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일록(東征日錄) (금강산 유람기중 평창부분 발췌)<東征日錄>

高 柱 浩 승인 2021.10.31 15:07 의견 0

동정일록(東征日錄) (금강산 유람기중 평창부분 발췌)<東征日錄>

이병윤(李秉運)

나는 어릴 때 관동의 경치가 천하의 최고라는 소문을 듣고 일찍이 오매불망 그리워하였다. 근자에 고성 군수 류범휴(柳範休)[주 4091] 어르신이 동도주인(東都主人)이 된 일로 인해 더욱 명승을 유람할 염원을 갖게 되었다. 1796년(병진) 1월 24일 별과(別科) 응시 차 한양에 들어갔다가, 방향을 돌려 고성 관아로 가서 풍악산을 두루 유람할 계획을 세웠다.

2월 4일.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니, 임금께서 선비의 풍습이 이익을 좇는다는 것으로 교서(敎書)를 여러 차례 내리면서부터, 주관하는 여러 고시관이 단속을 매우 엄하게 했다. 군졸을 거느리고 과거시험장 안을 두루 다니면서 마구 붙잡아 형틀에 매거나 형조에 옮겨 가두는 데까지 이르렀다. 끝내 선비의 습속은 고쳐지지 않았는데 별 이유 없이 과거장을 파했다가, 다시 다음날(5일) 종장(終場)을 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어제 이미 임금의 엄한 전교를 받들었는데도 과거시험장을 파하는 사태까지 이르렀고, 오늘 또 아무렇지 않게 과거장으로 들어가니, 의(義)를 나누는 것이 매우 심하여 황송했다. 마침내 신가(愼可)와 함께 과거시험을 그만두기로 결의하였다.

초7일. 신가를 전송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떠나고 머무는 때에 마음속은 종일토록 편치 않았다.

초8일. 김현규(金顯奎)–자는 노첨(魯瞻)이다.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김노첨이 먼저 동소문(東小門)을 나가 오참(午站)에서 서로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오후에 동문을 벗어났다. 이는 집과 고향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길이고 부모님의 문안을 받들 방법이 없으니, 근심의 실마리가 마치 삼처럼 얽혀 있음을 깊이 느꼈다

----<중략>-------

<평창부분>

오후에 길을 떠나 강김(江金)을 지나고, 5리를 가서 구산점(丘山店)을 지났다. 5리를 가서 굴면점(屈面店)을 지나고, 5리를 가서 상제민원(上濟民院)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반정점(半程店)에 투숙했다.

이 주점은 대관령 중턱에 있는데 초저녁에 달이 보였다. 출발할 처음에는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죽서루(竹西樓)·망양루(望洋樓)·월송정(越松亭) 등 여러 명승을 두루 보고자 했으나, 노첨이 형세상 중도에 흩어지기는 어렵다고 말려서, 부득이 죽령(竹嶺)으로 길을 잡았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 원만하게 해야 하니, 그 일이 참으로 쉽지 않았다.

17일.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았다. 아래로 굽어보니 아직 거무스레하여 검었다. 오직 쇠잔한 산과 얕은 기슭을 보니 울룩불룩한 모습이 마치 개미두둑과 같았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한 곳의 바다가 일렁이더니 갑자기 땅에서 붉은 기운이 반사되어 나도 모르게 마음에 드는 점이 있었다.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汀寺)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珍富倉)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淸心臺)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大華館)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沙草街)에서 투숙했다.

18일. 가랑비가 종일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출발해 10리를 가서 방림(芳林)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배로 주진(舟津)-평창 경계이다. -을 건넜다.

10리를 가서 평창읍(平昌邑)을 지나고 안현(鞍峴)을 넘어 10리를 가서 약수(藥水)를 지나니 푸른 강과 푸른 절벽이 굽이굽이 볼만한 곳이 있었다. 10리를 가서 마지(麻池)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고, 20리를 가서 배로 사천(沙川)-원주 경계이다. -을 건넜다.

10리를 가서 아치현(峨峙峴)을 넘고, 10리를 가서 주천창(酒泉倉) 관저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5리 남짓 가서 샛길을 따라 20리를 가서 갈동(葛洞)에 도착해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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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이범운의 󰡔면재집󰡕 권2 「동정일록」을 저본으로 하였다. 이 책은 1896년에 5권 3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해및 감상>------------

◆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5리를 가서 횡계관을 지났으며 하는 기록에서 관은 역과 관의 역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횡게 고개를 올라서서 5리를 지나서라는 위치적 서술은 현 싸리재의 횡계 초등학교부근의 위치이며, 현지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구 고속도로 휴게소 부근은 아니란 점으로 다음으로 또 한 선비의 표햔도 이곳 싸리재(축현)을 들고 있다.

◆ 10리를 가서 진부창(珍富倉)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淸心臺)라고 하였다.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 에서 진부역은 거문리 앞 거커리로 고지도에 마방이 표시된 곳이라 주장하지만 고 지도는 비율적 스캔이 안되는 점으로 그리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로서 정원대가 주장하는 거문리앞 거커리의 진부역은 당시 조선선비가 지나면서 눈으로 보고 거역홀점이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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