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平昌歷史 定立 2>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의 이해

高 柱 浩 승인 2022.01.17 15:36 | 최종 수정 2022.01.17 20:44 의견 0

< 平昌歷史 定立 2>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의 이해

후세백작2022-01-16 08:51

◆ 평창역사의 시원은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 입니다.

본 유적은 연세대 박물관의 동굴유적 조사로 청원 두루봉동굴, 단양 상시바위그늘, 단양 금굴, 연당 피난동굴에 이어 2007~8년 기화리 쌍굴 조사를 통하여 신생대 4기 갱신세 동물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동굴유적의 체계를 마련하여 구석기 문화와 자연환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인용합니다.

◆ 기화리 구석기유적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인류의 기원부터 조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류의 기원은 전기구석기 시대로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300~350만년전 오스트랄 피테쿠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여름에는 아프리카 동굴에서 185만년된 인간화석을 발견했습니다( 탄소연대 측정으로는 범위를 넘어서는 연대이기에 옛날에는 지국 남, 북극의 N,S가 어느 시점에서 바뀐 시간대는 인간이 알고 있기에 동굴의 돌멩이들을 표본으로 극성파악을 하여 연대추정 했다 합니다)

이후 50만년전 북경원인, 자바원인. 하이델베르그인은 호모 에릭투스(직립원인/ 선사람)이 나타나고, 20만년전에는 네안데르탈인과 우리나라 역포(평양시)사람, 덕천(평남 덕천 승리산인)사람과 호모 사피엔스(슬기슭 사람)가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검은모루 동굴의 화석은 대략 70만년으로 파악되며, 단양의 금굴 화석은 30만년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인 4만년전부터는 크료마뇽인과 이에 속하는 흥수아이. 승리산인등의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합니다.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제천 점말동굴 유적등이다. 이들은 현생인류에 속하는 여러인종의 직계조상으로 추장합니다.

* 사람 혹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인류로서 사피엔스란 뜻은 지혜롭고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으로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를 순수 우리말로 '슬기 슬기사람"이라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 검은모루동굴- 평양시 상원군 소재 동굴로 70만년전의 살았던 원인(原人)
* 단양의 금굴- 30만년전 남,녀 화석이 발견되었으나 일제때 일인들에 의해 없어졌다. 일제는 내선일체 사상에 조선의 뿌리인 구석기 유물도 파괴한 것으로 사료됨(필자 주)
* 흥수아이-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에서 5세정도의 어린이 유골 발견. 발견자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 흥수아이로 불린다. 여기서부터 현재의 크로마뇽인 입니다.
* 승리산인- 평안남도 덕천군 승리산 동굴의 인골 화석이름.\

◆ 기화리 쌍굴유적의 이해

필자는 지난 몇년전 연대 박물관 기록서를 검색하다 우연히 이를 발견하고 다운받아 250페이지중 시사성 있는 기록만 발췌, 게시하였다.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은 구석기 절대연대측정으로 OSL연대측정(토양사료)와 방사선 연대측정AMS(뼈 유물, 숯사료, 토양사료)를 실시하였다. 토양의 측정값은 45,000년 전에서 58,000년 전까지 나타내며 유물의 방사선 측정 연대는 15,000년전부터 45,000년전의 측정값을 가진다(500년 이하나 5만년 이상의 유물은 탄소14가 너무 많거나 적어서 오차가 커지기에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은 3~4만년전의 유적으로 2007~~8년에 연대박물관팀이 시굴조사하여 위의 연대측정및 과학적 입증으로 1만5천년~4만5천년전의 후기 구석기 유적입니다.

이로서 평창에 알려지게되고 이번 읍면지 편찬에도 미탄면지에 어느정도인지 수록되어 출간 예정인듯 하다. 하지만 아직 평창에서는 그 기록도 없었으며 표지판 하나도 없었다. 아울러 일반적인 학술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현제 인터넷 다음 백과사전에서 평창군을 검색하면 역사단원에서 외람된 글이 나타나고 있다.

(평창에서는)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나 인접한 횡성과 홍천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필자의 게시글에는 모두 다 있습니다. 본인의 글을 보기않은 대부분의 평창사람들이 모르는 역사이기에 인터넷 백과사전에 기록이 잘못된 것만도 아니다.

여기서 쌍굴의 구석기 유적에 대하여 문제는 위에서 4만년전의 공주 석장리나 제천의 점말동굴 구석기는 모든 문헌상에 구석기 유적으로 출간되지만 기화리 쌍굴 유적도 4만년전의 동시대의 구석기 유적이면서 연구논문등에서 조차 기록이 누락되고 있다.

석회암 동굴에 뼈는 알칼리성을 띄기에 오래 보존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연대박물관이 기화리 쌍굴과 같은 방식의 프로젝트로 점말동굴도 조사를 한것인데, 점말동굴의 특이점은 당시 제천시가 6차 조사작업을 진행한바 기화리 쌍굴유적과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내용이지만 국내 구석기유적으로는 잘 알려졌지만,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은 상대적이라기 보다 젼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점의 차이는 제천시주도로 6차 조사를 했다는 점과 평창은 파 묻어 버렸다는 확증적 차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기화리 쌍굴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하늘굴은 깊이가 70m이고 경사도는 10º라 한다. 여기에 연대 박물관 팀의 시굴작업은 자연광이 들어오는 30m지점까지만 지하 1,5m의 바닥까지 시굴조사하였다 한다. 이 문제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 나머지 부분 40m의 시굴 조사작업도 필요하다.

공주 석장리 구석기에서 손보기 교수는 주거용 공간도 파악하였다 하듯이. 기화리 쌍굴도 석기인들이 동굴 입구에서만 생활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동굴 동물도 있고, 추위와 맹수들을 피하는 문제에서 나머지 40m에 조사가 어쩌면 더 많은 유물을 발굴하고 이로서 구석기인을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곡리 구석기는 보웬상병이 강변에서 데이트도중 집어들은 돌이 이상해 본국으로 갈때 싸가지고 가서 세계적 권위의 교수에게 제출하였고, 이것은 구석기 중기시대의 애술리안 돌도끼이니 서울대로 전문을 보내 현장 확인을 해달라고 하였던 바 고, 김원룡박사는 전곡리로 달려가게 된다.

당시로서는 동양에는 애술리안 도끼(돌도끼)가 없다하며 즉, 세계적으로는 동양에 구석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힘든 상황에 미국으로부터 인정해주니 ,김원룡박사는 전곡리에서 돌아오는 차속에서 두 시간동안의 기분은 인생중 최고였다 한다.

이후 제자 배기동 한대교수( 동 기화리 쌍굴 발굴단 고문)는 전곡리 유적 발굴 사업을 이어받아 계속 이 지역 을 답사하고 땅도 파보고 세계적 학술회의도 계최하여 애술리안 돌도끼의 권위자까지 초청 감식한 결과 처음엔 3~4만년전 유적지로 알려졌지만 애술리안 돌도끼는 27만년전의 중구 때의 것이 맞다고 판명하여 동 유적은 27만년전까지 올라가게 된다.

기화리 쌍굴에 유물중에 뗀석기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뗀 석기류보다는 칼지지 못하고 중기 구석기시대 뗀석기같은 모습이다. 물론 당시에 연당 피난동굴, 제천의 점말동굴등도 비슷한 문화권과 같은 연대등의 상황일 것이기에 석기에 대한 의심은 좀 줄어들지만 기화리 쌍굴에서 출토된 뗀 석기들은 후기구석기 이전쯤으로 보일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추정합니다.

물론 당시에 기후는 오늘날과는 좀 달랐던듯 하지만 기화리 쌍굴 아래는 50m만 내려오면 석회암지대의 용출수가 있어 겨울철에도 얼지 않기에 식수가 용이한 지점일듯 하며, 평창읍 도돈리의 구석기 유물이나 열울에 유물들은 간헐적으로 뗀 석기만 파악되지만, 동굴 유적이 더욱 중요한 의미는 뗀석기와 바깥돌 유입상황, 그리고 석기인들이 먹었던 동물의 뼈, 불뗀 흔적등이 있기에 석기인과 상대적으로 그 먹이가 동시에 보여서 석기인들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이해가 좀 의심스러운 점은 청원 두루봉엔 코뿔이(코불이는 소과 동물이 아니라서 코뿔소가 아님) 3점의 화석이 발견되고, 후기 구석기인들은 집단으로 사냥했다 하는데, 19종의 동물 뼈는 모두들 부서져 5mm 이상 물에서 채로 건져서 확인한 뼈들이지만 여기에는 어떠한 동물이든 척추나 갈비뼈등은 없고 손가락 마디 뼈, 턱뼈, 이빨등의 뼈만 있기에, 또한 호랑이등 맹수들도 있는바 아마도 사냥보다는 맹수들이 잡아먹고 남은 부스러기들이나 사체의 잔해들을 주워먹었던 점이 더욱 강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당시 석기인들이 힘든 생활상황을 엿볼수 있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고, 없는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이를 이해해 본다면...

위 백과사전 인용에 반대적으로 평창은 구석기 신석기등 오랜 역사가 있었다고 알려졌다면, 옛부터 인류가 살았던바 이곳은 인간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자연을 지닌 지역이라다는 느낌으로 평창은 기후, 자연환경등이 좋아서 대단히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졌을 것이고,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서술될 것이다.

옛부터 살기 좋은 땅이란 곳과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점의 차이를 쉽게 이해하자면, 부동산 광고는 어느쪽을 더 선택할까요?? 여기서. 평창에 역사가 없었다는 점보다 있었슬때가 보다 좋은 분위기가 될 것이다.

나의 주변에서는 역사라는게 돈이되냐 뭐냐고 투덜거리는 친구들이 많치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사인식은 분명 경제적인 지수를 창출하고 향상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지만 오늘 역사를 들춘다면 그것은 오늘의 역사를 위함입니다. 즉 과거사를 보며 이 지역에 역사의 특이한 정체성들을 가려가며 역사의 스토리텔링화 하여 오늘의 역사를 바르게 더 의미있게 선점적 미래지향을 위한 지식도입인 것이다.

그러면, 다음장에서 청옥산과 육백마지기등에 관한 시대적 이해와 나아가서 미탄면 전체 역사문화인 성마령, 육백마지기의 미탄 아리랑,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 얼음치 박물관, 백룡동굴등 미탄 역사문화의 유기체적 활용반안에 대하여 모색해 보겠습니다.

<평창군 미탄면 기화리 쌍굴유적>

https://blog.daum.net/kkks1/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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