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풍악록(遊楓嶽錄) <금강산 유람기/평창기록>

만모(晩慕),정기안(鄭基安)

高 柱 浩 승인 2021.09.28 14:21 | 최종 수정 2021.09.28 18:02 의견 0

[평창 유람기] 유풍악록(遊楓嶽錄) 중 평창기록

◾여행개요 : 정기안(鄭基安)은 조화숙(趙和叔)과 함께 1742년 9월 2일 영리에서 출발하여 원주 남쪽의 오원역거쳐 3일에는 운교역에 도착하여 모노현을 넘어 진부역을 거쳐 월정사 등 오대산를 구경하고 대관령을 통하여 7일 강릉으로 넘어가 10일까지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 중 평창 유람부분을 옮겨 싣는다.(편집자)

▪ 만모 정기안 ; 정기안(鄭基安, 1695-1767)의 초명은 사안(思安), 자는 안세(安世), 호는 만모(晩慕), 시호는 효헌(孝憲),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좌의정을 지낸 정순붕(鄭順朋)의 후손으로 172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8년 사헌부 지평, 1741년 사간원 정언 역임하였다. 1742년 9월 금강산을 유람하고 「유풍악록」을 남겼다. 1766년 한성부 우윤·지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유교와 불교, 도교, 천문, 의술, 음률 등에도 정통하였으며, 문장과 산수화에도 안목이 깊었다. 저술로 『만모유고』가 있다.

◆ 조선 사대부들의 유산기를 통해보는 선비들이 만든 평창역사를 조명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국의 산수를 유람하며 약 500여편의 유산기(遊山記)를 남긴바 그중 오대산기로는 김창흡, 허민수(허목- 남인의 효수로 삼척부사 역임)가 있으며 앞으로 약 20여회분 유산기는 금강산 유람기속에 평창을 서술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평창을 새롭게 조명한다.

과거 선비들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코스는 서울서 연천, 강원도 금성, 흡곡( 통천쯤)을 거쳐 금강산으로 가는 코스와 춘천-인제로 넘는 코스 그리고 양양- 강릉-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까지 유람하는 코스 등이 있었다. 평창에서는 방림 운교로 빠져 나가는 영부도로(후일 관동대로 또는 강경도로)와 이치(뱃재)를 넘어 평창 영월 원주로 다닌 코스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선비들이 보고 기록한 또하나의 평창역사를 조명한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본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유람기에서는 대화 석굴, 현재는 종유굴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 석굴은 별로없어 신비의 대상이었던 듯 하다. 앞으로 금강산 유람기중 평창에 대한 연재에 많은 관심을 바란다.

정선의 그림

금강산도 산이니 천상에 있지 않아 귀한 사람, 천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 구분 없이 모두 한 번 오르고자 한다. 우리나라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평생의 소원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런 것은 우리나라 내에 없을 뿐만 아니라 천하에도 그런 산이 없으리란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한 번 유람하리라는 뜻을 가졌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임술년(1742년) 봄. 강원도 도사(都事)에 제수되어 금강산을 유람 할 기회를 얻었다. 수송을 감독하고, 진휼(賑恤)을 점검하라는 명을 받아서 한양에서 곧바로 고성(高城)으로 달려갔다가 남쪽으로 평해(平海; 울진의 옛 지명)에 이르게 되었다. 한줄기 바닷가 길에 있는 이른바 8경을 모두 볼 수 있었으나 유독 금강산만은 가볼 겨를을 내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매우 아쉬웠다. 이해 가을이 되어 다시 동쪽으로의 유람을 시작하였다.

9월 2일 무오. 감영에서 출발하여 오원(烏原)에 이르러 묵었다.

9월 3일 기미. 회현(檜峴)을 넘을 때 고개가 험난한 것을 투덜대며 길을 갔다. 해질녘에 비로소 운교역(雲交驛)에 도착하여 묵었다.

9월 4일 경신. 길을 나서 모로현(毛老峴)을 넘었다. 모노현 앞에는 큰 시내가 있는데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흘러왔다. 시냇가에는 청심대(淸心臺)라는 석벽이 우뚝하게 서 있었다. 저녁에 진부역(珍富驛)에서 묵었다.

9월 5일 신유. 길을 가서 월정사(月精寺)에 이르렀다. 월정사 아래에는 큰 시내가 있는데 시냇가에 층층의 널찍한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금강연(金剛淵)’이라 새겨져 있었다.

못의 물이 흘러 폭포를 이루었는데 폭포가 바위에 드리워지고, 바위는 계단처럼 층이 나있어 ‘어급(魚級)’이라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시냇물 속의 여항어(餘項魚; 열목어)가 무리를 지어 등용문(登龍門) 오르듯 뛰어 오르는데, 한 번 올라간 후에는 다시 하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위로는 바위의 여울이 모두 얕아서 간혹 많은 물고기가 말라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 뛰어 올라간 물고기는 즐거워하는 듯하고, 위로 올라가지 못한 물고기들은 부끄러워하는 듯합니다. 여러 번 뛰어 올라 반드시 올라가고야 맙니다.” 라고 하였다. 아!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명예를 탐내어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남을 모르는 자들은 모두 이 물고기와 같다. 승려의 말이 비록 꼭 풍자하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충분히 통찰력 있는 경계가 될 만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니 금강연 가에 둑이 있는데, 물과 바위가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소나무, 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참동안 노래하고 시를 읊조리며 노닐다가 돌아왔다.

9월 6일 임술. 월정사 뒤로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첫서리가 짙게 내리고 단풍이 절정이라 환하고 진한 붉은 색이 옷에 어른거렸다. 산수의 정취는 물론이고, 이 단풍 또한 하늘이 만든 좋은 구경거리였다. 사고(史庫)에 이르니 조화숙(趙和叔)이 어제 포쇄(曝晒; 책과 같은 것을 햇빛이나 바람에 말리는 일)의 일로 이곳에 와있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쪽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많은 고개가 둘러싸고 나무숲이 울창하여 속세를 돌아보니 사람 사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치란(治亂)과 영욕(榮辱), 시비(是非)의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에 누가 되는 것이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훌쩍 멀리 떠날 생각이 나게 하였다.

네 번 시내를 건너는데 모두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 놓아 남여에서 내려 걸으니 두려워 건널 수 없을 정도였다. 사자암(獅子菴)에 도착하였다. 사자암은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산뜻하고 전망 또한 툭 트여 좋아할 만하였다. 앉아서 잠시 쉬었다. 또 길을 가서 중대(中臺)에 이르렀다. 대개 이 산에는 오대(五臺)가 있는데, 동쪽은 만월산(滿月山), 남쪽은 기린산(麒麟山), 서쪽은 장령산(長嶺山), 북쪽은 상왕산(象王山), 가운데는 지로산(地爐山)이다. 지로산은 오대의 중간에 위치하는데, 뭇 산이 감싸 안고 있어 그 형세가 마치 왕에게 신하들이 조문하는 듯하였다. 중대의 서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매우 화려하였다. 한참동안 피로를 풀며 오래도록 머물렀다.

지팡이를 짚고 수백 보를 내려오니 길 왼쪽에 ‘옥계(玉溪)’라는 샘이 하나 있었다. 물맛이 매우 달고 부드러웠다. 오대의 샘에는 각각 이름이 있는데, 동쪽은 청계(靑溪), 남쪽은 총명(聰明), 북쪽은 감로(甘露), 서쪽은 우통(于筒)으로 모두 이름난 샘이다. 그 중에서 우통은 한강(漢江)의 발원지이다.

옥계의 서쪽에는 작은 암자가 있는데 ‘금몽(金夢)’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승려가 몇 명 살고 있었는데, 이른 새벽과 늦은 밤에 적멸보궁에서 향을 살랐다. 높고 험하며 쓸쓸하고 적막한 곳에서 바라는 것도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할 수 있겠는가? 이 마음을 옮겨 도(道)를 향하게 한다면 또한 어찌 도달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안타깝도다! 외교(外敎)에 빠짐이여!

상원암(上院庵)에 이르니 상원의 동쪽에 응진각(應眞閣)이 있었다. 응진각의 동쪽에 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잎이 마치 측백(側栢) 같고 부드러웠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고려 말기의 승려)가 손수 심은 것인데, 선사가 떠나면서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내가 다시 세상에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수십 년 전 갑자기 나무가 말라 죽었다가 지금 다시 잎이 생겨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온 아전도 그 가지의 잎이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잠시 후에 산을 내려와 다시 월정사에 도착하였다.

9월 7일 계해. 대관령(大關嶺)을 넘으니 고개의 서쪽은 길이 넓고 평탄하며, 동쪽은 형세가 매우 높고 가팔라 구불구불한 것이 양의 창자 같았다. 해질녘 구산서원(丘山書院)에 이르러 공자(孔子)의 진상을 보니 검은 바탕에 하얀 그림인데, 세속에서는 오도자(吳道子; 당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절을 올리고 나왔다. 큰 시내가 동구로 흘러내리는데, 시냇가의 큰 바위에 ‘방도교(訪道橋) 연어대(淵魚臺)’라고 새겨져 있었다. 세찬 여울과 무성한 소나무는 그 풍취가 완상할 만하였다. 초경(初更)에 강릉(江陵)에 이르러 묵었다.

[참고] 이 번역은 한국문집총간 속 73집 만모유고(晩慕遺稿) 권6에 수록된 「유풍악록」을 저본으로 하였다. 만모유고는 6권 3책의 활자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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