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지역 초기 천주교의 몇 장면들

전형민 승인 2021.09.21 20:55 | 최종 수정 2021.09.21 21:10 의견 0

1. 평창지역은 천주교도들이 은거하기 좋은 장소였다.

1883년부터 원주, 횡성, 강릉, 평창 등지의 천주교 신자들의 숫자 등의 통계를 살펴보면

평창지역은 다른 지역의 신자 수와 비교해서 월등히 많은 수치를 보인다. 1888년 신도수를 비교하면 원주지역이 51명, 횡성이 131명인것에 비해 평창은 420명으로 원주에 비해 8배 횡성보다는 3배 많은 신자수를 보인다. 1883년부터 1904년까지의 신자 수 누적 통계를 보면 원주가 3,691명, 횡성이 6,170명, 강릉이 1,548명에 비해 평창은 8,043명으로 월등히 많은 신도수를 보인다. 인구가 적은 평창이 원주 횡성 등에 등에 비해 천주교 신자가 월등히 많았던 이유는 산이 많은 평창일대는 숨어서 신앙을 지키기에 적합한 곳이었으므로 신자 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2. 평창과 관련된 순교자들.

평창의 천주교사에 있어 1868년 천주교 박해 당시에 계촌면에서 두 순교자가 체포되어 결국 순교에 이르게 된 사건이 주목된다.

1862년에 천주교도 심능석이 ‘강릉 계촌’에 이사 왔다.

1866년 당시 서울에서 천주교회의의 중요한 일을 수행했던 이유일(안토니오)은 박해가 일어나자, 계촌의 심능석 집으로 파신하였다.

1868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치열해 지명서 홍천, 횡성, 소초, 둔내 등에서 체포된 신자가 있었고, 체포령이 내려진 이유일을 체포하면서 집주인 심능석도 체포되었고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1862년부터 천주교 신자 심능석이 살았고, 1866년 이유일이 피신하여 1868년 체포된 장소인 ‘강릉 계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세가지 주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강릉 계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는 ⓵ 강릉시 사천면 석교리 구리마을이라는 설(장정룡 강릉원주대교수) 과 ⓶ 강릉시 성산면 위촌2리 경암이라는 설(방동인 전관동대교수)이라는 두 설이 유력하였으나, 정원대 향토사학자가 2019년 3월 평창 계촌면이라는 설을 천주교계에 알려 천주교계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검토하여 한국교회사 전공 여진천 신부(수원카톨릭대학교 교수)가 2019년 논문으로 순교자 심능석의 거주지 및 순교자 이유일이 체포된 장소가 정원대의 주장대로 현재의 평창군 방림면 계촌3리 ‘굴아우’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김의호의 아들 김희달(金喜達)과 전북 김제 금구에 살던 손동이(孫同伊)를 평창으로 유배시켰다.

유베드로는 충청도 제천 북면에서 살다가 강릉 영서 계골 유벽처에 있다가 이사하여 평창 도돈리에 와서 살았다. 1869년 8월 포교에게 잡혀 죽산으로 이송되었다.

3. 뮈텔주교의 평창지역 순방.

뮈텔주교는 1900년 10월 9일부터 12월 8일까지 강원도를 사목방문하였다. 특히 11월 14일 평창군 봉평면 서내 교우촌을 시작으로 16일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 있는 향교터, 17일 평창읍 하일리 수청(물푸레) 공소, 19일 미탄면 회동리 산너미 공소, 20일 평창읍 조동리 새골 옛공소, 진부면 장평리 고인돌 공소를 방문한 후에 영동지역으로 떠났다.

4. 평창군 공소별 신도수 추이

<1882년-1919년 평창군 천주교 신도 추이>

신도수 통계는 이원희,「풍수원 본당의 교우촌에 대하여」,천주교원주교구,『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풍수원성당재발견심포지엄 』,2019.10.4., pp.62-83.

고인돌

피대울

서내

속새목이

황골

향교터

창목골

무푸레

하일

조둔

새골,

산넘이

서시내

중부

어우실

거커리

합계

비고

1882-

1883

29

70

75

18

46

238

1883-

1884

12

58

68

37

55

230

1884-

1885

22

108

88

13

37

82

350

1885-

1886

25

80

78

22

12

48

57

14

336

새터(새골)

1886-

1887

80

22

23

9

64

72

270

새터(새골)

1887-

1888

45

40

100

30

42

62

80

51

450

새터(새골)

1888-

1889

52

110

95

27

29

31

18

59

85

7

513

1889-

1890

55

108

89

43

32

91

68

486

1880-

1891

57

90

96

26

59

28

59

415

1891-

1892

89

69

79

24

27

22

31

56

41

438

1892-

1893

83

35

87

20

28

35

40

47

375

1893-

1894

101

28

80

27

71

39

346

1894-

1895

108

20

127

28

49

53

39

424

1895-

1896

107

129

32

34

65

38

405

1896-

1897

123

120

47

42

58

46

436

1897-

1898

105

148

37

49

78

31

448

1899-

1900

33

110

42

33

38

256

1900-

1901

104

164

59

39

71

66

39

542

1901-

1902

119

91

55

44

57

49

46

461

1902-

1903

107

112

23

65

77

65

57

506

1914-

1915

159

48

62

82

16

367

1915-

1916

190

45

66

88

389

1916-

1917

172

37

64

77

350

1917-1918

151

37

65

52

305

1918-1919

161

32

61

35

289

평창지역의 신도수 추이를 천주교계에서 집계한 내용을 보면, 1882년부터 통계가 확인되는데 1882년에는 천주교 신도수가 238명에서 1886년 천주교 포교가 허용된 이후인 1887-1889년에는 450명, 513명으로 늘었다가, 1888년부터 1903년까지는 대략 400-500여명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14년 이후에는 300명대로 떨어지는 추이를 보였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처음 통계가 나타난 1882년부터는 피대울(대관령), 서내(봉평), 산넘이(미탄) 등이 중심이었으며, 이후 1891년에 가면 피대울(대관령), 고인돌(용평),서내(봉평),속새목이, 황골(대화), 물푸레(평창), 하일(평창), 새골(평창), 산넘이(미탄) 등으로 천주교도들의 분포가 늘어난다. 1910년대에 들어서는 고인돌(용평)이 중심으로 향교터(계촌) 산넘이(미탄) 어우실(평창) 지역 등으로 공소의 분포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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