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昌歷史定立1> 앞으로 조명해야 할 평창역사들,,,

高 柱 浩 승인 2022.01.17 12:59 | 최종 수정 2022.01.17 20:54 의견 0

<平昌歷史定立1> 앞으로 조명해야 할 평창역사들,,,

후세백작 2022. 1. 16.


필자는 지금까지 다년간 수백 편의 평창역사를 바른 정립의 글로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창에서는 아직 많은 역사들이 조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찾아볼 수도 없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듯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까지는 사관적 입장에서 평창의 제반 역사를 논고하였지만, 올해에는 새로운 각도에서 재구성하여 이러한 평창의 향토사를 넘어서는 국가적인 역사물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앞으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다시금 평창역사의 이해를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창의 가장 큰 맥락의 역사로 인류의 태동을 의미하는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이나 평창읍 하리의 청동기 유적으로 고조선식 청동검과 우리나라 최고(最古)연대의 전신 인골이나, 이후 후평리등지의 초기 철기유적등은 학계와 고고연구원이 시굴조사하여 정확한 입증과 그 기록을 가지는 자료로서 본인의 블로그에는 그 모든 평창의 상고사가 잘 그려져 있지만, 평창군의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도 못하고, 또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郡당국이나 이하 역사단체, 향토사가들이 몰랐다고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의 문화재를 고고문화원이 시굴 조사하기에는 평창군에 사용승낙을 득해야 하고 또한 여기서 나온 유물들은 평창박물관이 없기에 외부로 나가지만 그것이 밀반출이 아닌 언제라도 평창에 귀환할수 있는 각서는 작성되었으리라고 본다면, 그 정보를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고 다만, 군 당국 이하 체계 시스템이 부족한 현상이란 점으로 간주되는 것이라 할 수있다.

郡 유관 역사단체들은 위의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이나 하리 청동기 유적, 방림~영월 국도 공사시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종부리. 천동리. 도돈리. 유동리에 고고학계의 시굴작업을 통한 리포트 보고서 파일이라도 보관하고 있습니까?? 평창군이 10여명의 학자들에게 예산을 쏟아넣고 주관한 "수다사지 활용방안"세미나에 대해서도 리포트 기록은 있습니까?
2008년에 시굴 조사한 기화리 쌍굴유적은 필자가 수년전 연대박물관 사이트에서 우연찬케 파일을 다운받아 알려지게 되었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하리 청동기 유적은 필자의 블로그에서 상세하게 알려지며 되었다. 그리고 하리 유적은 보고서 리포트는 2개 있으나 읍면자에서는 한쪽만 그려진듯 하다.

또한 새로 발간될 읍면지 책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일랑 후평리를 위시하여 종부리등 만은 유물시굴조사 자료들이 있으며, 이들은 초기 철기시대의 태동을 알리는데. 이러한 문서는 새롭게 기록되지 못하고 옛날 기록인 주진강에서 석기 한 점 건져 올린거등 옛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가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모르고 옛날 책 되풀이 할려면 뭣하러 예산을 들여 새로 만드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걱정스러운 점은, 평창의 상고사들은 한점의 지방사를 넘어서서 국가적 비중의 역사유적. 유물들일텐데, 아직도 평창인들은 인식조차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기화리 구석기유적이나 하리청동기 유적들은 중요한 문화재나 사적에 오를텐데도, 역사적 조명은 커녕 최소한 안내판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구석기 유적으로 잘 알려진 전곡리 유적에 필자는 전곡리를 무수히 다녀서 잘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그곳에 치장은 전부 다 장식품들이고 전곡리 지형은 마치 도돈리의 강이 굽어 돌아간 곳과 흡사한 강가로 발굴 초기에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는 그저 강변의 별다른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돌멩이 한점이 동양에는 없다하던 애슐리안 돌도끼로 처음 발굴시엔 이 연대는 3만년전의 유물이라 하더니, 이후 세계에 권위적 박사가 와서 학술회의에서 27만여년으로 수정되었다. 그 돌 도끼 한 점과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등만 있으면 구석기 유적은 전부가 된다.

따라서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도 그 내용면에 굴속에 들어간 외부돌과 19종의 동물뼈, 또한 현재로서는 절멸동물도 포함하고 있다는 기록의 안내판이면 족하다. 표지판 하나만 있어도 이곳이 살기 좋아 옛날 3만년전에 집의 주거 공간도 없던 시대에 선사인들이 동굴에서 살았다 하는 느낌. 그 현장을 보고 느끼는 점이 관광이기에 구석기 유적은 알리는 표지판 하나에도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3만년전의 사람들이 살던 자연환경이나 인간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점에 설명은 전곡리보다 기화리 쌍굴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더욱 실감할 수 있는 곳이라는 부분의 이해는 다음 글로서 전곡리 구석기와 석장리 구석기에 비교되는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말 유적을 그려 보이겠습니다.

지난 여름 미탄면장님은 요식업소등 관광자원의 지도를 만들었다 하는데 참으로 신선한 자료입니다.
그림에 기화리 선사유적이 표기되었느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몰라서 누락되었슬 것이고, 이보다 우선 미탄면은 평창군내에 가장 낙후되어 필자는 어느날 저녁에 평창으로 돌아오는 길에 멧둔제에 올라서서 미탄을 뒤돌아보니, 어휴 정말 가로등 하나도 없는 새카만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미탄면은 산업화 발전도 좋겠지만, 조금만 역사 관광자원화 시키면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의 이해를 다음에 하겠습니다.
이렇게 평창역사의 이해와 수용방안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제기합니다.

전 글 "오대산사고 실록의 환수"에 관한 글에서 예문으로 원주시를 들었는데, 이 이야기로 원주에서는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등에 예산을 투입하는 점에서 아니 다 망가진 절간에다 돈을 쏟아붇는데, 그러한 돈 있으면 우리집앞 도로를 더 넓혀주는게 났겠다는등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의 옛 문화는 국보로 보더라도 왕실과 불교라, 원주권에는 치악산 상원사와 그나마 사찰은 폐사지 3개인데.. 흥법사지는 절터만 남았어도 규모도 컸던듯 하며 고려 왕건과도 연결되는듯 하다.

원주시는 문화원주를 위한 노력에 그간 법천사지 지광국사 부도비 한점이 국보였는데, 이제 지광국사 현묘탑의 국보도 현지 정비가 끝나는데로 산속의 법천사지로 이장하기로 문화재청은 결정하였습니다.
(법천사의 지광국사는 고려초 고승으로 왕사나 국사에는 나가지 않았음에도 국사라는 칭호를 붙일만큼 고승이었으며 또한 스님은 진부면 수다사지에 거처했다고 비문 기록에는 전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그간 원주시는 앞만보고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였지, 문화적인 면을 도외시하여 각박하고 삭막한 도시로만 발전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것은 삶의 기반이 충만되지 못하는 노예도시로 전락될것이기에 원주의 선각자들은 역사사료들에 발 벗고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원주권의 역사문화를 이야기하면 사찰은 치악산 상원사 하나정도로 알려지고 문화관광지로는 겨우 박경리의 토지 문학관 하나 있습니다만 가서 보시면 그곳엔 여행자가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의 벤취 하나도 없으며, 돌아볼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아 가볼만한 곳이 않된다고 느꼈는데 필자는 유독 까탈스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그냥 맹목적으로 기록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과거의 역사는 그대로 역사이고 우리가 오늘 발굴하고 조명하는 것은 오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즉 과거와 오늘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함입니다.
또한 잘 준비된 역사공간은 쉼터로서, 레져공간으로 여행자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데 이러한 공간의 특징은 역사사 묻어나고 현장적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스토리텔링화의 키위드를 가진 곳이 선행되기에 역사적 인식의 중요성을 갖는다 하겠습니다.

◆ 조명이 안되고 있는 평창역사
미탄면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고조선 평양식 청동검과 국내 초고의 고인골)/후평리, 주진리등 다수의 신석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 평창의병(동학/ 장미/ 을미의병)/ 월정사와 자칭 오대산인 사명당 조명론 / 천동리를 다녀간 김삿갓은? / 평창아라리(아리랑)/
◆ 평창역사를 보정하여야 할 기록문서들
평창군지(20건이상)/ 평창의 인문지리/평창의 인문지리증보판(약 20건이상) /평창의 임진왜란사/ 국행성황사/ 노산성/봉산서재와 판관대/ 수항리사지에 대한 이해적 논고/ 미탄면 역사의 연개적 이해.
◆ 각종논문
수항리사지 세미나에서 3층 석탑 리포트/국구사우 리포트/국구사우 당위성 논문/ 평창의 무형문화중 목도편/양사언과 평창.

앞으로 이러한 여러 장에 대하여 기록성의 객관적 역사를 넘어서 그 이해와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미래 예시의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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