에 있는데 바로 용연진의 하류이다. 마지진(麻池津)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즉 남진의 하류이다. 연화진(淵火津)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 용연(龍淵) 이하는 모두 나루터이다.

【토산】 옥석(玉石) 군의 서쪽 적암리(赤巖里)와 군의 동쪽 성마령(星磨嶺)에서 난다. 동철(銅鐵) 군의 서쪽 양탄리(梁呑里)에서 난다. 자연석(紫硯石) 미탄현(味呑峴)에서 나는데 그 품질이 가장 좋다. 옻[漆]ㆍ잣ㆍ오미자ㆍ자단향(紫檀香)ㆍ안식향(安息香)ㆍ지치[紫草]ㆍ석이버섯ㆍ인삼ㆍ지황(地黃)ㆍ복령(茯笭)ㆍ꿀ㆍ영양(羚羊)ㆍ산무애뱀(白花蛇)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ㆍ송이.

【학교】 향교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약수역(藥水驛) 군 서쪽 10리에 있다. 평안역(平安驛)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지상원(祉祥院)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천천원(泉川院)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ㆍ여단(厲壇) 모두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사서량 부곡(沙西良部曲)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답곡소(沓谷所) 군의 동쪽 45리에 있다. 고림소(古林所) 군의 동쪽 59리에 있다. 신림소(新林所) 군의 동쪽 65리에 있다. 석을항소(石乙項所) 군의 동쪽 63리에 있다. 양탄소(梁呑所)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내화석소(乃火石所)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노산성(魯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3백 64척, 높이가 4척이다. 안에 한 우물이 있다. 지금은 반 정도 퇴락하였다.

【인물】 고려 이천기(李天驥)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신증』 본조 이계남(李季男)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계동(李季仝) 계남의 아우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領中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그때 세상에서 명장(名將)이라고 일컬었다.

【열녀】 고려 안씨(安氏) 전의정(典醫正) 경덕의(景德宜)의 아내이다. 신우왕(辛禑王) 때에 왜적(倭賊)이 난입하여 안씨가 후원(後園)의 움집 속에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내 욕보이려 하였으나 안씨는 듣지 않아 살해되었다.

【제영】 산을 베개하고 골짜기에 깃들인 백성의 집들이 있는데 정탁(鄭擢)의 시에, “산을 베개하고 골짜기에 깃들인 백성들의 집들이 있는데, 옛 고을은 몇 리에 걸쳐 쓸쓸한 모습이로구나. 세월이 오래니 이미 자취는 기와집을 봉(封)하였고, 비가 개니 아지랑이의 푸르름은 뜰에 가득하게 서린다.” 하였다. 구름을 거두니 푸른 산이 지붕 모서리에 당하였네 윤홍(尹弘)의 시에, “비 온 뒤의 무성한 풀은 마을길에 가득하고, 구름을 거두니 푸른 산은 지붕의 모서리에 당했네.” 하였다. 흰 구름이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깊이 잠궜네[鎖]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우연히 흐르는 물을 따라 근원의 막다른 곳까지 와서, 공연히 복숭아꽃 비단 물결 겹치는 것을 볼뿐. 동학(洞壑) 속의 신선의 집은 어디에 있는고. 흰 구름이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깊이 잠궜네.” 하였다. 하늘이 낮아 재[嶺] 위는 겨우 석 자 높이로구나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중원(中原)의 서기(書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옛 고을 쓸쓸한 옛 산의 모퉁이로다. 문 앞에 땅은 좁아서 수레 두 채를 용납할 만하고, 하늘이 낮아 재 위는 겨우 석 자의 높이로구나. 가을이 깊어 가니 벼 이삭은 모래밭에 흩어지고, 세월이 오래된 솔뿌리는 석벽에 얽혔네. 이곳의 길이 험난하기는 촉(蜀) 나라 길보다도 어려우니, 집에 돌아가는 기쁨이 금성(錦城)의 즐거움보다 났겠네.” 하였다. 구름은 위태한 봉우리를 호위하여 푸른 벽(壁)을 뚫는다 남긍(南兢)의 시에, “노을은 경치 좋은 곳을 표시하여 돌벼랑을 덮었고, 구름은 위태한 봉우리를 호위하여 푸른 벽을 뚫는다. 말을 타고도 오히려 가는 길이 험난한 것을 노래하며, 사람을 만나면 시험삼아 돌아가 농사짓는 즐거움을 물어본다.” 하였다. 바른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니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빨리 달리는 역마(驛馬)를 타고 머물 겨를 없어, 바로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렀다. 사마천같이 멀리 유람함은 아직 그치지 않았고, 진등(陳登) 같은 호기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노라. 시름을 씻는 데 병에 술이 없을 수 있으랴. 기이한 것을 구하는데 도리어 상자에 글이 있구나. 이번 유람의 기절(奇絶)함이 평생에 으뜸되니, 좀 먹은 책 속의 좀벌레 같은 생활이 우습기만 하여라.” 하였다. 일백 가지 근심을 노성(魯城)의 봄에 흩어버리니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어제 일찍이 큰 재[大嶺]로부터 왔더니, 회오리바람에 의지하여 만리를 양각(羊角) 속에 돌아서 온 것 같구나. 매단 것 같은 벼랑에 끊어진 돌계단은 돌기가 겁이 나고, 고목과 창등(蒼藤)은 지척이 아득하네. 다리 밑에 이젠 이미 평탄한 길을 찾은 것을 알건만, 꿈속에는 아직도 파란 절벽을 기어오르는 꿈을 꾼다. 백 가지 시름을 노성의 봄에 흩어버리니, 술 마시며 높은 소리로 담소하여 즐겨하노라.”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군내면(郡內面) 끝이 17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은 2리, 끝은 17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7리, 끝은 28리이다. 미탄(味呑) 동남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45리이다. 동면(東面) 동남쪽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리이다. 사서량 부곡(沙西良部曲)은 북쪽으로 10리, 고림소(古林所)는 동남쪽으로 59리, 답각소(畓各所)는 동쪽으로 45리, 돌항소(乭項所)는 동남쪽으로 63리, 신림소(新林所)는 동남쪽으로 65리이다.

【성지】 노산고성(魯山古城) 둘레가 1천 3백 64척, 우물이 하나, 양탄소(梁呑所)는 남쪽으로 15리, 내화석소(乃火石所)는 동남쪽으로 5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동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진도】 주진(周津)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용연진(龍淵津) 동쪽으로 9리에 있는데, 주진의 아래이다. 남진(南津) 남쪽으로 1리에 있는데 용연의 아래이다. 마지진(麻池津) 서쪽으로 17리에 있는데 남진의 아래이다. 연촌진(淵村津) 바로 주촌강(淍村江)이다.

[주-D001] 진등(陳登) :

동한(東漢) 때의 사람이니 자는 원룡(元龍)이다. 허범(許氾)이라는 사람이 유비(劉備)에게 그의 인물평(人物評)을 하여 말하기를, “원룡은 호해(湖海)의 선비로서 호기(豪氣)가 일찍이 떨어진 일이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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