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유람으로 보는 진부역 고찰]

高 柱 浩 승인 2021.09.29 14:35 | 최종 수정 2021.10.10 13:23 의견 0

◆ 허목 척추시기행초어(陟州時記行鈔語)

대관령(大關嶺)을 넘으면 횡계역(橫溪驛)인데 날씨가 매우 추워서 오곡은 자라지 못하고 메밀만 심을 수 있다. 횡계역에서 30리를 내려가면 진부역(珍富驛)인데 그곳에서 월정(月井)까지 올라가면 15리이고, 그 아래는 청심대(淸心臺)이니 또 15리이다.

◆ 동유록(東遊錄) 이세구(李世龜) 1691년 10월 4일(을유)과 10월 5일 기록

10월 4일 : 진부역(珍富驛) 마을에서 말을 먹이고, 또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남쪽으로 벼랑길을 건넜다. 그 왼쪽으로는 월정천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험준한 벼랑이 있었다. 청심대(淸心臺)를 지날 적엔 바위가 위험하여 오르지 않았다. 서쪽으로 5리쯤 가서 모로원촌(毛老院村)에서 묵었다. 마을의 앞산에서는 사슴의 울음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으니, 깊고 궁벽한 곳임을 알겠다.

10월 5일 :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모로현(毛老峴)에 올랐다.

◆ 이현영(李顯英) 풍악록(楓嶽錄) 중 1629월 4월27일 기록

27,8리를 가서 독산원(禿山院)에서부터 성야(省野)를 지나 오대산을 바라보니 운무가 아득하여 비바람을 막고 있었으니 하늘과 땅이 비밀리에 감추어 둔 신령스러운 신선의 집이 아니겠는가. 사람 사람마다 능히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바로 오대천(五臺川)을 건넜는데, ~~

물녘 진부역(珍富驛)에 머무니 푸른 나무가 하늘에 연이어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렸다. 또 8, 9리를 가니 청심대(淸心臺)가 있었으며 매우 넓게 펼쳐져 있어 올라 둘러보고 곧 대화역에 이르러 묵었다.

◆ 운계 김종정(1722-1787)의 동정일록(東征日錄) 중 1759년3월16일과 4월1일 기록

30일. 대화역(大和驛)에서 점심을 해먹고 진부창(眞富倉)에서 숙박했다. 오원역 이후로는 대개 어지러운 협곡이었다. 산도 물도 층층이 겹쳐있고 문득 트였다가 문득 막혀서, 말을 두고 남여를 탔고, 남여를 타다가 다시 말을 탔다. 지나는 역창(譯倉)이 모두 황량한 골짜기와 외로운 마을에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이 생기게 하니, 타향에서의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집은 대개 나무를 깎아 지붕을 덮었는데, 길고 짧은 것이 가지런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역 앞에는 송림이 많았는데 울창하여 볼 만 했다.

◆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의 동정일록(東征日錄) 중 1796년 2월 17일 기록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汀寺)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珍富倉)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淸心臺)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大華館)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沙草街)에서 투숙했다.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의 동유기행(東遊紀行) 중 1778년 9월 3일 기록

3일. 횡계역에서 출발해 40리를 가서 정오에 진부역(珍富驛)에서 말을 먹이고, 3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넘고, 20리를 넘어 태화창(太和倉)에서 묵었다.

초4일. 태화창에서 고개를 넘어 50리를 가서 정오에 운교역(雲橋驛)에서 말을 먹였다.

==============================

◆ <이해>

1) 풍악록에서는 성야를 지나 오대천을 건너 저물녘 진부역(珍富驛)에 머무니 푸른 나무가 하늘에 연이어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렸다. 또 8, 9리를 가니 청심대(淸心臺)가 있었으며 매우 넓게 펼쳐져 있어 올라 둘러보고...

2) 김종정의 동정일록에서는 역 앞에는 송림이 많았는데 울창하여 볼 만 했다.

3) 이병운의 동정일록에서는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 월정사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에서 투숙했다.

( ◆ 기록에 의한 진부역의 이해)

월정사 입구에서 진부창은 10리(3,8km), 진부창에서 거역홀점으이 10리라 했는데 조선선비들의 기행에서 거리 표시는 기행자의 주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보안도 길에 명시된 도로 표지 안내도인듯 한데 아직 찾지는 못하였다. 어떤 유람기에서는 도로를 벗어나라고 하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도로라 함은 보안도가 관할하는 것이기에 이 도로에 거리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진부역을 거커리(거문리 입구)에 역이라고 표시된 지도를 인용하였는데, 이곳은 윗 문장에 각 역간의 거리 사이의 거리표시에 위배됨을 보이며, 정원대가 추정하는 거커리는 청심대 부락의 거역홀점이 아닌가 추정사료된다.

또한 역제, 역참에 있어서 강원도의 57개 역은 춘주(춘천)의 보안도에서 관장하며, 보안도는 종 6품이 관장하며 인력은 9천명 종사 하였다(당시 강원도 전체 인구는 30만정도)으로 도로에 대한 투자는 만만치 안은 점을 볼 수 있는데, 당시 보안도의 강원도 길중에는 방림역, 대화약, 진부역이 중요한 도로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역들은 관동대로 (당시는 京江도로) 길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제란 말이 5~6필이 있으며, 역은 역무에 종사하는 역원이 40여명, 노15, 비10여명이 상주한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역원 취락도 자연 형성된다.

또한 위 문장중에 일반적 서술로 진부역은 성오평을 지나 월정 삼거리도 지나서 오대천을 건너서 있다고 기록했으며. 진부역에서 말을 먹이고 30여리를 가서 모노치가 있다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부역에서 8~9리를 가서 청심대가 있다고 하였다( 1리는 390m 정도로 조선시대는 3번정도 약 380m로 길이가 변동되기도 하였다)

「동정일록」에서는 진부역 앞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볼만했다고 기록하였다.

풍악록에서는 진부역(珍富驛)에 머무니 푸른 나무가 하늘에 연이어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렸다. 또한 어느 선비의 기행에서는 진부에 들에는 울창한 소나무는 처음 보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곳 일대를 대 송정이라 하였으며 현재도 송정이란 지명은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진부역으로 위치가 어디인지 고찰을 함이 진부역 고찰의 과제이다

++++++++++++++++++++++

◆ 거역홀점에 대한 기록

동정일록(東征日錄)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汀寺)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珍富倉)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淸心臺)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大華館)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沙草街)에서 투숙했다.

(이해)

거역홀점(去億屹店)의 店은 우리나라 지명에서 간혹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驛, 院制에서 客館을 뜻한다. 곡 이이선생이 쓴 선비행장에선 조운에 관계하여 서강에서( ㅁ마포 수운의 전함사가 있는 곳) 배에서 내려 水店에서 신사임당이 돌아가신 편지를 받았다 한다. 이러한 민간민간 여행자를 위한 店幕이 생기며 국영의 원은 피폐되었다.

역사(驛舍)는 주로 공사방, 통인방, 객방, 책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방이라함은 말의 꼴도 마련한 사설 주점을 뜻한다.

◆ 모노령(毛老嶺)

모노치의 뜻 연구.

모란[毛老院];‘모로원, 몰원, 모란, 물원, 모롱’으로도 나타난다. ‘院’의 이름 ‘모로원’이 줄어서 ‘모란’이 된 것이다.

‘모로원’의 ‘모로’는 중세어로 ‘메’․‘산’․‘모퉁이(隅)’을 뜻하였으니 ‘모로院’은 ‘산에 있는 院’ 또는 ‘모퉁이(隅)에 있는 院’이라는 말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저작권자 ⓒ 평창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